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방방곡곡/드라이브 뚜벅이

옛돌담길마을/민속마을/한옥마을

by 구석구석 2008. 12. 9.
728x90

  

켜켜이 쌓인 돌담... 세월을 에두르다

 

 

우리 주변에서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꼽자면 '돌담길'도 그중 하나다. 고샅길 따라 이어지는 굽고 좁다란 길을 거닐 때의 운치란 또 다른 경험이다. 고즈넉함 속에 배어 있는 푸근한 정감은 물론, 마치 내 태생의 본류를 찾아가는 미로 속에 빠져들기라도 하듯 감동과 여운에 젖어 들게 한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돌담길은 우리 민족의 미적 감각과 향토적 서정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문화유산으로 이제는 문화재 대접을 받기에 이르렀다. 

 

 

 

산수가 수려하고 학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학동이라 명명되면서 형성된 유서 깊은 마을인 학동 마을은 수태산 줄기가 마을 뒤로, 마을 앞은 좌이산이 솟아 있는 소위 ‘좌청룡우백호’의 지세. 마을 옆으로는 학림천이 흐르고 있어 전통마을의 배산임수형 입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마을의 가옥은 당시 대부분 새마을운동 당시 슬레이트 기와로 개량되었으나 문화재자료 제208호 ‘육영재’ 등 일부 전통가옥이 보존되어 있어 전통마을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또한 이 곳의 담장은 수태산 줄기에서 채취한 납작돌(판석두께 2~5㎝)과 황토를 결합하여 바른 층으로 쌓은 것으로 다른 마을에서는 볼 수 없는 고유한 특징이 있으며 건물의 기단, 후원의 돈대 등에도 담장과 동일한 방식으로 석축을 쌓아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남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마을 주변 대숲과 잘 어우러져 수백 년을 거슬러 고성(古城)으로 끌어들이는 듯한 마을 안길의 긴 돌담길은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학동마을 최씨종손댁으로 이곳 학동마을 담장은 마을 뒤 수태산에서 채취한 변성암 계통의 정판암을 사용하여 바른층 쌓기를 했는데 그 모양새가 예술적이다. 경남신문 이준희기자

 

 

의령 오운마을

등록문화재 제365호로 지정된 의령군 낙서면 전화리 ‘오운마을 옛 담장’은 마을의 토석담과 돌담 1000m와 탱자나무 울타리 200m가 그 대상이다.

50여 가구가 모여 살고 있는 오운마을의 형태는 표주박 모양으로, 재실과 정자, 그리고 한옥들마다 돌담과 토석담, 탱자나무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어 전형적인 양반촌의 멋스러운 정취를 자아낸다. 여기에 마을 입구의 한옥에 둘러쳐진 탱자나무 울타리는 돌로 단정하게 쌓은 기단 위에 조성되어 있어 더욱 멋스럽다. ☏의령군 문화관광과 570-2442.

 

 

 

 

거창 신씨 씨족마을로, 마을 어귀에는 군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폭 5m 이상, 높이 15m이상의 수령 600년에 달하는 고목이 자리하고 있어 마을의 역사를 말해준다. 마을 내 주택들은 대개 19세기 말초에서 20세기 초에 건립된 것으로 한말과 일제강점기 지방 반가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며 규모와 형식면에서 월등함을 보여주는 시도민속자료 제17호 ‘거창대정리신씨고가’ 등의 지정문화재는 전통마을로서의 가치를 더해주고 있다. 이 마을의 담장은 대개 토석담으로 담 하부 2~3척 정도는 방형에 가까운 제법 큰 자연석을 사용하여 진흙을 사춤하지 않고 대부분 메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자연석으로 메쌓기 한 위에는 하부의 자연석보다 작은 20㎝ 내외의 돌을 담 안팎에 사용하여 진흙과 교대로 쌓아 올렸고 대부분 담장 상부에는 한식기와를 이었으며 또한 근년에 쌓은 담장은 기존 담장과 달리 엇쌓기를 하였다. 마을의 시한당 앞 연못은 일반적인 한국전통의 연못양식인 방지원도형(方池圓島形)이 아닌 원지방도형(圓池方島形)으로 구성되어 있어 독특하다. 전반적으로 전통고가와 어우러진 활처럼 휘어진 전통 담장길은 매우 고즈넉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고 있다.

 

 

 

 '산청쌀’ 로 유명한 단계마을은 세도가와 부농(富農)이 모여 살아 인물이 많이 난 마을로 알려져 있다. 마을 내 전통주택들은 조선후기에서 근세에 이르는 시기에 건립된 부농주택으로 규모가 매우 크고 권위적이며 시도민속자료 제4호 ‘단계박씨고가’가 그 정점을 이루고 있다. 담장은 돌담과 토석담이 혼재되어 있으며 높이 2m 정도로 높은 편이다. 담 하부 2~3척 정도는 방형에 가까운 큰 돌로 진흙을 사용하지 않고 메쌓기 방식으로 쌓았으며 그 위에는 하부에 사용한 돌보다 작은 돌을 사용하여 진흙과 교대로 쌓아 올렸다. 담 상부에는 판석을 담의 길이 방향으로 담 안팎에 3치 정도 내밀어 걸치고 그 위에 기와를 올렸는데 이는 기와의 흘러내림을 방지하기 위한 것. 전체적으로 이 마을의 담장은 전형적인 농촌 가옥들과 잘 어우러져 있고 특히 ‘단계박씨고가’ 진입부의 돌담길은 독특한 이미지를 자아내고 있고 있다.

 

단성면 남사리의 ‘남사마을 옛 담장’ 등록문화재 제281호

토담과 돌담이 한옥과 어우러져 고풍스러운 풍경을 이루고 있다. 최씨고가나 이씨고가 등 양반가와 연일정씨 문중 재실인 사양정사, 이사재 주위는 토담이 잘 남아 있으며, 민가에는 돌담이 많이 사용되어 전통사회의 신분에 따른 담의 구조와 형식의 차이를 볼 수 있다. 토담 하부에 길이 50~60cm의 큰 막돌을 2~3층 메쌓기하고 그 위에 황토를 편 다음 막돌을 일정한 간격으로 벌려 놓고 돌 사이에 황토를 채워 쌓았다. 담 상부에는 전통 한식기와나 일식(日式) 평기와를 얹어 비로 인한 붕괴를 막았다. ☏산청군 문화관광과 970-6443.

 

 

 

보통 돌담이라고 하면, 실제로는 돌과 진흙을 섞어 쌓은 토석담장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한밤마을 돌담장은 다르다. 오직 돌을 쌓고 또 쌓아 담을 올렸다. 진짜 100% 돌담이다. 어른 머리통만한 돌을 나란히 쌓고는 작은 돌로 빈틈없이 메웠다. 돌만 가지고 쌓기가 힘들어서인지 돌담은 하부가 넓고 상부가 좁다. 아래쪽 폭이 1m가 넘는 경우도 있다. 독특한 한밤마을 돌담에는 사연이 깃들어 있다.

 

경오년(1930년) 대홍수 때 떠내려온 돌에 마을 전체가 휩쓸렸다고 한다. 떠내려온 돌을 치우고 쌓아 올리면서 돌담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돌담 축조 방식도 막돌을 그대로 올린 것이다. 돌담은 홍수로 피해 입은 마을을 복구하는 방법이었고, 동시에 홍수 복구를 기념하는 상징물인 셈이다. 

 

행정지명은 경북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大栗里). 율리(栗里), 일야(一夜), 대야(大夜)라고도 한다. 우리말로 바꾸면 어쨌건 모두 한밤인 건 마찬가지다. 한밤마을 돌담길이 문화재로 등록될지 여부는 그러나 불투명하다. 한밤마을 주민들은 재산권 행사 제한을 우려해 등록문화재 지정을 반대하고 있다.

가는 길: 중앙고속도로를 달리다 군위IC에서 빠져 나와 2번 우회전한다. 5번 국도 대구 방면으로 6㎞쯤 달리면 효령 삼거리다. 부계삼거리에서 군위 삼존석불 쪽으로 가다 보면 나온다.

주변 볼거리: 군위 삼존석불(국보 109호), 동산계곡, 팔공산도립공원, 대율사, 대율동 석불입상 등이 있다.
식사·숙박시설: 음식점은 삼존석불이 있는 삼존석굴 주변, 그리고 삼존석굴에서 한밤마을로 가는 길가에 잠잘 곳이 몇 곳 있다.
문의: 군위군 새마을주민과 (054)380-6062 

 

 

 

낙동강 지류인 흰내(白川)를 건너면 영취산에서 흘러내린 낮은 구릉지에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돌담길은 마을을 관통한다. 남에서 북으로 차츰 올라가는 경사지를 따라 왼쪽으로 휘감기기도 하고, 오른쪽으로 돌기도 했다. 곡선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직선도 아닌 자연스러운 선. 성주군 학예연구사 박재관씨는 “마을 주민이 대대로 살아오면서 쌓아올린 담장”이라고 했다.

 

문화재청이 근대문화재로 등록 예고한 경북 성주군 한개마을 돌담길이다. 한개마을은 성주 이씨 집성촌이다. 풍수지리를 안다는 사람들은 “영남에서 이만한 길지(吉地)는 없다”고 한다. 영취산을 중심으로 좌청룡과 우백호가 마을을 아늑하게 감싸 안았다. 세종때 진주목사를 지낸 이우가 이곳에 처음 터를 잡았다고 하니, 마을 나이가 550년쯤 된다.

 

한개는 크다는 의미인 ‘한’과 나루를 뜻하는 ‘개’가 합쳐진 말이다. 과거 이 마을 앞에는 제법 큰 나루터가 있었다고 한다. 성주 내륙지방과 김천, 칠곡 지방을 잇는 물목이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목으로 사람과 물자가 몰려 북적댔다. 세월이 흐르고 물길이 바뀌면서 나루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루터가 있던 자리는 이제 논밭으로 변해 있다.

 

마을에는 가옥 70여호가 돌담길을 따라 좌우로 늘어서 있다. 과거 마을이 번창했을 때는 100호가 넘었다고 한다. 번듯한 전통 한옥도 여럿 남아있다. 이중 한주종택(寒州宗宅), 월곡댁(月谷宅), 북비고택(北扉古宅), 교리댁(校理宅), 하회댁(河回宅), 극와고택(極窩古宅), 진사댁(進士宅) 등 일곱 집은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아래 지도 참고)

 

한개마을과 이 마을 돌담길이 옛 모습을 고스란히 유지할 수 있었던 건 현재 교리댁에 살고있는 성주 이씨 일족인 이영태(85)옹의 공이 컸다. 일제 시절 미술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유학했던 그는 잠시 학교에서 일하다가, 서른 살이 되던 해 한개마을로 돌아왔다.

 

조상이 물려준 모습 그대로 고향을 지키려는 이옹에게는 일제보다 고(故) 박정희 대통령 시절 새마을운동이 훨씬 버거운 상대였다. “시멘트를 쪽쪽 바르란 걸 내가 반대했어. 그랬더니 군청에서 나와 ‘새마을운동을 방해하는 암적 존재’라고 비난하고 협박했어. 끝까지 버텼지.”

이옹이 그렇게 돌담을 지켜낸 돌담길은 돌과 진흙을 섞어 쌓은 ‘토석담장’이다. 담 아래쪽은 크고 각진 돌을 깔고, 위로는 남자 어른 주먹만한 작은 돌로 차츰 작아져 안정감이 있다. 돌과 돌 사이는 진흙을 채워 다졌다. 깨진 기왓장을 진흙 사이 끼워넣어 장식하기도 했다. 비와 눈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기와를 담에 얹었다.

6~7도 경사지를 따라 마을과 가옥이 지어졌기 때문에 집과 길을 가르는 돌담은 높이가 꽤 높지만, 남과 북으로 이어지는 집들 사이 돌담은 그리 높지 않아서 아랫집 용마루가 내려다 보인다. 경사지에 축대를 쌓고, 축대에 여러 꽃과 풀을 심어 정원처럼 꾸미기도 했다.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왜관 톨게이트에서 빠져나와 김천에서 성주 방면 4번 국도로 접어든다. 17㎞쯤 가서 우회전해 905번 지방도로를 타고 성주쪽으로 간다. 성주읍에 가기 전 좌회전하여 월항면 소재를 거쳐 선남면 방면으로 2㎞ 가면 왼쪽에 있다.

주변 볼거리: 세종대왕자태실, 독용산성, 회연서원
식사·숙박시설: 한개마을에는 없다. 인근 안포리에 여관과 식당이 있다.
주의할 점: 한개마을은 민속촌이 아니다. 한밤마을, 옻골마을도 마찬가지다. 주민들이 살고 생활하는 마을이다. 돌담길은 가능한 조용히 걷자. 주인의 허락을 구한 뒤 집에 들어가 구경하면 주인과 손님 서로 좋다.
문의: 성주군 새마을과 (054)933-0021 

 

하회마을 -조선 유교문화 전통 그대로-

경북 안동시 풍천면. 산이 물을 얼싸안고 물은 산을 휘감은 산태극, 물태극의 형상으로 지명이 하회(河回)마을이 됐다. 아름다운 낙동강변의 기암절벽과 송림, 모래사장을 배경으로 사대부집부터 하층계급 가람집에 이르기까지 300~500년 된 130여호의 대·소 고가들이 보존돼 있다.

고려말까지 안씨 집성촌이었으나 조선초 공조전서 류종혜가 입향한 뒤 풍산 류씨 집성촌으로 전형적인 동성부락을 이루었다. 조선조 대유학자인 겸암 류운룡,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 등을 배출했다.

조선의 유교문화 전통을 잘 간직한 하회마을은 별신굿탈놀이와 하회탈이 유명하다. 하회병산탈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탈. 병산탈 2개 초랭이, 양반, 백정탈 등 9개의 하회탈이 국보 제121호로 지정돼 있다. 문의 : 하회마을(0571)854-3669

 

양동민속마을 -신라고도 터에 조선가옥 눈길-

경북 경주시 강동면. 경주의 문화유산 대부분이 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인데 비해 양동마을은 조선시대의 유교문화를 보여주는 곳이다.

나지막한 설창산을 배경으로 150여채의 고풍스런 가옥과 15개소의 정자·비각·강학당 등 조선시대의 전통가옥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500여년전인 조선초기에 여강 이씨와 월성 손씨가 처가를 따라 입향해 한마을에 모여살며 형성된 마을이다.

남부지방 가옥의 전형적인 모습과 우리 씨족사회의 질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언적선생, 손중돈선생 등이 이 마을에서 배출된 인물. 손씨 대종가로 조선 초기 목조건물의 전형을 보여주는 서백당, 이씨 대종가 별당인 무첨당, 손씨의 파종가인 관가정 등은 문화재와 보물로 지정돼 있다.

경주IC에서 빠져 경주시내를 거쳐 포항방면 7번 국도를 타고 안강까지 가면 된다. 문의 : 경주시 문화공보실(0561)762-4213

 

 

 

 

대도시 안에 조선시대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양반마을이 남아있다. 대구국제공항 동편 외곽도로를 따라 1㎞쯤 가면 둔산동이다. 도로를 따라 계속 직진하면 얼마 가지 않아 복숭아 과수원이 나온다. 과수원 사이로 도로가 한동안 이어진다. 길이 끝나는 곳에 마을이 나온다. 대구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이다. 옻골이라는 이름은 마을 남쪽 냇가에 옻나무가 많아 붙여졌다.

 

 

경주 최씨 칠계파 후손들이 모여산다. 대암 최동집이 1616년(광해군 8년) 일족을 이끌고 들어와 정착했다. 대암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싸운 태동공 최계의 아들로, 인조 때의 학자이다. 흙과 돌을 섞어 쌓은 돌담길은 곧되 마디마디 꺽어진 대나무처럼 생겼다.

 

 ▲ 백불암 14대 종손 최진돈(60)씨가 대구 옻골마을 돌담길을 따라 걷는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아들과 손자도 이길을 걸을 것이다. / 조선영상미디어 김승완기자

 

정려각(충신, 효자 열녀를 표창하기 위해 왕이 세우도록 내린 홍살문)을 지나자마자 왼쪽으로 90도 꺽인 돌담길은 마을 가장 깊숙한 뒤쪽에 자리한 이 마을의 종가(宗家)인 백불고택(百弗古宅)까지 오른쪽 왼쪽으로 조금씩 꺽이면서 이어진다. 또 대문 앞 짧은 샛길은 안길과 직각으로, 즉 T자를 그리면서 만난다. 그래서 대문이 바로 드러나지 않는다.

왜 이럴까. ‘산림경제’는 “집으로 똑바로 오는 길은 좋지 않으니, 반드시 굴곡을 주어야 한다”고 했다. 한필원 한남대 교수는 ‘한국의 전통마을을 가다’에서 “조상들은 길을 이동로 뿐 아니라 기의 통로로 보았던 것이다. 기가 면전으로 직접 들이닥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여겼다”고 설명하고 있다.

 

 

관광안내: 문화관광해설사가 2월~11월 매일 오전 10시·11시, 오후 1시·2시·3시4시 마을 구석구석을 데리고 다니며 안내해준다. 마을 입구 관광안내부스에 시간 맞춰 기다리면 된다.
문의: 대구시청 관광과(053-803-3901), 대구관광문화정보시스템(tour.daegu.go.kr)

 

 

 

지전이라는 이름은 예전부터 지초(芝草)가 많이 나던 곳이라 하여 붙여졌다고 전해지며 마을 옆을 흐르는 남대천가의 오래된 여러 구의 느티나무가 마을의 역사를 짐작케 한다. 마을 뒤로 소백산 줄기가 이어지고 있으며 마을 뒷산에서 발원하여 마을의 좌측을 지나는 남대천은 여름철 명소로서 우수한 경관을 뽐내고 있다. 마을은 개량 기와집 형태의 가옥이 주종을 이루는 전형적인 농가주택의 면모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담장은 본래 기능인 주택의 경계 역할을 하는 담장과 외벽의 기능을 하는 담장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이 마을의 대부분의 담장은 본래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담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토석담은 흙과 자연석을 혼용하여 평쌓기를 한 것으로 이어진 담장은 시각적 연속성을 주고 있으며 담의 지붕은 한식기와가 아닌 시멘트 기와로 처리되었다. 또한 전통가옥, 남대천, 노거수와 더불어 마을 전체에 식재되어 있는 감나무는 한 폭의 풍경화를 연상케 할 뿐더러 이들과 어우러진 담장 또한 산골 마을의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다.

  

 

 

 

함라마을은 홍길동전의 작자로 유명한 허균이 함열로 유배 와있는 동안 여러 작품들을 집필한 곳으로 알려져있다. 마을 뒤의 함라산을 주산으로 하여 그 옆으로 부를 가져온다는 와우산이 마을전체를 싸고 있고 앞으로는 넓은 들이 펼쳐져 있어 일찍이 부농촌으로 자리 잡았다. 마을의 건축물은 새마을운동 당시 상당부분 신축 또는 개축된 것으로 시도민속자료 제23호 ‘김안균가옥’ , 제85호 ‘함열향교대성전’ 등의 지정문화재가 마을의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다. 담장은 토석담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이 외에도 토담, 돌담, 전돌을 사용한 담 등 다양한 형태의 담이 혼재되어 있다. 평 쌓기 방식으로 축조되었으며 담의 지붕은 한식기와가 아닌 시멘트 기와를 써서 처리되었다. 담장의 높이는 일반 농가의 담장이라는 점과 주택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점에 비하여 높은 점이 한 특징. 또한 차순덕 가옥의 담장은 거푸집을 담장의 양편에 대고 황토흙과 짚을 혼합하여 축조한 보기 드문 전통적인 방식으로 축조되어 있어 눈에 띈다.

 

순창고추장 민속마을 -‘고향의 맛’ 간직한 한옥 즐비-

전북 순창읍 백산리. 잘 말린 태양초를 빠고 찹쌀로 만든 콩메주를 띄워 만든 된장과 고추장이 유명한 한옥 민속마을이다.

97년 11월 순창고추장의 전통보존을 위해 연구검사실까지 갖춘 대단위 민속마을을 만들었다. 문옥래할머니 등 고추장 기능보유자 19가구를 비롯, 모두 54가구가 입주해 있다.

조선 태조 때부터 진상품인 순창고추장 맛의 비결은 천혜의 자연조건과 고유의 제조비법. 일조량이 많고 기름진 평야에서 나오는 찹쌀이 주재료. 강천산에서 시작되는 섬진강 상류의 맑은 물로 고추장을 담근다. 봄철 메주를 뜰 때나 말릴 때는 솔숲에 널어놓는다. 더덕 무 도라지 오이 마늘 등으로 만든 장아찌 맛도 뛰어나다. 강천사와 내장사가 가깝다.

호남고속도로~정읍~순창 코스나 장성~담양~순창 코스를 이용한다. 순창읍내에서 광주쪽 24번 국도를 타고 가면 백산리.문의 : 백산마을(0674)53-8101

 

낙안읍성 -왜구 막은 낙안읍성 성벽 우뚝-

전남 순천시 낙안면. 서민적 친근함이 물씬한 민속마을. 읍성 가운데 유일하게 동내리·남내리·서내리 등 3개 마을 100여세대가 살고 있다.

400년전에 축성된 높이 4m의 성벽에 오르면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곳곳에 세워진 짚더미, 두엄냄새가 가득한 고샅, 대나무로 엮은 사립문 등 정겨운 옛 모습이 잘 보존돼 있다. 토방·섬돌·장독대·초가지붕 등도 정겨운 고향 정취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조선 태조 6년 왜구가 침입하자 이 고장 출신 김빈길이 의병을 일으켜 토성을 쌓은 것이 낙안읍성의 시초. 그뒤 인조때 군수 임경업이 약 3년에 걸쳐 현재의 석성을 완성했다. 조선시대 객사와 초가 9채, 옛 관아건물 등 중요한 민속자료가 많아 지난 84년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됐다.

가까운 곳에 송광사와 선암사를 품고 있는 소백산맥 끝자락에 조계산이 있다. 비룡폭포와 옥수담 등 경관이 수려하다. 가벼운 등산을 즐기기에 좋다. 문의 : 낙안읍성관리사무소(0661)754-6632

  

 

 

 

병영마을은 옛 병마절도사의 영(營)이란 명칭에서 유래된 마을로 오랜 역사 속에서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주위의 크고 작은 산으로 둘러싸여 분지 형태의 천연요새로, 일찍이 전라도의 군수권을 통괄했던 병영성이 이곳에 들어섰으며 빠른 상업의 발달을 이룬 곳이다. 담장은 전체적으로 돌과 흙을 번갈아 쌓은 토석담으로 하부는 비교적 큰 화강석을, 중단 이후로는 어른 주먹정도의 비교적 작은 돌을 사용하여 쌓아 올렸으며 담 위에는 기와로 지붕처리를 하였다. 또한 담장역할을 하는 부속채도 담장과 같은 높이와 방식으로 축조되어 있어 서로가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높이는 2m 정도로 높은 편이고 이는 병영마을이라는 특성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마을 안길이 직선형으로 되어 있어 담장이 한층 정연해 보인다. 특히, 하멜 일행이 7년간 이곳에 머무는 동안 그들로부터 습득한 것으로 전해오는 담쌓기 방식인, 중단 위쪽으로 얇은 돌을 약 15° 정도 눕혀서 촘촘하게 쌓고, 다음 층에는 다시 엇갈려 쌓는 일종의 빗살무늬 형식은 타 지방과 다른 독특한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삼지천 마을은 예부터 농산물이 풍부한 지역으로 창평 유지들의 요람이었다. 동편에는 월봉산, 남쪽에는 국수봉이 솟아 있고 마을 앞을 흐르는 천의 모습이 봉황이 날개를 뻗어 감싸 안고 있는 형국으로이라 하여 삼지(내)천[三支(내)川]이라 불렀다고 한다. 마을 내에는 시도민속자료 제5호 ‘담양고재선가옥’을 중심으로 여러 채의 전통한옥이 잘 남아 있어 전통마을로서의 가치를 더하고 있다. 이 마을 담장의 구조는 전반적으로 돌과 흙을 사용한 토석담으로 비교적 모나지 않은 화강석 계통의 둥근 돌을 사용하였고, 돌과 흙을 번갈아 쌓아 줄눈이 생긴 담장과 막쌓기 형식의 담장이 혼재되어 있다. 대체로 담 하부에는 큰 돌이, 상부로 갈수록 작은 돌과 중간 정도의 돌이 사용되었다. ‘S'자형으로 자연스럽게 굽어진 마을 안길은 고즈넉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으며 고가들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어 더욱 운치있다.

 

왕곡전통마을 -기와·초가 30여채 100년역사-

강원 고성군 죽왕면 오봉리. 해변에서 불과 1.3㎞. 다섯개의 봉우리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어 골이 깊다. 기와집 20여채와 초가집 30여채는 100년 된 고택들. 기와집은 모두 마루, 부엌, 외양간 등이 나란히 붙어있는 강원도 북부지방의 독특한 가옥구조를 보여준다.

88년 전국에서 제일 먼저 전통마을 보존지구로 지정됐고 최근 10여년의 복원사업을 마쳤다.

주변의 송지호는 맑은 물과 울창한 송림이 어우러진 강원 제일의 호수. 숙박시설도 잘 갖춰져 있다. 호수 건너편 송지호해수욕장에서도 동해바다를 즐길 수 있다.

속초에서 오봉리까지 버스가 다닌다. 문의 : 고성군 문화공보실(0392)680-3223

 

해미읍성 -나그네도 숙연한 천주교 성지-

충남 서산시 해미면. 왜구 침입에 대비해 조선 성종때 축성했다.

읍성 가운데 원형이 가장 잘 보존돼 있다. 성곽은 밖으로 석축을, 안으로는 흙을 입힌 것이 특징. 둘레 1,800m, 높이 5m의 돌성으로 동·남·서 3개의 문이 있다. 성밖 둘레에는 해자를 두고 성곽 밑에 탱자나무를 심어 적들이 성벽에 기어오르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탱자성으로도 불렸다.

선조 12년 이순신 장군이 이곳에서 병사를 훈련시키기도 했다. 해미읍성은 1866년 흥선대원군의 박해로 1,000여명의 순교자를 낳은 천주교 성지이기도 하다. 기념비와 회화나무 사형대가 남아 있다.

경부고속도로 천안IC를 빠져나와 아산~예산~삽교를 거쳐 덕산까지 간다. 덕산에서 국도 45호선을 타고 연장이고개를 넘으면 해미읍성이 나온다. 개심사와 서산마애삼존불 등이 가깝다. 문의 : 서산시 문화공보실(0455)660-3226

 

외암리민속마을 -마을 둘러싼 그림같은 돌담장-

충남 아산시 송악면. 400년전 예안이씨 이정 일가가 이주해 마을을 이뤘다. 마을 이름은 이정의 6세손이자 조선중기 성리학자로 이름높았던 이간의 호 외암에서 따왔다. 양반가옥 10여채와 옹기종기 들어선 초가들이 어울려 아늑한 느낌을 준다.

마을 전체를 둘러싼 5㎞의 돌담장은 낙안읍성과 함께 아름다운 돌담으로 꼽힌다. 디딜방아·연자방아 등 옛 생활도구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돌담으로 연결된 골목길, 연못과 정자 등이 고풍스런 맛을 더한다. 특히 영암군수댁은 괴목과 수석이 어우러진 정원이 눈길을 끈다. 추사 김정희 글씨 등 귀중한 문화유산들이 많이 보관돼 있다.

중요민속자료 제195호로 지정된 이참판댁은 충청도 양반집의 멋스러움과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연엽주로 잘 알려져 있다. 경부고속도로 천안IC에서 빠져 천안시내를 거쳐 아산에서 약 4.5㎞. 인근에 아산온천, 도고온천 등이 있다. 현충사·민속박물관도 가깝다. 문의 : 아산시 문화공보담당관실(0418)540-2541

 

청풍문화재단지 -충주호 위 한벽루 전망 일품-

충북 제천시 청풍면. 82년부터 3년에 걸쳐 충주댐 건설로 수몰위기에 놓인 43점의 문화재를 옮겨 문화재마을로 꾸몄다. 생활유물 1,600여점이 전시돼 있다.

 

 청풍82번지방도여행에서

 

충주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팔영루 등의 고풍스런 건물과 열녀비·공덕비 등 문화재들이 조화롭게 배치돼 있다.

수안보 온천욕, 충주호 드라이브를 즐기며 호젓하게 「청풍명월」의 정취를 맛볼 수 있다. 충주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한벽루 전망이 일품.

영동고속도로 만종분기점에서 중앙고속도로로 접어든 뒤 제천IC에서 빠져나와 597호 지방도를 타고 21㎞ 정도 달리면 청풍교. 멀리 문화재단지가 올려다보인다. 충주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타고 청풍나루에 이르면 걸어서 5분. 단양팔경도 둘러볼 만하다. 월악산국립공원도 가까이 있다. 문의 : 청풍문화재단지관리사무소(0443)647-7003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