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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상남도

의령 의령전통시장 종로식당 망개떡 충익사

by 구석구석 2008.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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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 소고기국밥의 대명사 군청앞 종로식당 055-573-2785

“야, 이 빌어먹을 놈들아! 느그놈들한테 내 국밥 안팔끼다. 얼른 썩 물러 나거라.”
할머니는 면전의 젊은이들에게 호통을 쳤다. 단정한 넥타이 차림의 젊은이들은 대통령을 수행해 온 검식관(檢食官)들과 경호원들이었다. 1978년 12월22일 고 박정희 대통령은 의령읍내 중동리에서 거행된 곽재우장군 유적정화 기념비제막식에 참석했다. 

이 날 한 끼 식사를 읍내 시장 안에 있는 종로식당에서 하게 되었고, 며칠 전부터 청와대 관계자들이 이 식당을 찾아왔다. 이것 저것 온갖 귀찮은 주문을 하고 주변을 감시했다. 막상 식사를 장만하는 싯점에서는 할머니의 고유영역인 음식장만에까지 간섭했다. 이에 평소 욕쟁이로 소문이 자자했던 할머니가 화가 나셨던 것이다.

할머니의 호통에 수행원들이 숨을 죽였다. 10여 년 전 대통령각하께서 전북도정 시찰을 갔다가 이른 아침 어느 콩나물해장국집 할머니로부터 봉변(?)을 당했던 일을 수행원들은 소상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터다. 박 대통령은 수행원들과 식탁에 앉아 전주콩나물국밥과 모주 한 잔을 받았는데 할머니는 “워매! 이놈 봐라. 네놈은 어쩜 영락없이 박정희를 닮았네. 그런 의미에서 이 달걀이나 하나 더 쳐 먹어라!”

할머니는 아무런 탈 없이 같은 장소에서 영업을 계속했고, 오히려 여러 연관행정관서로부터 더 많은 지원과 보호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참 멋진 실화다. 젊은 수행원들은 할머니의 비위를 더 이상 거스르면 큰일이라도 나겠다는 판단을 내리고 숨을 죽이고 고분고분해졌을 것이다.

종로식당 창업주 이봉순(1915년생·작고) 할머니는 한국전쟁 휴전 직후인 1954년부터 쇠고기국밥 장사를 시작했다. 처음은 5일마다 서는 장날에 시장에다 전(廛)을 펴고 쇠고기국에다 밥을 말아 팔았는데, 소문이 꼬리를 물어 의령 5일장(3일, 8일)의 명소가 되었다고 한다. 이 국밥을 먹기 위해 마산 진주를 위시해 인근 군에서도 찾아왔을 정도라니 그 명성은 알만 하겠다.

욕쟁이 할머니의 욕은 욕이 아니라 손님들은 덕담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는데, 손님들에게는 1인당 소주 한 병 이상은 팔지 않았다고 한다. 더 이상 주문했다가는 “빌어먹을 놈! 술은 술집에 가서 쳐먹어라”는 욕바가지를 쓰게 된다는 것이다.

종로식당은 식탁이 펼쳐져 있는 열린 공간에 큰 가마솥을 걸어 놓았다. 손님 누구라도 국 끓이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최상급 고기로 먼저 수육을 삶아낸다. 그 육수로 쇠고기국을 끓여내니 탁한 맛이 없다고 한다. 본체 70명, 별체(단체손님) 90명이 동시에 이용할 수 있는 규모다. 월간산 462호 2008.4

 

■ 의령전통시장

 

의령소바 다시식당

망개떡은 전국 어느 곳에서도 먹을 수 없는 의령만의 음식이다.
망개떡은 팥을 충분히 끓여서 진하게 달인 팥소를 자굴산 골짝에서 생산된 멥쌀로 빚은 떡에 넣어서 만든 것으로, 갈매나무과의 낙엽교목인 망개나무 잎으로 감싸서 내놓는다. 망개떡 특유의 쫄깃쫄깃한 맛과 상큼한 망개 잎 향기는 남녀노소 모두의 구미를 돋구는데, 의령의 나이 드신 분들의 추억 속에는 아직도 한겨울밤의 "찹쌀~떡! 망개~떡!"하고 외치며 집앞을 지나가던 소리를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망개떡이 지금은 의령의 명품이 되어 의령땅을 밟는 외지사람들이 즐겨찾는 떡이 되었고, 의령군에서는 망개떡이 가장 한국적인 식품으로 그 명성에 걸맞는 의령의 특화식품으로 육성해 나가겠는 방침을 세워 놓았다.

읍내 재래시장 안에 있는 ‘남산떡방앗간(055-573-2422)’이 원조제조원인데, 인근에 있는 ‘낙원떡집(055-574-7979)’ 등 군내에서는 지금 4개 업소가 망개떡을 만들고 있다.

칡한우전문점 경복궁 / 055-573-8000
 의령사람들의 칡한우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사육부터 다르다는 의령 칡한우는 우량소만을 골라 자굴산 주위에 흔하게 자생하는 칡과 산야초를 섞어 만든 특수 사료를 먹여 키운다. 소가 자라면서 여느 소들과는 달리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만큼 세계농업기술상을 받은 경력을 가졌고, 전국 우수축산물 브랜드전에 참가하고, 경남 한우 고급육 경진대회에서 최우수 한우로 선정되기도 했다.

군내 30여 농가에서 약 2,000두를 사육하고 있는 칡한우는 숫송아지를 생후 5~6개월에 거세하여 단계별 사양관리기준을 지켜 생산한 1등급 쇠고기로 특허청에 상표등록(제0483461호)을 한 크게 믿음이 가는 고급육이다.

 의령 칡한우 전문 식육식당 ‘경복궁’은 의령군이 유일하게 지정한 전문업소로 언론매체를 통해 세상에 크게 알려져 있는데, 경복궁에서는 축협에 의뢰, 1등급 이상의 고급육만 공급받는다고 한다.

육질이 단단하고 단백하며 고소한 맛을 내는 생등심과 갈비살(각 150g 14,000원), 그리고 육회(20,000원)는 이 업소에서만 제대로 먹을 수 있기에 업소에서 지척의 거리에 있는 충익사(忠翼祠)를 참배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서동리 의령구름다리

화려한 조명을 입은 구름다리가 캄캄한 밤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다. 마치 다리에 작은 별들이 무수히 걸려 있는 것 같았다. 해가 뜰 무렵 구름다리 주탑에서 남강의 정암진 솥바위 쪽을 바라보고 간절히 빌면 부자가 된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안내판에 적혀 있다.

 

충익사

사람들은 의령을 일컬어 충의의 고장 또는 충절의 고장이라 부른다. 임진왜란 시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 불렸던 망우당 곽재우가 태어난 곳인 데다가 당시, 전국 최초로 의병들의 봉기에 불씨를 붙여 왜적을 막아내고 나라를 구한 인물의 고장이라는 의미에서 의령을 그렇게 부른다.

선조 25년(1592년) 4월, 섬나라 왜군이 조선을 침략하자 곽재우는 임란 발발일로부터 아홉째 되는 날 전국에서 처음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왜놈과 맞서 싸운다.

왜군이 조선을 침략해 오자 평민들 위에 군림하던, 소위 양반이라고 행세한 사대부 기득권 세력들은 임금과 나라를 버리고 도망치고 만다. 이 때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세력은 국록을 먹던 조정의 신하와 관군이나 지배계층이 아닌 그저 땅을 갈고 열심히 조세를 바치던 평범한 백성이었던 것이다. 그 선봉에 홍의장군이 있었고, 지금까지 의령을 상징하는 인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의령천 다리를 건너니 정면으로 보이는 탑 중간에 열여덟 개의 둥근 고리를 한 의병탑이 읍내를 내려다보며 침묵한 채 서 있다. 이 열여덟 개의 둥근 고리는 곽재우 장군과 장수 17명의 혼을 기린다는 뜻이다. 충익사의 정문인 충의문을 들어서니 공원보다 더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마당에 겨울 오후의 햇살이 내려앉아 조용히 쉬고 있다.

충익사의 모과나무(경상남도 기념물 제83호)는 높이 12m이고, 수령이 약 280년 된 것으로 지금까지 조사된 모과나무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목백일홍이라고도 불리는 배롱나무는 수관이 옆으로 퍼져 절이나 연못가에 심으면 운치가 더욱 살아나는 나무로 충익사 내에 있는 작은 연못과도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의병장들의 시호가 새겨진 명판을 보관하고 있는 충의각, 화려한 단청이 아름다우며, 건물의 지붕만 들어낸다면 옛 전통 상여의 모습 그대로다. 이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의 의도를 잘 읽을 수 있을 것만 같다. 홍의장군 이름을 딴 솟을대문의 홍의문을 들어서면 야트막한 산기슭에 곽재우 장군을 비롯한 열일곱 명의 의병장과 의병 용사들의 위패를 모신 충익사당이 있다.

◁홍의문과 충익사

기념관에는 망우당의 전투 장면을 그린 다섯 폭의 그림과 말안장 장검 화살촉 등이 보물 제671호로 보존되고 있으며, 학생들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근심을 잊는다는 망우당, 곽재우의 호다. 망우당은 아버지 정암 곽월과 어머니 진양 강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나 영남 유학의 최고봉인 퇴계와 쌍벽을 이루는 남명 조식의 제자가 돼 학문에 심취하여 남명의 외손녀 상산 김씨와 혼인하게 된다.

도학에 빠진 망우당은 자굴산 중턱에 위치한 백련암에서 일천여 권의 책을 읽으며 은둔을 원한다. 그러나 국란은 그를 전장터로 내 보내고 만다.

곽재우는 붉은 색의 옷을 입고 대외적으로 자신의 강한 존재를 나타낸다. 붉은 색은 적을 흥분시켜 이성을 마비시키고 유인하는데 적격인 셈. 이름 그대로 홍의장군이 입었던 붉은 비단 옷은 27세 때 부친을 따라 명나라로 갔을 때 조정으로부터 받았던 것으로 붉은 색은 나라를 위한 일편단심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강하다.

ⓒ 2008 OhmyNews 정도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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