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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전라남도

강진 829번지방도 파산리 금곡사

by 구석구석 2008.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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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리 967 금곡관광농원 061-433-5478, 011-9666-7881

 강진에서 금곡사방면(지방도 829번)으로 7∼10분 거리

 “모란이 피기까지”의 시인 김영랑의 숨결이 살아있고 “천년의 신비”을 간직한 고려청자의 최대 생산지이자 조선실학의 최고봉 다산 정약용 선생의 개혁정신이 서려있는 이곳 강진의 금곡산 자락에 음식좋고 경치좋은 명소가 있으니 바로 금곡관광농원이다. 금곡관광농원은 강진 8경 중의 하나인 금곡산으로부터 2∼3분거리에 있으며 수십년 동안 만여평의 땅에 박동수 사장이 정성들여 가꾼 정원수와 나무들이 빼곡히 갖가지 형상을 하고 서 있어 가족단위 관광과 야외 결혼식에 알맞다.

 

 

파산리 산143  금곡사 061-433-3407

강진읍에서 작천면으로 넘어가는 까치내재에 이르면 마치 중세시대 성벽을 마주하는 것처럼 거대한 석문으로 가로막혀 계곡 안으로 들어서지 않고서는 그 흔적조차 짐작할 수 없는 금곡사라는 오래된 사찰을 발견하게 된다. 신라말 밀봉대사는 이 절을 지으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사찰이름인 성문사라 했고 나중에 금곡사라 개칭했다. 이 사찰 금곡사라 한 것은 이곳에 금광이 있었기 때문이며 사찰 옆 개울가에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굴이 있는 것을 보면 이곳이 금광이었던게 사실인 것 같다.

 

금곡사에는 백제계통의 고려양식인 보물 829호 삼층석탑이 있는데 1985년 복원작업을 하던 중 석가세존 진신사리 32과가 발견되어 세상의 이목을 받기도 했다.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물의 양이 일정한 약수터에서 풀로 만든 대롱으로 물을 빨아 먹으면 신경통이 사라진다는 전설이 있기도 하다.

 

아마도 임진왜란 때 왜구를 격파한 이 고장 출신 김억추장군의 전설에서 비롯된 것일 것인 것 같다. 금곡사 답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방랑시인 김삿갓이 금곡사에 남겼다는 시 한 수 이다. '오늘도 걷는다마는/정처 없는 이 발길 /지나 온 자국마다 눈물 고였다' 아무도 없으려니 하고 다리도 쉬어 갈 겸해서 김삿갓 시비(詩碑) 밑에 철퍼덕 앉아 가수 배호의 '나그네 설음'을 나지막이 부르고 있으면 우두봉에서 하산하시던 60대 어르신이 '허 젊은 사람이 그런 노래도 안가?' 하시며 하늬바람에 감긴 게눈처럼 '씩' 농을 건넨다는 고향의맛이 물씬나는 곳이다.

 

雙岩竝起疑紛爭 / 一水中流解忿心 (두 바위가 나란히 솟아 다투는가 여겼는데 한 줄기 물 가운데로 흘러 성낸 마음 풀어주네) 방랑시인 김삿갓이 금곡사에 남기고 간 이 열 넉자의 시는 정처 없는 나그네들의 발길을 잡아맨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서 금곡과 외부세계를 격리시킨 거대한 쌍바위를 '의심하는 마음'이라 하고, 더디 흐르지만 그 틈을 헤집고 흐르는 작은 개울물은 '도피를 끝내고 중생의 세상'으로 구도의 길을 떠난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아마도 젊은 날의 김삿갓은 삿갓 위 세상에 대한 동경과 분노로 가슴에 품었고 그 후엔 도피와 체념으로 그리고 귀밑머리가 새어지고 나선 하늘을 감히 쳐다 볼 수 없었던 자괴감으로 일생을 마쳤으리라. 성철스님은 '이 뭐꼬?'라는 말로 화두를 풀어내면서 동정일여(動靜一如 화두라는 의심덩어리가 오나가나, 앉으나 서나, 말할 때나 묵언(默言)할 때나, 조용하거나 시끄럽거나 상관없이 머리 속에 가득한 마음의 경지)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한다. 끝없이 의심하라는 말이라고 한다. 아마도 신라 말 밀봉대사가 금곡에 사찰을 세운 것은 화두를 벗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기를 바라는 불제자들의 염원처럼 이곳의 지형이 '의심의 벽을 뚫고 흐르는 진리의 물줄기'를 닮았기 때문이 아닐까? "모든 사람이 이해하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다. 무한정진 끝에 진리는 밝혀지는 것이다. 우리가 너무 진리를 쉽게 알고자 하는데 이것은 지혜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천관사를 찾는 이들은 다짐하여야 한다.

나를 의심하고 또 의심하자. 빠르게 보지 말고 천천히 느끼자. 이렇게 보이는 것들을 느리고 찬찬히 느끼다 보면 빠르게 살며 놓쳐 버린 소중한 추억과 간직하고 가야 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분명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보물 제829호 / 1985년 1월 8일 지정  삼층석탑

이 석탑은 기단중심석의 전 후 측면에서 각기 1매씩의 판석이 유실된 상태였고 갑석에서도 부분적으로 파손되어 원형의 모습을 잃은채 보존되어 왔었다. 그러던중 1988년 6월 10일 부터 6월 23일 까지 약 2주간 해체 복원공사를 실시하였으며, 이때 3층탑신에서 세존진신사리 32과가 발견되어 이 탑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이 석탑은 3층석탑으로서는 5m가 넘는 거탑이며, 그 형식면에서는 전형적인 고려양식을 고수하면서도 기단부 구성이나 옥개석의 우동마루 등 일부에서 약간 백제계 석탑의 분위기가 가미되고 있다. 

금곡사3층석탑/한국관광공사

조성연대는 고려초반기로 추정된다. 1층 옥개석은 4개의 석재로 결구하였고 비교적 두꺼운 편으로 처마 곡선이 밋밋하여 전각의 반전 또한 완만하다. 층급 받침은 통례(通例)와는 달리 6단이며 옥개석 상면은 1단 탑신에서와 같다. 2,3층 옥개석은 모두 두 개의 석재로 결구되었고 하면의 받침은 2층이 5단, 3층은 4단으로 줄었다. 3층 탑신 역시 각면 모서리에 모서리 기둥없이 편평하게 처리하였다. 상륜은 모두 유실되고 없다.

이 탑은 전반적으로 보아 단층 기단이면서 기단부나 탑신부 각 면에 모서리 기둥없이 편평하게 처리된 점이라든가 또는 층급 받침이 일률적이 아닌 6, 5, 4 단으로 된 점 등은 정형을 따르지 않고 있으나 탑의 각 부재에 있어서의 규율성, 전체적인 체감율 등은 매우 알맞아 안정감이 있다. 또 1층 탑신이 두 개로 포개진 예는 광주 서5층 석탑(보물 제109호)이나 장성 내계리 5층 석탑(지방 유형 131호)등에서 볼 수 있어 이 탑의 조성연대는 고려 시대로 추정된다. 한국관광공사 20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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