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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전라북도

정읍 30번국도-산외마을 김동수가옥

by 구석구석 2008.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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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번국도(호남고속도로) 태인에서 나와 30번국도를 타고 옥정호방향으로 접어들어 산성리에서 49번국지도를 타고 좌측으로 빠진다.

 

토종 황소한우 만을 도축해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하는 정읍시 산외면 소재 「산외장터 한우마을」은 요즘 들어 저렴한 한우고기를 사다가 즉석에서 먹으려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다.
이곳 산외마을이 수년 전부터 한우 황소만을 도축해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한우고기를 먹고 구입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찾아올 정도로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정읍시 산외면은 1440가구 2962명이 살고있으며, 변변한 특산물이나 관광지도 귀한 시골이다. 1년여 전 만해도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대부분의 농촌처럼 썰렁하던 곳이었다. 그런데 이곳에 지난해 봄부터 토종 한우마을로 소문이 나면서 많은 외지인이 모여들고 있다. 
자동차로 20~30분 거리인 정읍 시내와 전주에선 물론 수도권과 영남. 충청 지역에서도 찾아오고 있다.
이곳에 몰려있는 20여 곳이 넘는 식당 중의 한집인 한우전문식당인 '산외장터 한우마을'은 주변에 몰려있는 정육점 중 아무 곳에나 들어가 먹을 만큼의 고기를 사 가지고 오면 조리를 해주는데 1근 당 6,000원을 받고 있다. 

산외면에는 원래는 정육점이 두 곳뿐이었으나 이들이 고기를 싸게 파는 데다, 2년여 전부터 고기를 사 가지고 가면 구워 먹게 해 주는 식당이 생기면서 사람이 모이기 시작했다. 산외면 한우 거리에서 팔리는 양은 하루 평균 어미 소(600㎏ 기준) 20여 마리 분에 이르고 있다.
면사무소 앞 길 400m의 양편에 있는 한우 고기 취급 식육점 만 23곳에 이르고, 음식점만도 20곳이 성업중에 있으며, 개업을 준비중인 곳도 있다.
조리방법은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 돌판에 구워먹는 '구이'와 싱싱한 한우이기에 '육사시미'로 먹을 경우 각각 6,000원이고 '육회'로 주문할 경우는 10,000원을 받는다.
각종 기름 소금장과 육장(소스를 가미한 초고추장), 그리고 상추를 비롯한 밑반찬 등은 1근당 6,000원씩이라는 상차림 값에 포함되기에, 고기값 14,000원과 6000원을 합쳐 20,000원이면, 보통 도시 음식점(1인분 200g) 기준으로 약 3인분에 해당하는 쇠고기를 먹을 수 있는 셈이다.
산외 한우를 찾아온 사람은 대부분 고기 맛에 만족한다. 가격 대비 최고의 맛이라고 입을 모은다. 

고기를 들고 난 후 식사로는 '알밥'(4,000원), '떡국', '냉면'(4,000원), '소면', '누룽지'(2,000원), '공기밥'(1,000원)등을 기호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식당 주인 김진욱 씨는 "손님들은 고기를 사 먹는 데 그치지 않고 여러 근씩 사 가지고 간다며, 업소마다 택배를 통해 파는 물량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이곳 산외면 식육점들은 쇠고기를 도시의 절반 수준에 팔고 있다. 한 근(600g)에 안심. 제비추리. 등심. 치마살 등은 14,000원, 불고기·국·장조림 거리는 10,000원이다. 또 대부분의 업소가 고기를 사거나 다른 곳에서 사 오는 사람들에게 근당 6000원만 받고 구워 먹을 수 있도록 가스레인지에 불판과 상추와 야채 등의 양념 상을 차려 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고기값이 싼 이유는 무엇일까 산외면 상인들은 거세하지 않은 수소 고기를 팔고 있다. 비(非)거세 한우는 생후 24개월이면 다 커버려 거세한 것보다 생육기간이 5개월 정도 짧다. 그만큼 사료 값 등 생산비용이 덜 든다. 글·사진/한지호(자동차여행가)

 

063-536-9244 / 40대 / 오전 9:30~21:00 / 휴일: 월 1회


 

99칸의 전통한옥인 김동수 가옥 
 한우를 맛본 후에는 200년 된 고택 마당을 산책해 보자. 한우 거리에서 칠보면 방면으로 600m 정도만 가면 오른쪽에 김동수 가옥이 보인다. 중요민속자료 제26호로 지정된 커다란 고택으로, 산외면의 최대 볼거리다.


정읍의 10대문화재의 하나로 흔히 아흔 아홉 칸 집이라고 부르는 전형적인 상류층 가옥으로 불리는 김동수 가옥은 그의 6대조인 김명관(金命寬)이 1784년(정조 8)에 건립하였다. 1971년 5월 26일 중요민속자료 제26호로 지정된 이 집은 현재 김용선이 소유하고 있는데, 풍수의 이야기 거리가 많은 곳이다.

 
전라북도 정읍시 산외면 오공리 창하산(蒼霞山)을 뒤로하고 앞에는 동진강(東津江)의 상류가 흐르고 있어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터전에 세운 가옥임을 알 수 있는데, 조선중기 상류층 주택의 면모를 잘 갖추고 있다.


원래 전라도 지방은 실학자인 박제가가 그의 저서인 북학의에서 "전라도 일대가 우심하게 나쁜 버릇이 물들어서 열 집이면 아홉 사람이 지관 노릇을 한다."고 할 정도로 풍수에 대한 믿음이 강했던 곳이었다.
김명관도 풍수 길지인 좋은 터를 찾아다니다 이 터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이 집의 전 주인이었던 김동수님도 역시 이곳이 풍수상 길지라는 믿음이 강하였다고 한다.

 

 이 집의 터는 풍수상으로 지네형국의 명당이라고 한다. 뒷산인 창하산은 지네를 닮았다고 하여 지네산으로 불려지며, 오공리(五公里)라는 지명도 원래는 지네를 가르치는 오공(蜈蚣)이었으나 일제 때 현재와 같은 한자 표기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집 앞에는 동서로 긴 장방형의 연못이 있는데 이러한 형태로 된 것은 지네의 먹이인 지렁이를 상징하여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연못을 건너의 조산인 화견산의 화기를 막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쨌든 여러 사람이 집을 구성하는 모든 것을 풍수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또한 집 앞에는 나무가 울창한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이것 역시 풍수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이 나무는 집의 건너편에 보이는 안산인 독계봉(獨鷄峰)과 조산인 화견산(火見山)의 화기로부터 집의 풍수형국을 보호하기 위하여 심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김광언 선생은 나무를 많이 심은 것은 지네가 습한 곳에서 사는 동물이기 때문에 그늘을 만들어 주기 위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나무는 대문을 중심으로 왼편에 40그루, 오른편에 26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었는데 왼편의 나무는 지네산까지 연결되게 하여 지네산의 맥이 이어지도록 하였다고 한다.

 

 한양에서 내려온 김명관이 청하산 아래 명당을 골라 10여 년에 걸쳐 이 집을 완공한 것이라 하며, 대문 앞쪽으로는 30여 평의 연못을 파놓았다.
대지 중앙에 ㄷ자집 형태의 안채와 중문간채가 튼 ㅁ자집 형태로 자리잡고 있으며, 안채 남쪽에 일(一)자형 별당채, 북쪽에 작은 사당이 있다. 중문간채 동쪽에는 사랑채가 있고 그 남동쪽으로 문간채가 있다. 사랑채는 이 집에서 가장 화려한데 부엌이 독립되어 특이하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좁은 마당이 나오고 중문을 거치면 바깥 행랑채가 나온다. 다시 바깥행랑채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아담한 사랑채가 보이고, 안행랑채의 안대문을 들어서면 6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으로 배치된 방들이 있으며, 좌우 앞쪽으로 돌출된 부분에 부엌을 날개처럼 배치한 특이한 평면의 안채가 있다.

안채의 서남쪽에는 안사랑채가 있는데, 본채를 지을 때 김명관이 목수들과 임시로 거처하기 위한 건물로 지은 것이다. 마당의 크기와 위치, 대문간에서 안채에 이르는 동선의 관계가 뛰어나다. 특히 안마당은 ㄷ자집 형태의 안채 내부 마당과 안행랑채 사이의 긴 가로마당이 만나서 아늑함이 느껴진다.

 

 김동수가옥은 풍수 상으로 길지에 자리 잡은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김씨 집안은 이 집을 짓고 가산이 크게 불었다고 한다. 한해 추수로 1,200석을 하는 거부가 되었다고 한다.


이 집터가 명당자리이고 12대까지는 그 기운이 미칠 것이라는 풍수해석을 굳게 믿은 김명관은 후손에게 이곳을 절대 떠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집이 화를 당하여 무너지더라도 정확한 위치에 다지 지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안채의 땅속에 표적을 만들어 두었다고 한다.


그만큼 이 땅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였다. 그러나 7대를 넘지 못하고 빈집이 되고 말았다. 집을 돌아보고 나오는 길에 앞의 안산 쪽을 바라보니, 안산의 일부가 잘려 나가고 있었다. 어쩌면 풍수의 근간이 흩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도 싶다. 이제 이곳에서 풍수의 덕을 보기란 어려운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다만 이곳에서 조선시대 양반들의 생활양식을 엿볼 수 있으며, 비교적 섬약한 부재를 사용하였지만, 이는 조선 후기 중류 이상의 가옥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특징이다. 소박한 구조 같으면서도 대문간에서 안채까지의 공간이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글·사진/한지호(자동차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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