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방방곡곡/서울 한강

서울 청운동 북한산성 숙정문 북악스카이웨이

by 구석구석 2008. 1. 10.
728x90

 

 

 

서울 종로-북악스카이웨이 성락원

한성대입구역~북악스카이웨이~부암동 ●거리: 8.3㎞ ●시간: 약 3시간 ●출발점: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입구 ●도착점: 종로구 부암동 부암동 주민센터. 주민센터 앞 버스정거장에선 0

blog.daum.net

 

시민 품으로 돌아온 북악산 비경

서울 북악산의 숨어있던 비경인 숙정문(肅靖門)이 철조망을 걷고 시민 곁으로 돌아왔다. 문화재청(청장 유홍준)은 8일 오후 사적 제10호 서울 성곽 중 비공개로 남아있던 숙정문과 부근 숲길을 2006년 4월1일부터 하루 150명씩 일반에 제한 공개한다고 발표했다.

곡장에서 보이는 광화문일대 전경

남대문.동대문과 함께 북대문으로 불리던 숙정문은 1395년 조선 태조 때 처음 쌓은 서울 사대문의 하나다. '숙정'은 '엄숙하게 다스린다'는 뜻을 담고 있다. 북쪽을 물로 보던 음양오행설에 따라 가뭄이 심할 때 숙정문을 열고 홍수 때 문을 닫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나 실제 쓰임새보다 상징적인 문이었다.

 

숙정문은 1968년 당시 1.21 청와대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후 군사보호지역으로 묶여 37년 동안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는 금단의 땅이 됐다. 40년 가까이 사람 발길을 타지 않아 싱싱한 소나무 군락과 천연 숲이 잘 보존된 결과를 낳았다. 8일 언론에 먼저 공개된 숙정문 일대는 서울 삼청터널 위 홍련사에서 출발해 숙정문을 거쳐 촛대바위로 이어지는 1.1㎞ 구간으로 서울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천혜의 전망대다.

 

청운대 쉼터에서 곡장 전망대에 이르는 300m 구간의 성벽 외측 탐방로가 개방

정기용 문화재 위원은 "이곳에 올라 서울시를 내려다보면 저절로 서울에 대한 사랑이 끓어오를 만큼 아름다운 곳"이라고 감탄했다. 문화재청은 2006년 숙정문 개방을 계기로 서울 성곽과 궁을 묶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역사도시' 등재 방안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나만 다니는 길을 시민과 함께 나누겠다”는 청와대 측의 배려로 지난 4월 1일부터 개방된 북악산 숙정문 산책로. 지난 1968년 1·21사태 이후 38년 만에 개방된 점, 광화문과 방향이 틀어진 경복궁 근정전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 남산 맞은편에서 바라보는 색다른 시내 전망 때문에 청와대 뒷산 개방은 진작부터 시민들의 이목을 끌어왔다.

 

그러나 막상 가보니, 기대 이하였다. 삼청각 입구에서 촛대바위까지 약 1.1km 구간, 들어가려면 문화재보호재단과 군부대의 신원 확인부터 거쳐야 한다. 개방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2시간 간격으로 하루 4회. 1회 관람 인원은 최대 100명이다.

 

신원 확인을 마치면 문화재청 문화해설사와 군부대 관계자의 뒤를 따라 철조망을 넘는다. 철조망을 넘으면 나무 데크로 만든 탐방로. 예전에 노무현 대통령이 산책하던 시절에는 이 데크 탐방로가 없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트레일 덕에 힘은 덜 들었지만, 왠지 숲에서 느낄 수 있는 멋은 사라져버린 기분이다. 철조망을 넘은 지 100m 남짓, 곧바로 숙정문의 지붕이 보인다. 이정표에는 입구에서 숙정문까지 550m라고 표기돼 있지만, 데크 때문인지 한걸음이다.

 

숙정문의 푸른 지붕 밑으로 아직 초록을 입지 못한 앙상한 나뭇가지만 걸쳐 있다. 하지만 어김없이 봄소식을 전하는 진달래 몇 송이가 황량함을 덜어준다. 보름 정도만 더 있으면 이 골짜기도 제법 녹음과 연분홍 꽃잎으로 뒤덮일 것 같다.

 

숙정문에 다다르자 문화해설사의 설명이 이어진다. “서울에는 4대문과 4소문이 있는데, 숙정문은 4대문의 하나로, 원래 숙정문은 통행을 위한 문이라기보다는 국방의 의미를 둔….” 

 

문화재청 산하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숙정문 개방을 앞두고 네 명의 문화해설사를 채용했다. 하지만 특별한 교육 없이 현장에 바로 투입돼서인지  해설은 그다지 매력 있지 않았다. 한 문화해설사에 따르면  “따로 교육은 없었고, 문화재청에서 준 자료를 바탕으로 스스로 공부했다”는 게 전부.

 

조선  태종 때부터 가뭄이 들면 숙정문을 열고 남대문을 닫았고, 홍수가 나면 숙정문을 닫고 남대문을 열어놓았다 한다. 풍수지리학적으로 수도 서울의 음양을 조절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숙정문관람

 

관람 시간 1일 4회(10:00 12:00 14:00 16:00)
관람 코스 삼청각(홍련사) 입구 ▷숙정문 ▷촛대바위
대중교통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승차 후 성북동(명수학교, 종점)에서 하차. 도보 10분.
인터넷 예약 신청 문화재청(www.cha. co.kr) 홈페이지를 통해 예약. 평일 관람은 대기 시간 없이 신청할 수 있다.

 

북악산 북측면의 성곽
 

남북으로 막힌 서울 성곽

 

숙정문에 다다르자 이제야 서울 성곽이 나타난다. 숙정문을 통과해 북쪽으로는 능선을 타고 북악산으로 이어지고, 남동쪽으로 내려가면 동대문이 나타난다. 그러나 아래쪽 성곽은 여전히 거친 철조망으로 싸여 있다. 서울시와 문화재청은 20km에 달하는 서울 성곽을 수년 내에 완전 개방한다는 계획인데, 그때나 돼야 북악산~동대문 성곽길이 열릴 것 같다.

 

숙정문을 넘어 오른편으로 성곽을 끼고 올라가는 소나무 산책로가 0.5km 정도 이어진다. 성곽의 모양새는 성북동, 낙산, 창의문 주변에 있는 것들과 똑같다. 1961~1963년에 해체 수리한 것으로 어른 키 정도 되는 높이에 중간에 구멍이 뚫려 있다.

 

듬성듬성 자리한 소나무 사이를 10여 분 올라가니 이내 길이 막힌다. 북악산 정상까지는 아직도 1km  이상 남았지만, 개방되는 구간은 여기까지다. 앞을 가로막은 차단막 옆으로 촛대바위가 보인다. 해설사는 “북악산 정상에서 보면  밑부분 암벽이 돌기둥처럼 솟아 촛대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그러나 탐방로에선 평범한 바윗덩어리일 뿐이다. 더구나 이 바위는 접근이 허용되지  않아 멀찍이 떨어져서 봐야만 한다.

 

촛대바위 아래 만들어놓은 전망대에선 시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특히 남산을 넘어 관악산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게 색다르다. 뿌연 황사가 아니었다면 서울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었을 게다.


이날 등산복에 배낭까지 메고 촛대바위에 오른 한 탐방객은 “단단히 준비하고 왔는데 볼 만한 풍경이 별로 없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관람 시간도 홈페이지에는 1시간 30분이라고 적혀 있지만, 1.1km  탐방은 실제로 한 시간 내에 끝이 났다. 특히 이날은 군부대와 경찰서 간부들의 ‘왕림’이 줄을 이었는데, 때문에 본지 취재팀을 비롯한 기자들이 황급히 ‘소개되는 ’ 일도 벌어졌다.

 

북한산과 북악산은 예로부터 이성계가 사랑했던 산. 풍수전문가에 따르면 ‘야망이 깊은 사람들이 이런 악산(嶽山)을 좋아한다’고 한다. 아쉬움을 창의문 성곽 유람으로 달랬다. 삼청각에서 택시를 타고 3호선 경복궁역으로 내려와 212번 버스를 타면 창의문 앞까지 간다.

 

유명한 손만두집 간판이 보이고, 음식점 바로 아래작은 골목길. 이곳이 창의문으로 가는 통로다. 창의문 앞에 이르면 바닥에 깔린 돌 틈 사이로 돋아난 들풀이 인적이 드문 곳임을 말해준다. 문 안으로 들어서면 아주 조용한 공간이 나오는데, 거대한 나무 아래 벤치가 ‘ㄱ’자 모양으로 놓여 있다. 주변은 자동차 소리가 난무하지만, 벤치에 앉아 있으면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서울 성곽의 유적 

서울 성곽(사적 제10호) 

조선 건국 초 태조 4년(1395)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성곽을 쌓도록 했다. 석성과 토성으로 쌓은 성곽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동의 흥인지문·서의 돈의문·남의 숭례문·북의 숙정문, 4소문은 동북의 홍화문·동남의 광희문·서북의 창의문·서남의 소덕문을 말한다. 동대문에만 성문을 이중으로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쌓았다.

 
 
 
숙정문(肅靖問)
 

숙정문(초기엔 숙청문이라 불림)은  1396년에 완공됐으나, 당시 풍수학자 최양선이 “동쪽과 서쪽 봉우리는 경복궁의 양팔과 같아 닫아두어야 한다”고 건의, 1413년에 폐쇄된다. 이후 1504년(연산군 10)에 동쪽으로 약간 옮겨 석문만 세워 숙정문이라 불렀다. 가뭄이 심하면 음의 기운이 강한 숙정문을 열어 비를 기원했으며, 장마가 심하면 닫았다.



 
 
창의문(彰義門)
 

1396년 세운 문으로, 돌로 쌓은 홍예(虹霓) 위에 정면 4칸, 측면 2칸 구조의 문루가 있다. 북대문인 숙청문이   닫혀 있었으므로 경기도 북쪽으로 통행하는 사람들은 이 문을 거쳐서 왕래했다. 인조반정 때 능양군을 비롯한 의군(義軍)이 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 반정에 성공한 유래가 있는 곳으로, 누문 다락에는 인조반정 공신의 명단을 적은 게판(揭板)이 있다.

 

 

북한산성은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할 때 도성을 지키는 북방의 성으로 백제 개루왕 5년(132)에 축성되었다. 이 때 백제의 주력군이 이 성에서 고구려의 남진 세력을 막았다. 그 후 근초고왕의 북진 정책에 따라 북정군의 중심 요새가 되었다.

 

그러나 개루왕 21년(475)에 강력한 고구려군이 북한산성을 7일간 공격하여 치열한 공방전 끝에 성이 함락되자 백제의 도성도 유린되어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군에 잡혀 살해당했다. 이 싸움으로 인하여 백제는 공주 웅진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연합 전선으로 막았다. 진흥왕 14년(553)에 신라는 백제의 영토였던 한성 지역을 신라의 영토로 빼앗았다.

 

진평왕 25년(603) 8월 고구려 장군 고승이 신라의 북한산성을 포위 공격하자 신라 진평왕이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였으며 무열왕 8년(661) 5월 고구려 장군 뇌음신이 말갈 장군 생개와 더불어 북한산성을 20일간 포위 공격하여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이때 북한산성 성주 동타천은 성 내 주민을 합한 2,800명의 인원으로 필사 결전을 감행하여 이 산성을 방어하였다. 당시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후 백제 부흥군이 일어나 곤란에 빠졌던 시기로 만일 북한산성이 고구려에게 함락되었다면 신라의 삼국통일 판도가 바뀌었을지도 모를 중요한 싸움이었다. 성주 동타천은 이 전공으로 대사에서 대내마에 승진되었는데 이 싸움을 삼국사기는 크게 기록하고 있다.

 

1232년 고려 고종 때는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고려 현종은 글안의 침입을 피하여 이 성에 고려 태조의 신궁을 옮겨왔던 일도 있었다. 이때 성의 중축이 있었고, 1387년 고려 우왕때 개축공사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와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등 외침을 자주 당하자 도성의 외곡성으로 축성론이 일어나고 711년 숙종 3년 왕명으로 대대적인 축성공사가 시작되어 7,620보의 석성이 완성되었다. 당시 성의 규모를 보면 대서문과 동북문, 북문 등 13개의 성문과 시단봉상에 동장대, 나한봉 동북쪽에 남장대 중성문 서북쪽에 북장대가 있었고 중흥사는 136간의 대사찰이 있었다. 그리고 성내에는 99개소의 우물과 26개소의 저수지가 있었다.

 

숙종때 군제를 보면 수성대장에 영의정이 겸하고 훈련 어영 금위의 삼군문이 모두 배치되었다. 지금도 대서문이 복원되어 남아 있고 성곽의 여장이 부분적으로 허물어져 있으며 성의 모습은 완전히 보존되어 있다. 최근 대성, 대남, 대동문 등의 외곽성을 비롯해 내성인 중성문도 복원되었다.

/ 자료-경기관광공사

 

○코스

- 산성 입구 → 대서문 → 약수암 → 백운대 → 우이동, 정릉, 수유리,구기동 등 (8km, 4시간 소요)

- 산성 입구 → 노적사 → 태고사 → 대남문 →구기동 (10.5km, 5시간 소요)

- 산성 입구 → 자연보호헌장비 → 의상봉 → 용출봉 → 청수동 암문 → 대남문 (6km, 3시간 소요)

- 삼천리골 → 삼천사 → 비봉 → 탕춘대성 → 홍제동, 세검정, 신영동 (12km, 5시간 소요)

- 진관사 → 응봉 → 비봉 → 구기동 (9km, 4시간 30분 소요)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