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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드라이브 뚜벅이

지리산 둘레길 300km

by 구석구석 2008.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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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과 마을, 역사문화가 담긴 둘레길

 

지리산 둘레길은 남한에서 가장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지리산을 빙 둘러가는 길이다. 지리산 생태보전운동을 펼쳐온 ‘사단법인 숲길’에서 지리산의 마을과 마을을 잇던 옛길을 되살려 자연과 마을, 역사와 문화의 의미를 찾아보고자 2007년부터 만들고 있는 길이다. 다 이어지면 총 300여 km가 될 것이며 현재는 지리산 북쪽으로 약 70km가 만들어져 있다.

 

지리산 둘레 길은 올레 길과 여러 면에서 대비된다. 우선 올레 길만큼 화려하지 않다. 가슴이 확 터지는 오름의 조망도 없고 주상절리 기암절벽에 부서지는 흰 파도도 없다. 그냥 수더분하다. 우리 눈에 익숙한 산하의 모습이 차분하게 들어온다. 올레길이 빼어난 미모의 바닷가 처녀라면 둘레 길은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산골처녀라 할 수 있다. 시시각각 변하는 올레길의 풍광에 반한 사람들은 둘레 길이 별 매력이 없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둘레길의 매력은 마을과 마을을 잇는 자연스런 길에서 배어 나오는 편안함, 그리고 어릴 적 어머니 치맛자락처럼 포근한 산골 모습들이다.

 

마을길이 시냇가 둑길로 바뀌다 어느새 논길로, 이어서 고갯길과 산길로, 그러다 다시 오솔길로 바뀌는데 거슬림이 없다. 논둑길에선 풀벌레 소리를 듣다가 숲으로 들어서면 새소리를 듣고 계곡을 건너면서 계곡물 소리에 마음을 씻는다. 어느새 이삭이 팬 벼들이 바람에 일렁이는 모습, 동구 밖에 시원하게 그늘을 드리운 서어나무 숲과 정자들, 푸른 솔가지를 힘있게 뻗고 있는 당산나무의 위풍당당한 모습들이 정겹다. 눈에 번쩍 띄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화장기 없는 풋풋한 아름다움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래서인지 이 길을 손잡고 걷는 젊은 남녀의 미소가 예사롭지 않다. 어쩐지 이들은 결혼할 것 같다. 그렇다. 올레길 분위기는 화려한 처녀와 데이트하는 것 같다면 둘레 길은 부인과 오순도순 이야기하며 걷는 것 같다. 설레임은 없지만 정답다.


함양~산청~하동~구례~남원 100여개 마을 걸어서 

 

민족의 영산 지리산에 ‘길’이 열렸다.

국립공원 1호인 지리산 둘레 800리(300여 km)를 한 바퀴 도는 ‘지리산길’은 국내 첫 장거리 도보 트레일(trail)이다. 경남 함양 산청 하동군, 전남 구례군, 전북 남원시 등 3개 시도, 5개 시군 100여 개 마을을 잇는다.

지리산생명연대 부설 사단법인 ‘숲길’(이사장 도법 스님)이 지난해 4월 산림청 녹색자금을 지원받아 사업을 시작했다. 전체 예산은 100억 원.

지리산 일대의 각종 자원 조사와 정비를 병행해 옛길, 고갯길, 숲길, 강변길, 논둑길, 마을길을 둥글게 연결한다. 2011년 완공 예정.

전체 트레일 노선의 고도는 구례군 토지면이 50m로 가장 낮고 하동군 악양면 형제봉이 1100m로 제일 높다.

‘숲길’과 산림청은 지리산길 시범구간인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매동마을과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세동마을 구간 20.78km를 완공하고 최근 개통식을 가졌다. 이 길은 남원과 함양을 잇는 옛 고갯길인 등구재를 중심으로 지리산 주능선을 조망할 수 있고 주변에는 넓게 펼쳐진 다랑논과 11개의 산촌마을, 절 등이 있다.

숲길 측은 시범구간을 ‘다랭이길’(10.68km)과 ‘산사람길’(10.1km)로 나눴다. 다랭이길은 마을과 다랑논 사이를 걸어가도록 돼 있고, 산사람길은 빨치산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숲길이다.

숲길 기획팀 조회은 홍보담당은 “지리산길 사업은 새로운 개발이 아니라 기존의 가치를 다시 찾고, 우리 조상들이 걸었던 옛길을 조금씩 손질해 이용하는 형식”이라며 “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되살리는 데 시민단체와 지방자치단체, 주민이 함께 참여한 것도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도법 스님은 “지리산길은 도시와 농촌, 자연과 사람을 잇고 수직의 문화를 수평의 문화로, 빠름의 문화를 느림의 문화로 바꾸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숲길 측은 남원시 인월면 인월리에 ‘지리산길 안내센터’를 설치했으며 탐방객에게 지리산길의 의미와 내용, 이용 방법을 안내하고 길동무도 해준다.

산림청 관계자는 “지리산길은 한국형 트레일의 원형이자 지리산문화권에서 자연과 사람을 연결하는 생태벨트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안내센터 063-635-0850 

 

지리산 둘레길 걷기

 

지리산 둘레는 모두 800여 리(약 320km). 3개 도(전남 경남 전북), 5개 시군(구례 하동 산청 함양 남원), 16개 읍면, 100여 개 마을을 거친다. 숲길(43.8%) 농로(20.8%) 마을고샅길(19.9%) 임도(14%) 도로(1.4%) 논둑길 밭둑길 고갯길 강변길 걸어서 한 바퀴 도는 데 약 232시간(시속 1.3km) 걸린다. 하루 10km씩 가면 약 32.5일 걸리는 셈. 때론 낮은 곳(구례 토지·해발 50m)을 걷기도 하고, 때론 산꼭대기(하동 악양 형제봉·해발 1100m)도 올라야 한다.

 

하지만 아직 둘레 길이 모두 이어진 것은 아니다. 2008. 5월 1, 2구간 21km(전북 남원 산내면 매동마을∼경남 함양 휴천면 세동마을)가 겨우 첫선을 보였을 뿐이다. 지금까지 5개 구간(약 70km)이 만들어졌고, 2011년이 되면 300여km에 이르는 길이 완성되면서 지리산 둘레를 한 바퀴 걸을 수 있게 된다. 지리산이 자리 잡은 3개 도(전북 전남 경북), 5개 시·군(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 16개 읍면 80여개 마을이 하나로 이어지는 셈이다.

 

● 매동∼금계마을 ‘다랭이 길’ 쉬엄쉬엄 가도 5시간



1구간(전북 남원 매동마을∼경남 함양 금계마을, 약 10.68km)은 ‘외갓집 가는 길’이다. 산비탈 계단식 다랑이 논이 반 하늘에 걸려 있다. 이곳 사람들은 “다랭이 논”이라고 말한다. 둘레 길을 잇고 있는 ‘사단법인 숲길’에선 아예 ‘다랭이 길’로 이름을 붙였다. 느릿느릿 나무늘보처럼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숲길 논둑 밭둑길 농로가 대부분이다. 5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 금계마을 입구에 내걸린 물레방아 다리

길가엔 조 수수 콩 깨 등 온갖 곡식이 익고 있다. 숲길 가엔 도라지 꽃, 며느리밥풀 꽃, 물봉선 꽃, 칡꽃, 구절초 꽃, 용담 꽃 천지다. 물까치, 박새, 딱새도 뭐가 그리 바쁜지 끊임없이 수선댄다. 저 멀리 지리산 반야봉, 형제봉, 제석봉, 천왕봉, 상봉이 늙은 소처럼 웅크린 채 그윽이 내려다보고 있다.

다랑이 논은 상황마을부터 시작된다. 키 작은 산 나락이 노랗게 물들었다. 일하는 늙은 농부의 구부정한 등을 보니 마음이 짠하다. 저 많은 곡식과 과실을 언제 다 거둘까?

▲ 창원마을 다랑이논길을 걷고 있는 지리산길 방문객들.

등구재(·해발 700m·매동마을에서 5.5km)는 남원 상황마을과 경남 창원마을을 잇는 고갯길이다. 두 마을 사이 가마 타고 시집갔던 길이다. 거북 등을 닮아 그렇게 불렀다. 창원마을 사람들이 남원 인월장을 본 뒤 다시 등구재에 다다를 즈음, 서쪽 지리산 만복대엔 노을이 붉게 타오른다. 때마침 동쪽 법화산 마루엔 둥근 달이 두둥실 떠오른다. 바로 이 고갯길에서 붉은 노을과 눈부신 달빛이 황홀하게 어우러지는 것이다.

창원마을 동구 마루엔 500살 먹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길손을 반긴다. 참 곱게도 늙었다. 느티나무 아래서 배낭을 베개 삼아 한숨 늘어지게 자고 있으면, 산들바람이 솔솔 얼굴을 간질인다. 이 세상 그 어느 부자 안 부럽다.


2구간(경남 함양 마천 의중마을∼휴천 세동마을, 10.11km)은 ‘산사람 길’이다. 빨치산들이 다녔던 길이다. 부근엔 국군과 경찰의 공비토벌 길도 있다. 시누대숲이 훌쩍 크다. 그만큼 만만치 않다. 5시간 정도는 잡아야 한다. 벽송사(해발 600m) 올라가는 길은 그렇다 해도, 그 위 해발 900m 지점(매동마을에서 15.7km)까지 오를 때는 숨이 벅차다. 북한산성 입구에서 의상능선을 지나 대남문∼대성문∼대동문∼우이동 계곡으로 빠지는 코스 정도로 보면 된다.

 

  ▲ 1. 빨치산 루트 초입엔 대나무숲 길이 있다. 2. 세동마을 진입 전 임도엔 벚꽃 가로수가 활짝 피어 있다. 3. 지리산길은 때로는 긴 임도를 따라 걸어야 한다.


사단법인 숲길의 조사원 박무열(40) 씨는 “진짜 빨치산 길은 벽송사 뒤쪽 너머로 한참 더 들어가야 한다. 이 길은 그 들머리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여성 빨치산으로 유명한 정순덕(1933∼2004)이 한때 숨어 살았던 선녀굴은 3∼4km 더 안쪽에 있다”고 말했다.

벽송사는 6·25전쟁 때 빨치산 야전병원으로 쓰였던 절. 일제강점기 초기에 만든 2개의 나무 장승이 너무 늙어 비각 속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사람이나 장승이나 100년 살기 힘들다. 퉁방울눈에 각지고 울퉁불퉁한 얼굴이 보면 볼수록 익살스럽다.

송대∼세동마을 길은 임도 코스다. 터덜터덜 내리막이 가팔라 영 길 맛이 안 난다. 중간 송전마을에 있는 400년 소나무 바위정자가 그래도 마음을 달래준다. 발 아래 엄천강과 용유담이 한눈에 보인다.

 

● 소박한 인정-투박한 웅장함에 발걸음 가뿐

소설 ‘소서노’ ‘대조영’의 작가 이기담(44) 씨는 “난생 처음 지리산에 와봤다. 지리산 속에 깊이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보다 그냥 산봉우리를 쭉 보면서 걷는 게 너무 좋았다. 걷는 동안 내내 지리산의 투박한 웅장함이 몸에 젖어오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경기 성남의 박병직(70) 씨는 “만보계를 보니 딱 3만65600걸음 걸었다. 평상시 산행에선 많아야 1만5000걸음이었는데 두 배가 넘었다. 하지만 주위 경관이 좋아서 그런지 용케 끝까지 해냈다. 기분이 뿌듯하고 좋다. 얼마 전부터 승용차를 없애버리고,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있는데 그 효과를 보는 것 같다”며 웃었다.

▲ (왼쪽)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길게 뻗은 지리산길이다. (오른쪽) 서암정사에 들어서면 커다란 목련이 방문객을 반긴다.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모임(http://cafe.daum.net/sankang)의 고혜경(47) 씨는 “출발 지점인 매동마을에서 민박을 했는데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정말 소박하고 인정이 많으셔서 가슴이 뭉클했다. 직접 지어주신 음식들도 정말 맛있었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만 같았던 금싸라기 같은 밤하늘의 별들, 반짝거리며 날아다니는 반딧불이도 숨이 막혔다. 다만 2구간이 생각보다 많이 가파르고 단조로워 힘들었다”고 말했다.

지리산자락 마을엔 곳곳에 부처와 보살들이 살고 있다. 칠순 넘은 노인들이 늙은 느티나무처럼 살고 있다. 자식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두 빠져나가고 누렁이와 백구만 남았다. 할머니들은 노고단 산신할미처럼 길손들에게 자꾸만 뭘 주지 못해 애가 탄다. 목마르다며 텃밭에서 오이도 뚝 따서 주고, 수박도 쩍 잘라 나눠준다. 느티나무 한 그루의 나뭇잎은 무려 10만여 장. 할머니들의 사랑은 그보다 더 무성하다.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물 같다.

/ 동아닷컴 2008.9 김화성 스포츠전문기자

지리산길은 정부와 민간단체 협력에 의해 걷기를 목적으로 처음 시도된 길이다. '첫술에 배부를 정도'라는 반응을 얻을 정도로 갈수록 여행객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옛길을 최대한 원형으로 복원하고 보행자 안전을 도모하며, 수려한 경관과 역사 문화자원이 잘 보존된 지역을 우선 연결한다는 원칙에 의해 옛길이 하나둘 갈고 다듬어지고 있다.

 

하지만 옛길 개방이 아직은 걸음마단계여서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는 많은 편이다. 우선 도로개설 구간 대부분이 사유지여서 농작물 피해, 사유지 통과 문제 등으로 인한 민원이 다소 발생하고 있다. 일부 마을에서는 공동 수익사업 성격의 농산물 판매에 약삭빠른 주민이 끼어드는 바람에 평화롭던 마을공동체 내에서 잡음이 일기도 한다. 

 

환경 보전과 여행객 편의 문제도 주요 과제의 하나. 지리산길에는 화장실과 쉼터, 식당, 숙박시설 등 편의시설이 거의 없어 여행객들에게는 다소 불편을 겪을 수 있다. 일부 마을에 나무로 만든 벤치가 설치되고 마을공동으로 주먹밥을 판매하며, 마을이장 등 주민들이 민박을 운영하는 게 전부다. 

 

(사)숲길측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도보여행에 나서는 여행객들은 가급적 숙식 등 편의시설 문제를 사전에 해결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고요하던 산골 마을에 사람이 많이 찾는 것은 주민들로서는 반가운 일이지만, 일부 여행객들이 관광버스를 동원해 요란한 차림으로 걷기에 나서 위화감을 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지리산길이 민관 협력체제로 운영되면서 일부 사안을 놓고 엇박자가 빚어지기도 한다. 행정 차원에서는 당장의 관광객 유치와 농산물 판매 증대 등에 관심이 높지만, 민간단체측은 관광객과 마을주민의 공동이익 창출방안에 골몰하고 있다.   

 

또한 영· 호남에 걸터앉은 지리산길에는 숱한 전설과 사연, 비화 등이 간직돼 있지만, 민간단체로서는 도로정비 인력도 부족한 상태에서 스토리텔링 개발은 뒷전일 수밖에 없다. "숲길 취지에 맞게 행정은 예산지원, 민간은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 등 역할분담이 필요합니다. 걷기열풍에서 다소 비껴나, 걷기문화 정착을 위한 사후 관리노력이 중요합니다" 지속가능한 도보여행을 꿈꾸는 (사)숲길 관계자의 말이다.

 

하동호에서 덕천서원까지 22km

 

 

이미 개통된 산청군 수철리~남원시 주천면 구간 40km는 여전히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다. 나머지 구간이 내년 하반기쯤 동시 개통될 예정이다 보니 이 구간에 너무 집중되기 때문이다. 주말이면 수백 명씩 몰리는 바람에 마을회관이나 민박집 등은 문전성시를 이루는 반면 노선과 화장실 등의 문제로 현지 주민들의 민원이 발생하기도 한다. 홀로 혹은 삼삼오오 걷는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널리 알려지는 만큼 관광버스를 타고 단체로 오는 이들도 있다 보니 이런 문제가 불거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문제는 여전히 ‘왜, 어떻게 걷는가’가 아닐 수 없다. 백두대간이나 지리산 종주 또한 떼거리 산행으로 몸살을 앓았듯이 지리산 둘레길 또한 이러한 딜레마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고민할 때가 왔다. 단순히 건강이나 관광이 목적이라면 굳이 지리산 둘레길을 찾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전국 곳곳에 봇물처럼 숲길 조성 등의 사업이 진행 중이니 이런 바람은 점차 분산되면서 나아지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왜 걷는가’에 대한 질문은 끝까지 지속될 수밖에 없다.

21세기적 패러다임의 변화인가, 일시적인 ‘냄비근성’ 같은 유행인가. 지리산에서만큼은 보다 분명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지리산 둘레길은 ‘성찰과 순례의 길’로 그 이미지를 굳히기로 중지를 모으고 있다.

때마침 12월 1일부터 실상사의 도법 스님을 비롯한 7명의 스님이 선방의 동안거(겨울수행) 대신 ‘움직이는 선원’이라는 이름으로 지리산 둘레길을 도보순례하고 있다. 이는 지리산의 환경 파괴를 막는 동시에 ‘지리산 성지화’를 위한 불교계의 첫 사업으로 시작한 것이다. 100일 동안 지리산을 세 바퀴 정도 도보순례할 예정이다.

 

▲ 궁항리에서 위태리로 가는 마을 뒷산의 대나무 숲길/월간산

하동군의 청암면 중이리 하동호에서 산청군 시천면 덕천서원까지의 지리산 둘레길 22km는 내내 오지마을을 지나는 더없이 고즈넉한 산길이다. 하동호에서 양이터재를 넘으면 옥종면 궁항리 양이터 후곡(뒷골)마을과 위태리 안마을·진등마을이 나오고, 다시 산길을 올라 군 경계를 넘어서면 산청군 시천면 중태리의 유점골 등을 지나 덕천강을 만나게 된다.

임도나 마을 뒷산을 오르락내리락 몇 번 답사하는 동안 구절초 꽃은 철없는 아이처럼 영하의 날씨 속에서도 환하게 피어 끝끝내 질 줄을 모르고, 감나무에는 붉디붉은 홍시가 나뭇가지에 바짝 언 채 매달려 있었다. 그러다 문득 늘 푸른 대나무며 소나무에 흰 눈이 펑펑 내리기도 했다.

사실 하동군 악양면에서 산청군 시천면까지 이어지는 비포장 임도는 오프로드 모터사이클 마니아들의 천국이었다. 나 또한 꽃 피는 봄날과 함박눈 내리는 겨울을 가리지 않고 이 산길을 뻔질나게 다녔다. 전국의 마니아들이 놀러오면 나는 줄곧 이 길을 추천하며 비가 오든 눈이 오든 길잡이를 하기도 했다. 하루 종일 달려도 사람을 잘 만날 수 없는 데다 심하게 험한 길이 아니다 보니 초보자들과도 어울릴 수 있었다. 폭우 등의 악천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두 낙원에 온 듯 무척 감격하던 바로 그 산길이다.

그러나 이제는 더 많은 걷기 여행자들이나 순례자들에게 이 산길을 내어줄 때가 온 것이다. 나 홀로 이 비밀의 문 혹은 아지트 같은 산길의 품에 안겨 몇 년간 행복했지만, 이제는 진정으로 걸어가는 이들을 위해 바이크 마니아로서의 이 오프로드는 스스로 폐쇄할 수밖에 없다. 솔직히 많이 아쉽기는 하다. 그러나 마침내 자연 그대로의 지수화풍이 인간과 더불어 동행하는 지리산 둘레길로 거듭나게 되었으니 여한이 없다.

 

마을 지형이 활처럼 생겼다 해서 궁항

하동호 제방길을 건너자마자 왼쪽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주변 풍광을 감상하며 30분 정도 걷다 보면 오른쪽 임도길이 나온다. 이 임도가 바로 양이터재로 오르는 길이다. 처음엔 조금 가파른 콘크리트 포장길이지만 서서히 완만한 비포장길이 이어진다. 넉넉잡아 한 시간이면 오를 수 있다.

▲ 옥종면 궁항리 양이터마을의 대나무 숲속의 낡은 집 / 월간산

양이터재는 면 경계이자 낙남정맥의 마루금인데, 옥종면 궁항리 양이터마을 위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궁항리는 주산 기슭에 터를 잡고 있다. 마을 지형이 활처럼 생겼다 하여 활미기 또는 궁항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하며, 양이터마을의 유래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혹은 동학농민전쟁 때 양씨와 이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피신하여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양이터재에서 내리막길로 접어들면 어느새 이 마을이 나오는데, 얼핏 보아도 피란처다운 오지마을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대나무 숲 속에 숨어 있는 낡은 집 하나는 언젠가는 오래도록 더 깊이 은거하고픈 욕망을 불러일으키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마당 입구의 감나무며 대나무 숲이 햇빛을 가려 늘 청명하지는 않겠지만, 그 어디에서 보아도 이 집을 도저히 찾아낼 수 없을 정도인 데다 위성사진에도 잘 잡히지 않는 ‘생애 한 철 숨어살기 딱 좋은 집’이었다.

이 마을 아래 궁항리의 1014 지방도를 건너면 후곡이다. 우리말로 뒷골마을이다. 이 마을에서 걸어서만 갈 수 있는 소롯길을 따라 4km쯤 가면 위태리 안마을과 진동마을이 나온다. (사)숲길이 노선을 정하고 풀을 베는 등 표시를 해놓았는데, 아마도 지리산 둘레길 중에서 또 하나의 백미가 될 것이다. 오지마을을 잇는 옛길과 산길의 정취가 물씬 묻어나기 때문이다.

 

다시 눈길을 헤쳐 가면 위태리 진등마을에서 59번 국도의 포장도로가 끊어지는데, 이 길의 비포장 임도를 따라 오르면 갈치재가 나온다. 그런데 지리산 둘레길은 이 길로 오르지 않고, 국도를 건너 마을길과 작은 계곡 쪽의 논밭길을 지나 30분 정도 등산로 같은 산길을 올라야 한다.

마침내 등성이에 오르면 여기서부터 산청군 시천면 중태리다. 하동군 옥종면이었던 중태리가 산청군 시천면으로 편입된 것은 1983년부터였다고 한다. 여기서부터 덕천강까지 장장 5.8km에 이르는 내리막길이다. 유점골과 불당골을 지나 중태리 아래의 덕천강을 만나면 왼쪽으로 2.5km 정도 강 건너 시천면 소재지를 바라보며 거슬러 올라야 한다. 덕산중고교 앞 다리를 건너면 세심정과 덕천서원이 있다.

/ 월간산 2010.1월 이규원시인

 

 신흥삼거리~형제봉~평사리 최참판댁 26.5km는 수류화개의 별천지

 

 

 예로부터 ‘신선이 머물 만한 별천지’를 동천(洞天)이라 했다. 청학동 전설이 곳곳에 서려 있는 하동군의 화개동천과 악양동천이 바로 사계절 내내 물이 흐르고 꽃이 피는 수류화개(水流花開) 별천지의 고장이다.

 

‘쌍계청학 실상백학’이라 했으니 쌍계사 근처에 푸른 학이 내려앉은 청학동이 있고, 실상사 근처에 흰 학이 내려앉은 백학동이 있다고 했다. 특히 하동군 화개면과 악양면 등은 지리산 자락이 남으로 뻗어내려 감싸고 있는 무릉도원이 아닐 수 없다.

 

범왕리 신흥삼거리에서 의신 쪽은 대성골과 빨치산 총수 이현상이 비운의 생을 마감한 빗점골, 그리고 ‘지리산 달빛’의 대명사인 벽소령이 있으며, 쌍계사와 화개장터 쪽으로는 ‘벚꽃 십리길’이 더욱 무성해져 화개천을 따라 섬진강까지 20리 벚꽃 터널이 주욱 이어져 있다.

 

신흥삼거리에서 맑디맑은 화개천 주변의 야생 차밭을 눈이 시리도록 바라보며 터덜터덜 벚꽃나무 짙은 그늘 속 포장도로를 따라 40분 정도 내려오다 보면 왼쪽으로 국사암 방향의 용운교가 나온다. 다리 건너 작은 삼거리에서 쌍계초등학교 방향으로 샛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15분쯤 가면 커다란 굴참나무 그늘 아래를 지나 쌍계초등학교가 나오는데 정문에서 오른쪽 길로 내려가면 작은 다리 건너 쌍계사 매표소가 보인다.

 

국사암에서 불일폭포로 가는 소나무 숲길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오솔길이다. 이곳에서 화개천 건너 용강마을을 바라보면 산중 외딴집에 여성 산악인 남난희씨의 집이 얼핏 보인다.

 

쌍계사 매표소에서 오른쪽 계곡 쪽의 샛길로 내려오면 누구의 글씨인지는 확실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석문(石門)’과 쌍계사라는 소박하면서도 서툰 듯한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양 옆에 서 있다. 이 때문에 마을 이름 또한 운수리 석문마을이다. 석문을 지나 식당가를 조금 내려오면 ‘백운장’과 ‘단야식당’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계단 위 정원이 참으로 아름다운 집이 있다.

▲ 형제봉 활공장에서 형제봉으로 오르는 등산로.

산녹차 아랫방 구들장에 앉아 차 한 잔 얻어 마시고 가던 길을 재촉하면 신촌마을이 나온다. 이곳에서 왼쪽 도심촌으로 오르면 형제봉 활공장으로 이어지는 계곡 옆 임도가 나온다. 정금리 도심다원 차밭 꼭대기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차나무가 있는데, 정확한 수령은 알 수 없으나 알려진 것보다는 그리 오래돼 보이지 않는다.

도심촌에서 임도를 따라 오르는 길은 초입에 가파른 콘크리트 포장길인데 두어 시간 정도는 조금 고생할 각오를 해야 한다. 하지만 길 옆에는 맑은 계곡물이 흐르니 자주 쉬어가며 탁족하는 등 땀을 식히기에 안성맞춤이다.

비포장 임도를 만나면서부터는 경사도가 완만해지면서 전망이 확 트이기 시작한다. 화개동천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멀리 노고단·반야봉 등 지리산 주능선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신촌마을에서 형제봉 활공장까지 12.5km 정도의 오르막길이니 만만치 않은 거리의 장거리 임도다.

/ 월간산2009 글·사진 이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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