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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상북도

경주 월성동-헌강왕릉 정강왕릉 서출지 이요당 천동골

by 구석구석 2008. 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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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강왕릉은 길가에 차를 세우고 오른쪽 산으로 조금 걸어 올라가야 한다. 차에서 내려 한 50m쯤 소나무 길을 따라가니 아주 단순한 형태의 능이 나타난다. 신라 49대 헌강왕의 능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헌강왕은 경문왕의 태자로 875년 즉위했다. 그는 성품이 총민하고 독서를 좋아하여 눈으로 한 번 본 것은 다 입으로 외웠다고 한다. 그는 또한 내치와 외교를 비교적 잘 하고 886년 세상을 떠난다. 시호를 헌강이라 하고 보리사 동남쪽에 장사지냈다.

 

헌강왕릉과 둘레석/이상기

 

헌강왕과 관련된 이야기는 또한 <삼국유사> ‘처용랑(處容郞과 망해사(望海寺)’ 조에 나온다. 처용랑은 처용가와 처용무로 우리에게 알려진 그 처용이고, 망해사는 울주군 청량면 율리에 있는 절로 동해바다를 내려다 볼 수 있다.

 

헌강왕릉은 1993년 발굴을 통해 내부 구조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석실 내부는 남북이 2.9m, 동서가 2.7m이다. 벽면은 비교적 큰 깬 돌을 이용하여 상부로 갈수록 안쪽으로 기울게 모서리를 죽이는 방식으로 쌓았다. 석실 입구에 돌문, 문지방, 폐쇄석, 묘도를 갖추고 있으며 연도의 크기는 길이 142㎝, 너비 128~96㎝이다. 석실 내에는 서벽에 접해서 2매의 판석으로 된 시상석이 있다. 외부는 원형봉토분으로 하부에 4단의 둘레석을 둘렀다. 봉분의 높이는 4m이고 지름은 15.8m이다. ⓒ 2008OhmyNews 이상기

 

헌강왕릉에서 정강왕릉은 걸어갈 수도 있으나 큰 길로 나와 차를 타고 정강왕릉 입구에서 걸어갈 수도 있다. 우리는 차를 능 입구에 대고 걸어갔다. 정강왕릉 역시 길에서 5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정강왕릉/이상기

정강왕은 헌강왕의 아우로 1년의 재위 기간 동안 어렵고 좋지 않은 일이 많이 일어났다. 나라의 서쪽에 가뭄이 들고 한주(漢州)의 이찬 김요가 반란을 일으키고 왕도 즉위한 다음해 병에 걸려 죽고 만다. 시호를 정강이라 하고 헌강왕처럼 보리사 동남쪽에 장사지냈다.


정강왕릉은 봉분의 높이가 4m, 지름이 15m인 원형봉토분이다. 봉분 하단에는 2단의 둘레석을 돌렸는데, 헌강왕릉의 4단과 대비된다. 봉분 앞에는 1매의 판석으로 된 상석이 있고, 그 앞에 다듬은 장방형 화강석으로 축조한 석단이 있다.  ⓒ 2008 OhmyNews 이상기

 

통일전은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태종 무열왕, 문무왕, 김유신 장군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77년 9월 세워졌다. 이 건물은 분단된 남북의 통일을 염원하는 당시 정권의 이데올로기와 맞아 떨어져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통일전 관광안내소에 세워진 표지석

신라시대 전통 건축양식으로 위 세 위인의 영정이 모셔져 있고, 통일의 과정을 그린 기록화가 전시되어 있다. 당시 민족기록화라는 이름으로 역사상 중요한 사건들을 그림으로 그려 보급했던 생각이 난다.

 

통일전에는 들어가 보지를 않아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찾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다. 사람들은 통일전을 참배하느니 차라리 무열왕릉과 김유신 장군묘를 찾아 그 위인들의 체취를 느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통일전은 남산을 뒤로 하고 앞에 문천을 낀 배산임수형 건물로 동쪽을 향하고 있다. 

 

 

서출지도 이제는 또 다른 명소

통일전 주차장 남쪽 끝에는 서출지(書出池)가 있다. 서출지란 ‘글이 나온 연못’이란 뜻이다.

 

 

서출지 이요당

일연 스님은 어디서 이런 이야기를 인용한 걸까? 기록에 근거한 것일 수도 있고, 전해지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일연 스님은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삼국시대의 역사를 풍요롭게 하고 있다. 사실 황량하고 쓸쓸한 연못이 서출지와 사금갑이라는 이야기를 통해 의미 있는 연못이 되었으니 말이다. 이것이 바로 스토리텔링의 힘이다.

 

경주 남산 자락의 서출지도 이제는 떠오르는 또 다른 야간 명소가 된 듯하다. 첨성대와 안압지에 비해서는 찾는 이들이 드물지만 알려진 사람들과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출사로 환영받는 장소이다.

 

경주 남산 자락의 서출지도 이제는 떠오르는 또 다른 야간 명소가 된 듯하다. 첨성대와 안압지에 비해서는 찾는 이들이 드물지만 알려진 사람들과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출사로 환영받는 장소이다.

  

서출지야경

서출지에 대해서 알아보면 신라 소지왕이 남산 기슭에 있었던 천천정에 거동하였을 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그 중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쫓아 가보라'고 하므로 괴이하게 여겨 신하를 시켜 따라가 보게 하였다. 그러나 신하는 이 못가에 와서 두 마리의 돼지가 싸우고 있는 것에 정신이 팔려 까마귀가 간 곳을 잃어버리고 헤매다 못 가운데서 한 노인이 나타나 봉투를 건네주므로 왕에게 그 봉투를 바쳤다.

  

서출지의 이요당이란 조선시대 건물

왕은 봉투 속에 있는 내용에 따라 궁에 돌아와 거문고갑을 쏘게 하니, 왕실에서 분향하는 중이 궁주와 서로 흉계를 꾸미고 있다가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 못에서 글이 나와 궁중의 간계를 막았다는 뜻에서 못 이름을 서출지라 하게 되었고, 이로부터 음력 1월 15일에 까마귀에 제사밥을 주는 오기일의 풍속이 생겼다고 한다. 오마이뉴스 2007 김환대

 

이요당(二樂堂)은 조선 현종 2년(1664) 임적이 지은 목조건물로, 이요는 요산요수(樂山樂水)의 두 글자를 말한다. 그러므로 이요당에서는 뒤의 남산을 즐기고 앞 서출지의 물을 즐길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서출지 옆에는 역사가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 않는 무량사(無量寺)라는 절이 있다. 안에 들어가 보니 금오산 정상 가까운 곳에 있는 용장사지 삼륜대좌불 모조품이 한쪽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을 지나 연못 동쪽에 이르니 연못 주변의 나목이 연못에 비쳐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수면을 기준으로 양쪽이 대칭을 이루고 있다. 겨울에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오마이뉴스2008 이상기

 

이러한 역사 속의 내용을 알고 바로 옆에 있는 근래 개업한 사금갑이란 전통찻집(셀프)을 찾아 휴식도 겸하며 남산의 정기를 받는 것도 좋을 듯하다.

   

 

 

남산리 3층석탑의 단순한 아름다움

서출지를 지나가면 불탑사란 근래 절이 있고, 탑마을 한 가운데 있는 이 탑의 공식명칭은 남산리 3층석탑(보물 제 124호)이다. 동서로 나란히 있는 쌍탑으로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에 조성되었다.

이 3층석탑은 다보탑과 석가탑처럼 모양이 완전히 다르지도 않고, 감은사 탑처럼 모양이 완전히 똑같지도 않다. 동탑은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서 쌓아 올린 모전석탑 양식이고, 서탑은 2중 기단에 3층을 올린 전형적인 석탑 양식이다.

 

동탑과 서탑/이상기

 

동탑의 기단부는 2중의 바닥돌 위에 잘 다듬은 큰 돌 여덟 개를 어긋나게 맞추어 2단의 기단을 만들었다. 탑신부는 몸돌 위에 지붕돌이 하나씩 얹혀 있는데, 지붕돌의 모양이 특이하다. 지붕돌은 벽돌을 쌓아 만든 것처럼 처마 밑과 지붕 위의 받침이 각각 5단이다. 지붕 윗면이 5단으로 층을 이룬 것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아주 특이한 형태이다.

 

서탑은 2중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전형적인 석탑이다. 2층의 기단은 한 면을 둘로 나누어 팔부중상을 새겨 종교성과 예술성을 부각시켰다. 팔부중상은 신라 중대 이후 등장하는 양식으로 불법을 지키는 여덟 가지 신장상이다. 3개층의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돌 하나로 되어 있고 지붕돌의 모서리 끝이 약간 올라가 날렵한 느낌을 준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동탑과 같이 5단이다.

 

 팔부중상이 조각되어 있는 서탑(우)/김환대

이들 두 탑은 어찌된 된 일인지 옥개부가 모두 훼손되어 있다. 그래서 오히려 단순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동서로 나란히 자리 잡은 3층석탑은 높이도 약간 다른데, 동탑이 7.04m, 서탑이 5.85m이다. 그리고 이 두 탑은 어디서 보나 자연과 잘 어울린다. 동탑 쪽에서 쌍탑을 보면 남산을 배경으로 단아한 느낌이고, 서탑 쪽에서 쌍탑을 보면 들판을 배경으로 안정된 느낌이다.

 

탑 주변에는 이곳 절터에서 나온 연화대와 건축용 석재들이 놓여 있다. 그리고 쌍탑 뒤 남산 쪽으로는 불탑사라는 절이 있어 이 쌍탑이 이 절에 속했던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절은 최근에 생긴 것으로, 과거 이곳에 양피사(壤避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일부 사람들은 이 쌍탑을 양피사지 3층석탑이라고 부른다. ⓒ 2008 OhmyNews 이상기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인 남리절터

쌍탑을 지나 조금 더 가면 남산사라는 절이있고 길가에 현재 복원이 진행중인 남리사지(혹는 전염불사지)이다. 절터에는 현재 동·서의 탑 자리가 남아 있는데 동탑은 조사에서 1층 옥개석이 깨어진 상태로 발견되었고, 서탑 주변에는 탑재들이 파손된 채 넘어져 있으며, 마을에는 사지에서 반출된 석재들이 흩어져 있다. 아직도 주변에는 탑재들이 있고 2008년 2월 불국사역 앞 삼층석탑을 옮겨와 현재 이곳에 복원하려고 진행중에 있다.

 

이제 서서히 산행을 시작하는데 산불조심 기간이라 방명록을 작성하고, 걸음을 재촉하여 가면 두 번째 계곡이 천동골 입구가 나타난다. 찾기가 만만치 않으나 다행히 요즘은 민묘 옆으로 이정표를 작게 화살표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지나치기 쉬우니 첫 계곡을 지나 '반갑습니다'란 문구가 적힌 안내판을 지나 조금 더 가면 간이 화장실이 보이고 조금 더 간 바로 옆 골짜기가 천동골이다. 계곡을 거슬러 한 20여분 한참을 올라가면 특이한 천동탑이 보인다.

 

디딜방아터/김환대

천동탑이 보이기 전에 화살표 이무런 문구도 없고 그냥 화살표만 된 곳 위로 올라가면 바로 디딜방아터가 남아 있다. 이곳은 아마도 신라인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곳이라 주목되는데 당시 곳인지는 의문이다.

 

천동탑은 현재 하나는 서 있고 하나는 조금 더 밑에 옆으로 누워 방치되어 있다. 돌기둥에 많은 감실을 파놓은 특이한 형식인데 탑이라 하기에는 뭐 좀 그러하다. 대략 100여개 가량의 감실이 있는데 당시에는 아마 천불천탑을 조성하여 예배하는 것으로 흔히들 이야기 한다. 다른 곳에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라 주목된다. 인적이 아주 드물어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주변은 온통 덩쿨과 잡목들로 우거져 있다.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유적들이 너무나 많은 경주남산 단순히 등산으로 오르지 말고 신라인들의 신앙심을 생각하면서 유적답사를 해 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이제 서서히 봄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남산을 찾겠지만 과연 여기를 얼마나 찾을까? 한 번 생각해 본다. ⓒ 2008 OhmyNews 김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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