수도권에서 경부나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 대전 지나 대전~진주(통영)고속도로로 바꿔탄 뒤 산청나들목 지나 단성나들목에서 나간다. 20번 국도를 타고 시천·중산리 쪽으로 7~8㎞ 가다가 청계계곡 지나 용문사·백운산장·약수암 등 팻말이 세워진 삼거리에서 우회전한다. 곧 상수리나무 삼거리에서 좌회전해 왼쪽 길을 택해 약 2.5㎞ 오르면 점촌 지나 골짜기 마지막 집이다. 차는 음식점들 주차장에 세우고 걸어 오르는 게 좋다.
단성면 소재지 단성농협 앞의 목화식당(055-973-8800)은 맑게 끓여내는 추어탕으로 이름 높다. 소 숯불구이도 한다.
단성면 길리엔 두 곳의 참숯가마가 있어, 참숯을 구워낸 뒤 찜질을 할 수 있다. 목욕탕·식당도 갖췄다. 길리 청정 참숯굴찜질방의 식당(055-973-3686)에선 삽겹살·오리고기, 국수류·백반을 맛깔스럽게 낸다.
백운계곡에서 25분 거리에 있는 중산리계곡의 지리산계곡모텔(055-972-1441)은 폭포와 깊은 소를 끼고 있는 전망 좋은 숙소다. 직접 재배한 채소류로 내는 반찬과 시래기·우거짓국이 맛있다.
산청군청 문화관광과(055-970-6421)에 문의하면 고가 마을 숙박 등 숙식 안내와 무료 문화유산해설사를 소개받을 수 있다.
백운리 백운동계곡
큰 산은 골이 깊다. 대개 물 맑고 숲 울창한, 멋진 바위골짜기를 거느렸다. 여름이면 이름난 계곡은 피서 인파로 덮인다. 경치 좋은 골짜기를 찾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한가지다. 옛 사람들은 멋진 골짜기마다 이름을 붙이고 이를 바위에 새겼다. 이런 새김글 가운데 ‘동천(洞天)’이란 게 있다. 흔한 건 아니지만, 빼어난 골짜기 한쪽 바윗자락엔 ‘무슨무슨 동천’ 하는 한자가 새겨진 걸 볼 수 있다.
‘동천(洞天)’이란 물 맑고 경치 좋은 곳을 가리킨다. 도교에선 신선들이 사는 곳, 이상향을 뜻한다. 중국엔 36대 동천이 있다고 한다. 우리 선인들도 수려한 골짜기를 찾아 즐기며, 그 곳을 ‘동천’이라 일컬었다. 금강산 만폭동의 바위에 새겨진 ‘봉래풍악원화동천’, 동해 무릉계곡의 ‘두타동천’, 하동 쌍계사 앞의 ‘화개동천’, 강화도 마니산의 ‘함허동천’ 따위가 그것이다. ‘~동천’이란 글씨가 새겨진 골짜기라면, 일단 볼만한 경치를 갖춘 곳으로 볼 수 있다.
지리산에 안긴 고을 산청의 웅석봉(1099m)에서 흘러내린 백운계곡도 이런 곳 중 하나다.
너럭바위에 앉으면 선비의 풍류에 젖는다
‘용문동천’ ‘백운동’이란 글씨가 골짜기 바위에 새겨져 있다. 대원사계곡·내원사계곡·중산리계곡·거림계곡 등 지리산 자락의 장대한 골짜기들의 유명세에 눌려 외지엔 덜 알려진, 훌륭한 바위골짜기다. 본디 용문천으로 불린 물줄기인데, 골짜기에 용이 산다는 용소가 있고, 부근엔 용문암산이 있다. 웅석봉은 동쪽으로 경호강, 서남쪽으로 덕천강을 낀, 지리산권 동북쪽 봉우리다. 산세가 곰을 닮았다고도 하고, 옛날 곰이 떨어져 죽은 곳이라고도 한다. 백운계곡 물줄기는 산 남쪽으로 뻗어내려, 지리산 동쪽 골짜기들의 물을 모아 내려온 덕천강으로 흘러든다.
규모가 웅장하지는 않으나 깨끗하고 거센 물줄기가, 구름처럼 널린 희디 흰 바윗자락을 타고 굽이쳐 쏟아지는 모습이 가슴을 후련하게 해준다. 길고 짧고 넓고 좁은 폭포들과 깊고 얕고 짙푸르고 맑은 물웅덩이(소)들이 줄줄이 이어져, 폭포와 소의 전시장을 방불케한다. 이 풍경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 것이 널찍널찍한 바윗자락이다. 어디에 앉아도 편안하고, 어디를 보아도 경치가 그림같이 펼쳐지는 반석들이다. 크고 작은 폭포와 소, 너럭바위들엔 옛 사람들의 풍류가 깃들여 있다. 이곳을 자주 찾아 즐긴 7명이 있었는데, 이를 백운동 7현이라 부른다.
이 멋진 골짜기를 말할 때 조선 중기 성리학의 대가이자, 영남 사림파의 거두였던 남명 조식(1501~1572)을 빼놓을 수 없다. 합천에서 태어나 61살 때 백운계곡 부근 덕산으로 옮겨와 산천재를 짓고, 생을 마칠 때까지 후학 양성에만 전념한 전형적인 선비다. 나라가 어려울 땐 상소를 올려 직언을 서슴지않던 분이다. 명종·선조 등 임금들이 그의 학덕을 평가해 거듭 불렀으나, 끝내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대자연에 묻혀 산 ‘산림처사’였다.
남명 조식 즐겨 찾던 곳…40여 폭포와 소
덕산 시절, 남명이 가장 즐겨 찾던 곳이 바로 백운계곡이다. 제자들과 함께 수려한 경치를 즐기며 풍류에 젖기도 하고, 나라를 걱정하며 시름에 잠기기도 했다. 골짜기 중간쯤의 너럭바위 옆 바위에 ‘용문천’이란 글씨가 보이고, 그 뒤쪽 바위엔 ‘남명선생장구지소(南冥先生杖구(나막신 구)之所)’란 글씨가 또렷이 새겨져 있다. 남명이 탁족을 하며 즐길 때 지팡이와 나막신을 뒀던 곳으로, 제자들이 새긴 글씨로 추측된다.
골짜기 바위엔 이 곳을 즐겼던 이들이 새겨놓은 글씨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마지막 민가 지나 100여m 오르다 오른쪽 벼랑 밑을 내려다보면, 물줄기가 좁아져 급류와 폭포를 이루고 있다. 물길 오른쪽 바위벽에 ‘백운계원’들의 이름이 작은 글씨로 정연하게 적혀 있다. 여기서 상류로 20여m 떨어진 곳엔 ‘영남제일천석’이란 글씨가 큼직하게 새겨져 있다. 이 주변을 등천대라 부른다.
기록에 따르면 각각 20여개에 이르는 폭포와 소마다 이름이 붙어 있다. 목욕을 하면 자연히 많이 알게 된다는 다지소(多知沼)를 비롯해, 청의소·아함소·장군소, 오담폭포·수왕성폭포·15담폭포·칠성폭포 등이 있다 하나, 이름이 새겨져 있지 않아 일일이 확인해 보기는 어렵다. 골짜기 주변엔 바위구멍에서 쌀이 나왔다는 화장암, 한림사·용문암·백운암 등 절과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백운동계곡은 개인땅이어서 보고 즐길 수 있는 지역이 제한돼 있다. 골짜기 안의 마을인 점촌에서 비포장 수레길을 오르면, 백운농원 입구 지나서 오솔길로 바뀌고 곧 굳게 닫힌 낮은 철문이 나타난다. 여기까지 1㎞ 남짓의 짤막한 바위골짜기만 즐길 수 있으나, 이 사이에도 볼만한 경치들이 수두룩하다. 중간 일부 물길은 벼랑 밑에 있어 다가가기가 위험하다. 길 옆 두세 곳에 간이의자들과 간이화장실이 설치돼 있다. 화장실 옆 등은 쌓인 쓰레기더미를 치우지 않아 지저분하다. 차가 들어갈 수 있으나, 길이 험해 사륜구동형 차라야 안전하다.
단속사지
단성면 운리 웅석봉 남쪽 계곡에 자리했던 단속사(斷俗寺)는 통일신라 이후 고승을 많이 배출해 1,000여 년의 법통을 이어왔는데, 1568년(선조 1년) 유생들이 불상과 경판 등을 파괴하고, 이어 정유재란 때 불타버린 후 재건됐으나 현재는 폐사됐다.
보물로 지정된 단속사지 동삼층석탑(보물 제72호)과 서삼층석탑(보물 제73호)이 있고, 당간지주(幢竿支柱)가 남아있다. 동·서 삼층석탑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으로 비례미와 균형미가 잘 조화되어 안정감이 있고, 또한 치석의 수법이 정연하여 우아하다. 삼국통일 이후에는 이 같은 쌍탑 가람형식이 지방의 깊은 산골에까지 전파됐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절터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와당을 비롯한 석물들이 출토되고 있으며, 주변 민가의 담장이나 집안에 많은 석물들이 흩어져 있다.
단속사 창건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 두 가지 설이 전한다. 748년(경덕왕 7년) 왕의 총애를 받던 이준(李俊)이 조연소사(槽淵小寺)를 개창하여 단속사라 하였다는 설과, 763년(경덕왕 22년)에 신충(信忠)이 벼슬에서 떠나 지리산에 들어가 삭발하고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창건했다는 설이다.
김일손(金馹孫)이 정여창(鄭汝昌)과 함께 천왕봉을 등반하고 쓴 <두류기행(頭流紀行)>에서 단속사를 ‘절이 황폐하여 중이 거처하지 않는 곳이 수백 칸이나 되고 동쪽 행랑에 석불 500구가 있는데 하나하나가 각기 형상이 달라 기이하기만 했다’고 적고 있다.
청계리 청계계곡
선사시대의 유적인 '선돌(立石)'을 비롯해 천년의 풍상을 이겨온 석탑이 아직 남아 있는 단속사지, 600여 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매화나무가 봄이면 꽃을 피우고,혹독한 시집살이를 못 이겨 죽고만 어느 여인의 한맺힌 삶이 아직도 고갯마루에 돌무덤으로 서있는 계곡이 청계계곡이다.
볼거리가 많고 사연이 많은 계곡답게 차로 한달음에 찾아갈 수 있게 잘 개발되어 있으며 청계(淸溪), 단속(斷俗)등의 이름에서 벌써 예사롭지 않은 곳임을 알 수 있다. 먼저 계곡이 얼마나 맑았으면 '청계'라 했나 싶고, 골짜기가 얼마나 깊으면 속세와 인연을 끊는다는 '단속'이라 했을까 싶다.
먼저 청계계곡의 들머리에 해당하는 남사마을부터 고적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목화를 처음 재배한 배양마을에서 중산리 방면으로 4㎞ 거리에 있는 남사마을에 들어서면 정감 있는 토담집 앞에 우뚝 솟아있는 솟을대문 그리고 고졸한 멋이 느껴지는 40여채의 기와집과 동네를 뒤덮고 있는 숲에서 조선시대양반들의 품위를 느낄 수 있다.
남사마을을 지나면 호암교 위로 운곡 관광농원, 다물민족학교등의 푯말이 있는데 이 푯말을 따라 들어가면 청계계곡이다. 계곡을 들어서면 입석마을을 보게된다. 입석 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높이 약2m의 선사시대 유적인 '선돌'은 청계계곡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는 증거물인 셈 이다.
단속사는 가족간에 오붓이 야영할 수 있는 공간과 도로변에 민박집이 있어 쉼터로도 적당하다. 또 신라시대에 창건한 고찰 단속사는 현재 보물 72, 73호인 3층석탑이 있고, 한때는 경덕왕의 초상화와 솔거가 그린 유마상 (維摩像)에, 각기 다른 형상의 석불만도 500여기가 있었다고 한다. 석탑이 있어 마을 이름도 탑리로 부르는 단속사터에는 옛절의 규모를 말해주듯 당간지주가 석탑과 멀찍이 떨어져 있다.
당간지주를 지나 석탑 앞으로 올라서면 천년의 세월을 지나오면서도 그 자태를 잃지 않고 있는 탑 2기가 동서로 나란히 서 있다. 아무 기교없이 다듬어 놓은 단아한 모습의 석탑은 그것으로 이미 지난 세월의 풍상을 모두 말해준다. 특히 석탑 앞의 대나무는 석탑을 지키기라도 하는 듯 올곧게 서 있고, 석탑 뒷편 정당매(政 堂梅)로 불리는 매화나무와 비각은 또 하나의 전설을 더해준다.
탑을 돌아나와 고갯길로 올라서면 오른쪽으로 청계계곡의 백미라 일컫는 계곡이 나온다. 여름이면 사라진 절의 흔적인양 바위틈새를 비집고 서 있는 소나무 그늘을 의지한 텐트들이 들어서는 곳이다. 여기가 없었다면 청계계곡이란 말도 없었을 정도로 계곡이 아름답다. 넓다란 시내폭에 잔돌로 이루어진 공터가 있고, 물도 맑은데다 깊이도 어른 무릎 정도라 물놀이 하기에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방방곡곡 > 경상남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청 20번국도-도전리 마애불상군 (0) | 2009.01.13 |
---|---|
산청 단성면-묵곡리 성철스님생가 겁외사 (0) | 2009.01.13 |
창원 진해-안민고개~웅산 (0) | 2009.01.07 |
김해 어방동-분성산 김해천문대 가야테마파크 (0) | 2008.12.29 |
고성 청광리 청광마을 한옥숙박시설 박진사고택 (0) | 2008.1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