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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전라북도

원불교익산성지 중앙총부

by 구석구석 2008.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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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한 마음의 고향

 

일상에서 벗어나 오늘 하루 세상일을 잊고 익산성지에 간다. 마음만 비우고 찾아가면 된다. 

만나는 사람마다 합장하고, 언제나 반겨주는 사람들, 만나는 사람마다 예전부터 알고 지낸 것만 같은 느낌, 그래서 아무때나 찾아가도 마음에 다가오는 곳이 익산성지이다.  

 

원불교 익산성지는 전법성지(傳法聖地)로 원불교중앙총부가 위치하고 있다. 소태산대종사께서 원기9년(1924)에 총부를 건설하시고 본격적인 전법활동을 시작하여 19년간 교화경륜을 펴시다 열반에 드신 곳이다. 이곳은 대종사님의 교화경륜과 선진님들의 혈성어린 신심이 스며있는 각종 사적과 유물, 사료 등이 보존되어 있으며, 교단을 이끌어가는 총부 가 자리 잡고 있다. 특히 대각전 등 8개의 구조물과 2개의 조형물인 대종사성탑과 성비는 근대문화유산 국가등록문화재 제17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제 익산성지는 다양한 문화유산이 보전되어 있는 익산의 명소가 되었다.

 

 

  

원불교 중앙총부 / 익산성지 정문

 

원불교 중앙총부의 효과적인 홍보와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원불교 성지임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기에 익산총부건설 80주년을 맞아 '원불교익산성지'현판을 걸었다. 이산 박정훈 원로교무의 ‘圓佛敎益山聖地' 해서체를 최경순 씨가 가로8m×세로1m×두께10cm의 소나무에 판각하였다. 바탕은 검정색, 글자는 흰색, 낙관은 붉은색으로 하였다. 

 

소태산 대종사는 1924년(원기9)에 익산 총부를 건설하였고 다시 60년 뒤인 1984년에 총부정문이 건립되었다.

두해 모두 갑자년인데 이 갑자년은 60갑자를 열어가는 첫해로서 어떤 일을 시작하면 잘됐다고 믿어오는 상서로운 해로 치고 있다. 건물은 백제 양식으로 설계하였으며 1983년 수원교당 조대진 교도의 특별희사로 이루어 졌다.

 

처음 정문은 세탁실과 구식당사이에 있었는데 처음으로 불법연구회 간판이 걸려있었다. 시멘트 돌기둥에 나무문을 달고 대문위에는 아치형을 만들어 능소화가 휘감겨있는 옛 정취 그대로 였으나 그 뒤 송판이 썩어 주변 정리를 하면서 원형 돌기둥을 세우고 대문을 달지 않았다.

 

1970년 반백년기념 대회때 도로에서 청하원 탱자나무 울타리를 따라 총부 구내쪽으로 20m쯤 들어와 현 노폭으로 확장하였으나 정문을 시설하지 못하였다. 교단 제2대말 성업 봉찬 사업회의 봉찬사업 일환으로 총부건설 60돌을 맞이하여 현재대로 정문을 건설, 현판식을 거행하였다. 정문간판은 송성용(강암 1913∼1999)의 글씨로 예서 필의 호방하고 정중한 풍격으로 오른쪽 기둥에 걸려있다.

 

총부정문 왼쪽에는 대종사 탄생 백주년을 기념하여 1986년(원기73)에 송성용(강암 1913∼1999)의 글씨로 웅혼한 전예체의 '정신개벽'표석을 세웠다. 원불교 개교표어인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에서 따온 문구로 미래사회는 정신개벽이 주체가 된다는 원불교의 상징적인 표어다.

 

개벽은 천개지벽(天開地闢)의 뜻으로 천개는 정신개벽 곧 도덕문명이요 지벽은 물질개벽 곧 과학문명을 말한다. 미래세계에 대한 전망·기대·염원을 나타낸 말이다. 원불교의 입장에서 볼때 오늘의 세계는 물질문명이 한없이 발달해가므로 물질문명을 선용(善用)할 도덕문명 정신문명을 발달시켜 가자는 기대와 염원을 나타내고 있다.

 

 

 

총부정문 표석옆은 주차장과 1998년 12월 30일에 개국한 원음방송이 자리하고 있다. 원음방송(WBS)은 신개념의 정보 교양프로그램, 새로운 감각이 돋보이는 프로그램, 기존 종교방송과 차별화된 프로그램을 지향하고 상업성을 배제한 순수 공공방송으로 종교협력을 통한 인간중심 방송을 추구한다.

 

원음방송은 호출부호 HLDV-FM 주파수 97.9Mhz, 출력 3Kw, 가청지역은 전북지역이다.

방송시간은 오전 5시부터 밤 12시까지 19시간. 교화(20%) 종교협력(5%) 음악(50%) 교양 정보(25%)등으로 프로그램이 구성된다.

  

 

 

총부정문을 들어가면 바로 왼쪽에 찻집 '운수의 정'이 있는데 총부에 여러번 다녀갔지만 찻집이 있는지 이번 순례길에 알았고 일반 찻집과는 다른 셀프찻집으로 내부는 매우 정갈하며 반대편 문으로 나오니 총부 밖 원음방송옆길이 나온다. 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원로원과 대각전으로 연결된다.

 

중앙총부

정문을 들어서면 좌우로 건물이 자리한다.

왼쪽의 붉은벽돌의 2층기와건물은 수위단과 교정원건물로 사용하는 법은관으로 지하층은 총부식당으로 사용한다. 원불교의 식당들은 모두 자유배식과 먹을 만큼만 담아가기 때문에 잔밥이 없다.

총부에는 교단을 주재하시는 종법사님이 계시며, 최고 결의기관인 중앙교의회 등이 자리잡고 있고 중앙총부는 조선반도에 자리잡은 인류정신개벽의 중심이다.

 

 

큰길옆이라 매번 지나쳐 다닌 건물이지만 이번순례길에 사용처를 알게 되었다. 예전에는 아무생각없이 다녔었고 이번에는 총부자료를 만들어 볼 요량으로 돌아다녔기에 유념과 무념이 이래서 차이가 많이 나는 모양이다.

 

오른쪽으로는 흰색의 슬라브건물로 교정원과  반백년기념관이 자리한다.

교정원은 약간 타원형의 3층건물로 1층은 재정부 2층은 감찰원 3층은 전산실로 이용하고 있다.

 

 

반백년 기념관은 개교 반백년을 기념하여 원기56년(1971) 10월에 지상3층 연면적 1,000평의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신축하였으며 1,200명을 수용하는 대중의식의 집회장으로 이용된다.

 

교단의 각종 주요행사가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번순례때는 원로교무들 퇴임봉고식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  반백년기념관

 

1992년 5월 화재로 내부가 소실되기도 했으나 이듬해 내부를 개조하여 1,500명을 수용할수 있게 되었으며 교단에서 제일 큰 법당이 아닌가 한다.

 

대각전으로 가는 길

 

 

총부정문을 지나 왼쪽길로 접어 들면 원음각을 지나 근대문화유산인 대각전이다. 

원음각은 나무동산속에 있으며 잔듸밭이 있는데 이곳 밑이 찻집 '운수의정'이다. 종은 매일 아침과 저녁에 타종을 하며 신년이나 큰 행사때에도 타종한다. 마른잔듸사이로 파란쑥이 하나둘씩 보인다. 나만의 느낌인지는 몰라도 파란잔디보다 오히려 보기가 좋다.

 

노송앞으로 대각전이 자리하고 있다.

총부의 대각전은 일원상이 최초로 봉안된 곳이기도 하며 국가등록문화재제179호(2005.6.18), 원불교성적제12호로 반백년기념관이 건립되기 전에는 총부법회를 비롯하여 각종 의식과 정기훈련을 하는 대강당 역할을 했던 곳이다. 

 

대각전은 근대건축양식의 목구조로된 277.3제곱미터로 단층건물이다. 외관은 단순하고 출입구는 2개가 독립되어 케노피를 설치하였으며 지붕은 우진각 지붕위에 시멘트기와를 올리고 처마끝에는 물홈통을 설치하였다. 창호는 오르내리창이며 내부벽면은 습기를 방지하기 위하여 회칠을 하였고 바닥은 창마루를 깔고 전면에 불단이 조성되어 있다.

 

 

 

총부 대각전은 일원상을 최초로 정식 봉안한 곳이다. 대각전은 큰 대(大) 깨달을 각(覺) 집 전(殿)자로 대각을 이루기 위해 신앙과 수행에 정진하는 중심도량이며 주불전(主佛殿)이라 할 수 있다. 대종사께서 대각 직후 일원대도의 제 일성을 발하신 후 금산사에서 일원상을 새 회상의 종지(宗旨)로 표현하시고 일원의 신앙법을 꾸준히 구상해오시다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확정하시었다. 원기20년(1935) 4월27일 대각전을 준공하고 그 전면 불단에 일원상을 봉안하였다. 이는 새 회상이 신앙의 체계를 확립하여 종교의 체제를 완전히 갖춘 원불교사적으로 중대한 사실이다. 이 대각전은 대종사께서 직접 법을 설하시고 제자들의 교육과 훈련을 지도하신 곳이며, 예회와 선을 비롯하여 총회, 기념식 등 대중집회를 거행한 곳이다. 성지해설사 임윤기

 

소태산 대종사께서 이곳에서 1943년에 최후의 법무을 하셨으며 정산종사와 대산종사의 취임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대각전은 2005년에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후 2008년에 전면보수를 마쳤다고 하나 곳곳에 금이 가고 오래된 티가 난다.

 

 

대각전

  불단의 일원상 보통 전면 벽에 부착을 하나 이곳은 여타 불단과 다르게 짙은 갈색의 판으로 되어 있다. 아마도 초기에 사용하던 일원상을 상징적으로 모셔둔 듯 하다.  

성지순례는 이곳 대각전에서 부터 시작을 한다. 2007년부터 성지해설사가 양성이 되어 이제는 교단초기 얘기를 들으며 성지를 둘러볼 수가 있다. 해설은 하루 2명씩 교대로 담당한다고 한다.  

 

 

대각전앞쪽으로는 원로원과 남자요양원이 자리하고 있고 원음각 뒷편길로도 들어갈 수가 있다. 둘러보면서도 사람도 안보여 어떤 곳인지를 몰랐는데 나오는데 원로원현판을 본다. 

 

 

 사람이 사는 곳인지 알수가 없었으나 가까가서 보니 문마다 이름을 써놓은 문패(?)가 있었고 안내도를 보니 남자요양원이었다. 문앞에는 신발을 벗을 수 있는 턱이 있는데 하나같이 털신과 고무신비슷한것이 하나씩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신발도 정해져 있는 듯한 감이 든다. 주변은 사람이 살고 있다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사람이 안사는 한옥마을 담넘어로 기웃거리는듯 기분이었다. 

 

 

원로원

익산성지는 정문좌우로 있고 영묘원 잔듸광장주변의 건물들은 총부와 부속건물들이다.

대각전에서 정문오른쪽의 교단 초기의 건물들이 있는 곳으로 간다.  정문안내소를 끼고 도는 길로 숲속길을 걷는 듯한 곳이다.

 

제일먼저 만나는 곳이 오른쪽의 청하원(淸河院)으로 1932년 7월 이공주종사의 사가로 지었으나 교단에 희사하였으며 초기에 대중의 소집회장소로 사용되다가 일제시대때는 이리경찰서 북일주재소가 들어오기도 했으며 1~2대 성업봉찬 사업이 이뤄진 곳이다.

 

청하원뒤로 구정원이 자리하고 있다.

구정원은 원기21년(1936) 5월 소태산대종사 재세시 교정원의 각 부서가 한 건물에 모여 사무를 본 사무실로 1964년 4월 개교반백주년기념사업회가 발족되어 사무와 사업이 이루어진 산실이다.

이곳은 본래 신영기씨가 개인주택으로 지었으나 중앙총부에 희사한 것이다.

뒤로 보이는 굴뚝이 이채롭다. 처음에 사가로 지어서인지 건물중에 구정원에서만 굴뚝을 보았다.

 

구정원 뒤로는 정신원(淨信院)이 자리한다.

1941년 4월에 신축한 것으로 대종사께서 외빈들을 응접하기 위한 장소로 사용되다 광복이후 유일학림 및 원광대학교 초기 교무실로 사용되던 곳이다. 또한 1953년 교단의 7대 교서편찬을 위해 정화사가 설립되어 1977년까지 이곳에서 편수업무를 완수하였다. 

 

 

정신원은 황정신행 대호법이 보육및탁아시설인 자육원(慈育院)으로 지었으나 중앙총부에 희사하였으며 원기33년에는 이곳에 익산교당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정신원맞으편으로는 정남숙소인 정화정사(貞和精舍)와 뒤로는 공덕원이 자리하고 한다.

정화정사는 1963년에 건립되었으며 한때는 원광대 원불교학과 기숙사로 사용되기도 했다.

 

종법실로 가는 길과 본원실로 이어지는 길

대종사가 늘 지나다닌 그 길가의 아름드리 나무들 곁을 지난다. 이길을 오래전에 대종사가 지나다닌 길이었음을 생각하며 그 발자취를 조용히 더듬어보자. 바람소리에 실려 대종사의 음성이 묻어난다.

 

중앙총부에서 이 길만큼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은 없다. 건물이 그렇고, 나무가 그렇고, 숨결이 그렇다. 그래서 교단 초창기 간난했던 시절의 면면을 엿볼 수 있는 고향길이다.

 

세탁부, 금강원, 본원실은 한곳에 몰려있다.

세탁부는 원기9년(1924) 9월 총부건설당시 본원실과 함께 건축하였고, 교단 초기 엿장사를 위해 엿 곱는 일을 해 '엿집'이라 하였으나 원기58년(1971) 중앙선원 발족과 함께 총부의 세탁업무를 담당하여 이후 세탁부라 하였다.

 

본원실은 원기9년(1924) 9월에 익산총부건설당시 최초로 지은 건물로 원불교 초기교명이었던 '불법연구회'간판을 처음걸었고 교단초기에 전무출신의 공동생활터이기도 했다.

 

 

금강원(金剛院)은 원기12년(1927) 6월 22일 건축된 4간의 기와집으로 소태산 대종사께서 거처하셨던 곳으로 변산 봉래정사에서 익산총부로 오신 후 최초로 세워진 처소로 본원실뒷편에 있다.

본원에서 거주하시던 대종사께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시어 조실이라 부르고 옥호를 금강원이라 하였으며 원기22년 종법실로 옮기실 때까지 10여년동안 거처하시며 제자들을 지도한 곳이다.

 

종법실은 원기13년(1928) 5월에 건축하였으며 소태산 대종사께서 열반 전까지 일정하게 거처하신 곳이다. 건물앞에는 당시 소태산 대종사께서 손수 심으신 나무들과 말씀을 받들어 만들어진 정원이 있다. 이후 2대종법사인 정산종사께서 거처하였으며 현재 종법사는 바로옆 새로 신축한 건물에 주석하신다.

 

 

종법실마당 앞으로 하늘색 양철지붕의 공회당(公會堂)이 있다.

공회당은 소태산 대종사 당대의 공회당으로 국가등록문화재 제179호(2005.6.18), 원불교성적 제16호로 등재되어 있으며 원기14년(1929) 건축되어 대중 집회 및 유일학림(원광대 전신) 교실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툇마루 등이 부식된 상태이고 함석 목조7칸 겹집으로 대종사께서 친히 감역하셨으며 교단 초기교역자 양성소이나 교단 유물로는 지정되지 않았다.

 

건물의 기본구조는 일본식 목구조를 주로하고 부분적으로 전통 한옥기법을 이용했다.

일자형 장방 평면에 현관을 노출시키고 유리미서시문과 창호, 각재기둥, 처마끝의 함석차양 등이 근대주택의 일반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원불교 초창기의 대중 집회와 각종의식이 집행되었던 공간이며 여름, 겨울의 훈련때의 거주공간과 양잠실로 이용되기도 했으며 1956년에는 중앙선원, 1978년에는 상주선원이 개원되었고 재가출가 교육훈련이 이루어진 곳이다.

 

 해설사와 함께하는 시간이 약1시간정도 되는데 성지의 종소리, 바람소리를 느끼기에는 너무 촉박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둘러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고 감상하는 여유가 있어야 하겠다. 언제쯤이나 아이들같이 지금 이순간을 편안하게 즐길 수 있을까?

 

대종사 / 정산종사 성탑

전에 행사할때 성탑을 보았으나 참배객들이 많아 소란스러웠는데 오늘은 찬찬히 둘러봐야겠다. 성탑은 1949년 4월 25일 건립되었으며 1988년에 십상과 친필 사은, 게송을 조각하여 장엄하였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우리 반기는 대종사 성탑의 원석에는 개벽계성이시오, 집군성이대성이신 원각성존 소태산 대종사의 성해가 모셔져 있다. 대종사 성혼이 머문 집이라 할까! 여기서 조용히 두 손을 모두고 그동안 살아온 세월과 내 마음의 번민 그리고 소망하는 일을 모두 고해보자. 고향에 계신 아버지를 찾아 뵌 듯 그렇게 반갑게 다가서 지난 이야기를 고하다보면 세파에 찌든 마음의 떼가 말끔히 씻어지리라.

 

 성탑 주위에 새겨진 대종사 10상 부조를 참배하다보면 대종사의 코가 닳아서 유난히 빛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부처상의 코를 만지면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옛 속설을 믿는 사람들의 순박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대종사 성탑에 참배하는 인천교당 교도들

 

성탑 오른쪽 아래에는 대종사 성비가 있으며 이곳에는 대종사의 일대기가 새겨져 있다.

서기1891년 5월 5일 전남 영광군 백수읍 길룡리 영촌마을에서 탄생하시어 1916년 4월 28일 일원의 진리를 대각하시고 28년간 인류구원의 교화를 펴신 후 원기28년(1943) 6월 1일 열반에 드시기 까지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다. 비명은 정산종사가 지었고 원기38년(1952) 4월 26일에 세웠다.

 

성탑뒷편은 소나무가 울창한 숲같은 곳으로 산책을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소나무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걷다보면 깊은 산길을 걷듯 한가로움이 더하고, 그 길을 걷는 순간 그동안 가져온 모든 의문들이 사르르 녹아 없어질것만 같은 길이다.

소나무숲 뒷편으로는 상주선원, 여자요양원, 원광사가 자리하고 있다.

 

 

대종사 성탑 바로 아래에 세워진 비명을 읽어본후에는 정산종사 성탑을 참배한다. 정산종사 성탑은 원기56년(1971) 10월 7일 중앙총부 영모전 서편에 세웠다가 원기73년(1988) 11월 8일 현재의 탑으로 재조성하였다.

 

 

 

정산종사님의 업적과 생애를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비명(碑銘)은 대산종사께서 지었으며 탑뒷편에는 삼동윤리사상을 형상화하였고, 대종사와 정산종사의 만남인 화해제우상, 친필 등을 조각하여 장엄하였다.

 

 

성탑을 참배하고 영모전광장으로 가는 길에 송대(松臺)

 

 

송대는 뒷길에 있어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곳으로 이길은 성가에도 나오는 오솔길다.

원기26년(1941)에 건축하였고 소태산 대종사님의 휴양과 원불교 정전집필이 이루어진 곳이며 교단의 기관지인 원광의 산실이기도 하다. 원기47년(1962) 정산종사님의 성해가 성탑 조성전에 송대에 임시로 안치하였다.

 

 

곳곳에 나 있는 오솔길을 걷고 송대의 솔 숲향을 맡으면 자연스럽게 그 고요함과 경건함에 머리가 숙여지고, 자신을 되돌아 볼 시간을 갖게 된다. 이런 게 바로 불공이요, 명상이 아닐까?

성지를 찾는 것 자체가 어쩌면 구도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영모전광장

송대를 지나 영모전 광장으로 나간다. 하늘과 땅이 넓게 펼쳐지는 뜰에 서면 절로 마음이 툭 트일 것이다. 가는 길에 마음을 씻는다는 세심천에 들러 물 한 모금 마시며 하늘 한번 올려다보는 것도 좋을 듯.

광장에는 영모원과 중앙박물관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영모전(永慕殿)은 원기56년(1971) 10월에 개교 반백년 기념사업으로 세웠으며 실내에 4단의 불단을 조성하여 소태산 대종사님이하 역대 선영열위의 법은을 추모하기 위하여 위패를 모신곳이다.

위패는 대종사님 이외에는 공동위패를 봉안하였으며 매년 6월 1일(육일대재)과 12월 1일(명절대재)에 향례를 올리고 있다. 불단 좌우에는 작은 불단이 조성되어 있어 재를 지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곳에서 해설사와 함께하는 시간은 끝이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고향을 찾아오지만, 정작 머물 시간도 없이 허겁지겁 떠나기에 바쁘다. 우리 일행도 하루에 순례, 종법사님배알, 상사원방문을 소화하느냐 마찬가지였다. 진정 마음고향을 느끼고픈 사람이라면 2~3일 정도 머물 수 있는 여유로움을 가지고 중앙총부를 찾아가면 더 없이 좋을 듯 하다.

 

원불교 중앙박물관

대종사 탄생백주년 기념사업으로 건립된 ‘소태산기념관’ 1150.6㎡(1층 826.7㎡, 2층 323.9㎡)과 정산종사 탄생백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세워진 ‘역사박물관’ 1270.6㎡(1층 717.8㎡, 2층 552.8㎡)을 2층에서 서로 이어 하나의 큰 공간(총 2421.2㎡)으로 ‘원불교 중앙박물관’으로 새롭게 조성되었다.

 

 

'원불교 중앙박물관'은 원불교 정신을 계승·발전시키는 전시관, 교리를 이해시키고 체험시키는 전시관, 미래지향적 비젼을 제시하는 전시관으로 구성되어있다.

 

 공간적으로는 교육의 장으로써 교육관은 열린공간으로 원불교의 이해를 돕는 탄백실과 기획전시를 하는 보은실, 그리고 정보검색·휴게코너가 일반인과 교도를 위해 개방된 공간으로 계획되고 있으며, 이해의 장으로써 전시관(구도과정실, 창립정신실, 봉래제법실, 신룡전법실, 삼동윤리실, 일원세계실)은 원불교 역사를 전시하여 창립과 교화 발전의 역사를 흐름속에서 원불교 교리가 지니고 있는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며, 만남의 장으로써 기념관은 대종사의 평소 사용하던 생활유품을 중심으로 전시함으로써 대종사의 생활속에 스며든 검소한 생활철학과 원불교 정신을 체험토록 계획하고 있다. 이로써 중앙박물관의 전시를 통해 순례하는 교도 및 일반인들에게 원불교의 이해, 교리의 전파, 교육의 장 마련,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기대효과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유물을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해서 수장고를 설치토록 했으며, 유물의 종류에 따라 달리 보관할 수 있도록 일반유물수장고와 특별유물수장고, 그리고 문서수장고를 마련, 전시 및 입출 등의 일부기간을 제외하고는 전체의 시간을 수장고에 보관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광장 주위를 빙둘러 학림사, 보은원, 청하원이 자리하고 있고 박물관 뒷편으로는 원불교대학원대학교, 수도원, 은적당이 있다. 
 

원불교 교무가 되기 위해서는 출가 서원을 세우고 원광대나 영산선학대의 원불교학과 과정을 이수해야 하고 만68세가 되면 현직에서 퇴임을 하고 중앙수도원에서 내생을 준비하는 수도정양을 하게 된다.

 

서원관은 연방죽의 들판에 5층, 1,500평 규모로 남기숙사인 학림사와 여기숙사인 정화원으로 되어 있고 학생들이 공동 수행생활을 하며 교수교무도 같이 생활하는 곳이다. 기존수도원 뒷편에는 중앙수도원본관이 2,000여평의 건평에 4층규모로 건립되었다.

 

선후배가 함께 생활하면서 알게 모르게 서로의 서원을 북돋아주고 같은 서원으로 함께하는 동지들이 있기 때문에 서원이 점점 채워져 간다. 예전의 정화원은 방과 복도는 좁고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간이 많아서 서로가 부딪끼는 시간이 많았으나 서원관은 넓어 공동공간이 상대적으로 적어 함께 북적대면서 느낄 수 있는 재미가 사라졌다고 한다. 

 

원광대학교는 총부정문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어 학교까지 걸어가기는 상당히 먼길이다.

 

원불교 익산성지 연방죽

대자대비의 꽃
지난 1일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 두 번째 비상 시국미사를 하던 날이었다. 이 날 저녁에 미사를 마치고 거리 행진을 하던 수녀들의 손에는 촛불과 함께 흰 백합화가 손에 들려져 있었다. 수녀들이 들고 나선 백합과 촛불은 촛불과 함께 연꽃을 형상화한 불교의 연등(蓮燈)을 연상시켰다. 그 후 촛불집회에는 촛불과 함께 꽃을 든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촛불과 장미. 촛불과 원추리. 촛불은 그 어떤 꽃과도 잘 어울렸다.

백합은 기독교의 꽃이다. 예수의 사랑과 박애를 표현한다. 수녀들은 꽃으로 예수의 사랑과 박애를 말하려 했던 것 같다. 촛불과 백합은 어떤 언어보다 더 강하고 더 향기로웠고 더 아름답게 어필됐다. 백합이 기독교의 꽃이라면 연꽃은 불교의 꽃이다. 석가모니의 언어이고, 석가모니의 대자대비(大慈大悲)를 표현하는 기호이다.
원불교의 여자교무들이 꽃을 들고 거리에 나선다면 무슨 꽃이 어울릴까? 흰 저고리 검은 치마와 함께 어울리는 꽃을 한동안 그려 보았다.

 

마음은 연꽃처럼

지금은 연꽃철이다. 원불교 중앙총부의 서문 밖 연 방죽에는 백련화가 만발했다. 정화원로수도원 앞이고 서원관 뒤쪽이다. 연꽃 향기는 꽃 가까이에 코를 들이대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대여섯 발자국쯤 멀리 떨어졌을 때에야 향기는 비로소 진하게 풍겨져 온다. 은은하면서 시원하고 멀리 가는 향기다. 연방죽에서 서쪽으로 두어 마지기 논을 건너면 철길이다. 철길에서 중앙총부 쪽을 보자면 '모두가 은혜입니다'라는 입간판이 크게 들어온다. 기차 속 승객은 그 입간판을 보며 "아하! 이곳이 원불교 총부인가 보다"하고 생각하게 된다.

연꽃 철이면 기차 속의 승객들도 향기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말인데 지금도 연방죽이 크긴 하지만 이왕이면 철길 옆 두어마지기 논까지 연꽃밭이라면 좋겠다. 누군가가 기차 속에서 연꽃향기로 흠뻑 취하는 일이 있다면 아주 특별한 인연이지 않겠나. 승객이든 혹은 승무원이든 스치고 지나가면서 보았던 하얀 연꽃의 기억이 마음 한 켠에 머물러 있다가 어느날 문득 그리워져 연꽃을 만나러 오는 일이 있다면 얼마나 환상적이고 시(詩)적인 인연이겠나.


'섭섭하게, / 그러나 / 아주 섭섭지는 말고 / 좀 섭섭한 듯만 하게 // 이별이게, / 그러나 / 아주 영 이별은 말고 / 어디 내생에서라도 /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 연꽃 만나러 가는 / 바람 아니라 /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엊그제 /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 한두 철 전 /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서정주 시,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전문)

   
 


수도원에서는 창문을 열고 연방죽을 내다보는 이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제각기 그윽한 꽃향기를 방안으로 불러들이고 있었다. 아예 방죽으로 나와 길가 언덕에 앉아 가까이에서 향내를 맡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40대쯤 됐나? 한 아주머니가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개구리처럼 폴짝폴짝 방죽가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올해엔 유달리 꽃이 많이 피었다. 방죽의 꽃은 지금이 청년기이다. 꽃이 싱싱하고 백옥 같고 눈부시고 탐스럽다. 연꽃은 꽃이 피기 시작하면서 열매를 동시에 맺는다. 앳된 꽃봉오리로 미끈하게 솟아올라 먼저 핀 꽃을 향해 합장을 하는 놈이 있는가 하면, 꽃잎을 하나 둘 벗어 제끼고 초록색 연밥통을 드러내는 놈이 있다. 노란 꽃술을 툭툭 뿌리며 막 드러난 초록색 연밥은 구멍이 뻥뻥 뚫린 솥 위의 시루같다. "부우웅 붕붕." 황소개구리 소리인가. 못 한 가운데에서 들리는 소리다. 둔중하면서 경쾌한 트럼펫소리로 연방죽의 향기를 흩어 놓는다. 살이 피둥피둥 찐 거위란 놈도 연방죽에 산다는데 몇일째 찾았지만 그 놈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누가 잡아 갔나?"
연꽃은 넓은 이파리를 사이에 두고 이파리 위의 세상과 이파리 아래 세상을 구분한다. 꽃이 핀 이파리 위의 세계는 정토(淨土)이고 이파리 아래세계는 예토(穢土)다. 정토는 연꽃으로 맑고 향기롭지만 예토는 갖가지 곤충들로 소란스럽다. "앗. 뱀까지." 둑에 있던 초록색 뱀이 몸을 말리다가 말고 연잎 아래로 스믈스믈 기어가 몸을 숨긴다. 연밭에 갑자기 소나기가 내린다. 빗물이 연잎 위에 구슬처럼 또르르 구르다가는 툭툭 미끄러져 예토에 떨어진다. 연꽃의 이러한 모습을 처염상정(處染常淨)이라고 말한다. "뿌리는 비록 진흙물 속 진세에 있지만 꽃과 이파리는 물에 젖지 않는 청정한 정토(淨土)에 있다."
'몸을 티끌세상에 처하신 대로 / 마음은 연꽃처럼 맑히시었고 / 살림을 한 가정에 머무신대로 / 공덕은 이 회상에 쌓으시었네'
원불교 성가 <거친출진가>라는 노랫말이다. 거진출진(居塵出塵)이란 재가교도를 말한다. '진세(塵世)에 거주(居住)하면서 진세(塵世)를 벗어난 이'다. 노랫말 그대로 연꽃과 같은 삶을 사는 이다.

 

대종사 성탑이 연꽃 속에

연꽃을 두고 석가모니와 가섭 사이에 일어난 염화미소의 일화는 유명하다. 석가모니가 영산에 있을 때다. 범왕이 부처님께 금바라화를 바치면서 설법을 청했다. 금바라화는 연꽃으로 알려져 있다.
부처님은 설법대신 갑자기 범왕으로부터 받은 그 꽃을 대중에게 들어 보였다. 모두가 어리둥절했다. 부처님이 왜 연꽃을 든 것일까? 그러나 가섭만이 대중 속에서 빙그레 웃었다. 석가모니가 말문을 열었다. "나에게 정법안장의 심심미묘한 열반법이 있는데, 이를 마하가섭에게 전하노라."
염화미소의 이야기는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여러 선서에 인용되면서 선종의 대표적인 화두(話頭)가 됐다. "석가모니는 왜 꽃을 들었고 가섭은 왜 빙그레 미소를 지었나?"
불교에서 연꽃으로 비유되는 일화들은 매우 많다. 경전 중에서도 <묘법연화경>의 연화나 <화엄경>의 화엄은 연꽃을 의미한다. 부처님의 세계는 연꽃으로 장엄되어 있다는 이야기이다. 장미나 백합과 같은 하고 많은 꽃들이 한 여름에 피고 지지만 부처님의 꽃밭에 핀 꽃은 연꽃이다. 사시사철 연꽃이고 천년이나 2천년이 지난 뒤에도 연꽃이다.
원불교 불단장엄에는 딱히 정해져 있는 꽃은 없다. 하지만 총부 송림의 대종사 성탑과 성비는 온통 연꽃문양으로 장엄되어 있다. 성탑기단의 네 면석이 연꽃으로 새겨져 있고, 원형의 탑신을 받친 탑좌와 탑머리 부분이 연꽃이다. 성탑을 둘러싸고 있는 6개의 석등이 연꽃이고 각 모서리마다 세워진 기둥이 연꽃형상이다.
또 성탑의 오른 쪽에 있는 대종사의 성비를 받친 방부(方趺)는 네 단의 네모 대석으로 세워졌는데, 각 대석에는 돌려가며 연꽃이 새겨져 있다. 대좌 위의 비좌(碑座)는 큰 연꽃이다. 또 비신에 씌워진 화관석도 만개한 연꽃으로 그려져 있다.


연꽃공책

△아침에 백련꽃을 딴다. 만개하지 않은 꽃이어야 한다. 연꽃은 첫날 피는 꽃이 향도 좋고 싱싱하다.
△연꽃을 따서 마르지 않게 연잎에 싸서 가져 온다.
△연꽃 송이에 조심스럽게 녹차를 넣는다.
△녹차를 넣은 연꽃을 연잎에 넣고 싼다.
△연잎에 쌓인 백련꽃향차를 호일에 싸서 비닐 봉지에 넣고 숙성시킨다음 냉동고에 보관한다.
△귀한 손님이 오면 연꽃향차를 내 놓는다.

 

   
 

▲ 태안에서 연꽃축제 18일 열려
기름유출 사고의 어려움을 극복해가고 있는 충남 태안군의 한 수목원에서 연꽃축제가 열린다. 장소는 남면 신장리 청산수목원으로 오는 18일부터 내달 중순까지이다.
이번 축제에는 흰색 버드나무 무리가 감싸고 있는 청산수목원 9만9천200㎡에서 백련과 홍련, 노랑어리연, 가시연 등 200여종의 수련이 갖가지 모양과 색깔을 뽐내게 된다. 수목원내 예연원에는 수질정화 능력이 뛰어난 부처꽃과 부레옥잠, 물양귀비 등 100여종의 수생식물과 섬말나리, 홍가시, 노각나무 등 300여종의 야생화와 나무들이 선보인다. 또 연꽃과 연잎 등을 이용한 4종의 차와 연 아이스크림, 연잎칼국수, 연콩국수, 연부침, 연밥 등을 맛볼 수 있는 음식코너도 운영된다.

 

/ 원불교신문 2008년 07월 11일 이진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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