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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충청남도

당진 정미-안국사지

by 구석구석 2008.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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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사지

안국사지는 당진읍에서 서남쪽으로 10.5km 떨어진 정미면 수당리 원당굴 은봉산 중턱에 있는 절터이다. 안국사지 석불에서 서남쪽으로 500m쯤 채석장을 끼고 올라가면 1,000여평의 터가 남아있다. 안국사터의 앞면은 돌로 축대를 쌓았고 터 안에는 장대석이 이리저이 나뒹굴고 주춧돌 3개가 보인다. 이 주춧돌들은 자연석이 아니라 양각 형태로 잘 다듬어서 사용했던 것들이다. 빈 터 한쪽에 작은 옹달샘이 있고, 그 뒤쪽으로는 부속건물이 있었음직한 터에 기와조각이 흩어져 남아 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해미현조에 보면『안국산에 안국사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창건연대는 문헌에 나타나 있지않아 분명치 않으나 백제 말엽 창건되어 고려시대에 번창한 대사찰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언제 폐찰되었는지 알 수 없으며, 석불, 석탑, 석축, 배바위돌 하수구 등이 현존하여 사찰이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이 터의 동북쪽으로 500여m 쯤 아래쪽에 보물 100호인 석불입상과 보물 101호인 석탑이 서있고 그 뒤로 배바위 매향암각이라 불리는 큰 바위가 있다.

 

안국사는 안국산(일명 은봉산) 중복에 위치한 폐사지로 1929년에 재건하였다고 하나 다시 폐사(廢寺)가 되었다. 사지에는 석조(石槽) 1기와 5층석탑의 옥개석이 남아 있다. 이 곳에서 200m쯤 떨어진 곳에 안국사지 석불입상과 안국사지 석탑이 위치하고 있다.

 

이 입상은 높이 5m에 가까운 거불(巨佛)로서 머리는 원통형이고 얼굴은 4각형인데 넓적하다. 보안(寶顔)은 눈을 감고 있으며 코는 납작하고 입은 다물고 있다. 일면 엄숙하게 보이기는 하나 장승과 같은 형태로서 서 있다는 말이 적절할 것 같다. 이런 인상은 신체의 조각에서도 나타나는데 길다란 장대석(長臺石)을 깎아 세우고 몸과 어울리지 않게 팔과 손을 붙여 비현실적인 형상을 하고 있다.


오른손은 가슴에 대었고 왼손은 배에 붙여 엄지와 중기를 맞대고 있는데 아미타불의 중품중생인(中品中生印)을 표현한 것 같다. 손과 손가락이 터무니 없이 길고 굵다. 귀는 길고 목은 짧으며 삼도는 없다. 의문(衣文)은 긴 종선문(縱線文)이며 머리에는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장방형의 갓을 쓰고 있다. 오른쪽 협시보살은 허리까지 묻혀있고 왼쪽 협시보살은 머리만 결실되었는데 형식은 본존불과 같다. 대좌는 3존불 모두 묻혀 있어 어떤 형태인지 모르겠다. 이 지방에서 유행하던 괴체화(塊體化)한 고려불상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안국사지에는 작은 절터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커다란 바위가 있다. 석불 뒤에 묵직하게 세월을 누르고 앉아 있는 ‘매향암각비’는 그 모습이 배와 같다해 배바위 혹은 고래바위라고도 불린다. 국내에 발견된 매향비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안국사지 매향암각비의 제작 시기는 고려말(1310년)로 추정되고 있다.


매향이란 석가모니불이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구제할 미래의 부처 ‘미륵’이 내려올 때를 대비해 향 중에서 가장 좋다는 침수향을 만들기 위해 향나무를 땅에 묻는 의식을 일컫는다. 불교에서 향은 신에게 바치는 으뜸의 공물인 것이다. 


고려말 조선초에 주로 이루어졌다고 알려진 매향의식은 곧 미륵신앙과 연결된다. 당시 해안가는 부패한 국내정치와 잦은 외세의 침략으로 백성들이 고난을 겪고 있었다. 쇠약해진 옛 조상에게 무엇보다 ‘신의 구원’이 간절했을 것이다.


한 학자에 따르면 나라의 태평과 백성의 평안을 기원하는 안국사(安國寺)에 매향을 한 기록을 남긴 것은 그 매향 참여자들이 용화세계라는 이상세계가 도래하길 기원하면서도 한편으로 그들의 공동체와 나아가 국가의 태평과 안녕을 기원했던 증거의 하나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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