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하리 510 영탑사 041-356-3204
영탑사는 상왕산(210m) 동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라 말엽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후 고려 충렬왕 때 보조국사가 중건했다고 전한다. 본전에는 보물 제 409호인 금동삼존불상이 있고 절 주위에는 거대한 괴목이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칠층석탑은 자연 암석 위에 쌓아 올린 독특한 것이다.
영탑사 범종에는 1760년 2월 가야사 법당 금종을 백근의 금을 녹여 만든다 (乾隆25年 庚辰2月 伽倻寺法堂金鍾百斤金入重造成也)는 기록이 있고 덕산ㆍ홍주ㆍ면천의 시주한 신도들의 이름이 있다. 가야사는 흥선대원군이 아버지 남연군 이구의 묘를 쓰기 위해 불태운 절이다. 어떻게 해서 그 절의 금종이 이 곳으로 오게 되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의 말사이다. 통일신라 말기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며,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이 지금의 대방(大房) 앞에 오층석탑을 세우고 영탑사라 했다고 한다. 그뒤 무학 자초가 지금의 법당 자리에 있던 천연 암석에 불상을 조각하고 절을 중건했으며 대방 앞 정원에 있던 오층석탑을 법당 뒤의 바위 위로 옮겼다.
1760년(영조 36)에 편찬한 《여지도서》에 "영탑사는 군의 서쪽 5리에 있다"라는 기록이 보임에 따라 조선 후기 절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1798년에는 연암당 지윤이 유리광전을 중수하였다. 1911년 신도들이 중수하고 1988년 대웅전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유리광전, 산신각, 요사채가 있다.
대적광전이라고도 부르는 대웅전 안에는 약사여래상(충남유형문화재 111)과 지장보살상 및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소형 범종이 있다. 이밖에 고려 중엽에 조성된 금동삼존불(보물 409)이 있었는데 지금은 도난 방지를 위해 면천면 지서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삼존불은 높이 51cm로 연꽃에서 출현한 삼존불이 나란히 연화대좌 위에 좌정하고 있는 특이한 양식을 지니고 있다.
유리광전 안에는 마애불과 1994년에 조성한 칠성탱화와 제석천룡도가 봉안되어 있다. 마애불은 높이가 1.8m이며, 결가부좌한 형태로 얼굴이 몸체에 비해 크게 조성되어 비례감이 다소 떨어지는 고려 중엽 이후의 불상 양식을 보인다.
전설에 따르면, 고려 말에 자초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던 중 갑자기 기암괴석이 나타나, 그 상서로움을 신성하게 여겨 국태민안을 기원하며 불상을 조성했다고 한다. 전각에 걸려 있는 편액은 8살짜리 어린아이의 글씨로, 1835년(헌종 1)에 면천면 대치리에 사는 이씨 부인이 마애불에 백일기도를 올린 후 낳은 아들이 썼다고 한다.
유리광전의 뒤쪽 암벽 위에는 칠층석탑(충남문화재자료 216) 1기가 있다. 지대석을 따로 마련하지 않고 자연 암반 위에 조성하면서 탑신과 옥개석은 각각 별도의 석재를 썼는데, 지눌이 조성했을 당시에는 오층탑이었으나, 1911년 중수 때 2층을 더 올려 7층으로 했다고 한다.
삼웅리 수미마을 041-356-4369 www.enadri.com
수미산 웅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로서 상웅리, 중웅리, 하웅리 일부와 대조리 일부를 통합하여 구성되어 있다. 충남 제일의 장수마을로 알려져 있으며, 당진군의 새마을 사업 최우수 마을로 지정되었으며, 마을 유래를 보면 원래 수웅리로 불리어 지다가 수미 또는 순매동네로 불리워지기도 했는데, 수컷웅의 수자와 뫼산을 의미하는 뫼로 따서 순매를 불리워지다가 삼웅리로 바꾸어 불러지고 있다. 마을 이하와 주민들은 협동심이 강하여 그린투어리즘 가꾸기 사업에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 봄 - 채소 모종심기 , 고추심기 , 미나리 심기
* 여름 - 물고기 잡기 , 버섯따기 , 채소가꾸기
* 가을 - 벼수확 , 고추수확
* 겨울 - 군불지피기 및 고구마 , 밤 구워먹기 , 얼음지치기 , 팽이치기 , 농악배우기
* 연중 - 느타리 버섯 가꾸기 및 채취
마을회관(041-356-3239)에 3개의 객실이 있고 농가에서 민박이 가능하다. 3~5만원
면천읍성
당진군은 서산, 태안 등과 더불어 옛부터 중국으로 통하는 중요한 바닷길이 있었던 곳이다. 이처럼 중국과의 통상에 중요한 통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국방상의 중요한 거점이기도 했다. 면천읍성은 고려시대 충렬왕 16년(1290)에 세워졌다고 하나 실은 백제 초기부터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면천읍성은 동, 서, 남, 북의 사대문까지 갖춘 성이었다. 조선 태종13년에 다시 쌓았으며 경종 때 중수되었다. 면천에 읍성이 있었던 것은 이곳이 1914년까지 당진에 버금가는 주요 군소재지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버스정류장 앞에서 면천시장 남쪽입구 부근까지만 돌성으로 약간 남아있고 나머지 부분은 토성 형태로 남아있다. 성벽은 자연석을 잘 다듬어 쌓았는데, 외부는 석축이고 내부는 돌을 채운후 흙으로 엎어 쌓았다. 현 성벽의 둘레는 1,336m인데 성을 쌓을 당시의 치성(稚城)과 옹성(甕城)의 길이를 합한 전체 길이는 1,564m정도로 추정된다. 현재 옹성 1개소, 문터 4개소가 확인되었으나 원래 치성은 7개소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벽의 바깥 면에 옥천(玉川), 진잠(鎭岑), 석성(石城)등 충청도 관내의 군현 명칭이 새겨진 석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읍성을 쌓는데 다른 지방의 사람들이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면천읍성은 조선시대 초기에 성을 쌓는 규정이 가장 잘 반영된 우수한 평지성의 전형적인 형태로, 해안에 위치하고 있는 읍성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해방무렵까지만 해도 많은 성돌이 남아 있었는데 순원저수지를 만들 때 성돌을 빼어다 저수지 둑을 쌓는데 썼다고 한다. 그나마 남아 있는 것도 성터의 일부분은 개인 소유로 되어있어 나날이 허물리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 없다.
■ 면천읍성 성안마을
면천면 성상리 일대는 ‘성안마을’로 불린다. 당진면천읍성(충남기념물 91호) 안에 터 잡은 마을이기 때문이다.
순천 낙안읍성(사적 302호)과 청주 상당산성(사적 212호) 마을이 우리나라 대표 성안마을로 꼽히는데, 당진면천읍성 성안마을은 분위기가 다르다. 성안엔 상당산성처럼 번듯한 식당도, 낙안읍성처럼 예스러운 초가도 없다. 대신 손때 묻은 집과 소박한 식당, 이발소, 전파상 등이 골목골목을 채운다. 시곗바늘을 반세기 정도 거꾸로 돌린 듯한 풍경은 무뚝뚝한 충청도 사내처럼 속 깊은 정이 느껴진다.
옛 면천우체국을 리모델링한 ‘면천읍성안 그 미술관’과 동네 책방 ‘오래된 미래’, 책방과 나란히 자리한 ‘진달래상회’는 이곳을 감성 여행지로 만든 주역이다. 미술관과 책방에는 예쁜 휴게 공간이 마련돼 여행자를 위한 쉼터로도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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