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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상북도

봉화 915번지방도 석천정 청암정 삼계서원 닭실한과

by 구석구석 2007.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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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봉화군 915번지방도로 삼계/유곡/거촌

 

 

문수산을 분수령으로 남서류하는 창평천과 닭실의 뒤에서 흘러내리는 동막천이 유곡 앞에서 합류하여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이곳을 흘러 석천이라 하였다. 석천계곡은 맑은 물과 울창한 송림, 기암괴석들로 이루어져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석천정자가 있어 더욱 고아한 분위기를 주며 많은 인파가 찾고 있는 명소이다. 석천계곡과 가까운 거리에 권씨종가와 청암정 및 삼계서원, 충재유물전시관 등 조선시대 유교문화 유산이 산재해 있으며 봉화군에서는 이일대에 사적공원조성사업을 추진중에 있다.

 

석천정은 충재선생(권벌)의 장자 청암 권동보가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석천계곡에 지은 정자로 주위환경과 어울려 더욱 고아한 분위기를낸다.

 

유곡(닭실마을)은 1380년 충재 권벌선생의 선조가 처음 개척한 곳으로 마을모양이 풍수지리상 금계포란형의 지세라 닭실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닭실마을은 충재 권벌선생의 후손들이 500여년간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온 본터로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이곳 닭실마을과 석천계곡 일대가 사적및명승 제3호 "내성유곡권충재관계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청암정은 조선 중종때의 문신 충재 권벌선생의 유적지로 종가 우측에 위치하며 거북바위 위에 건립되었다. 정자 둘레로 물이 흐르고 그 밖은 나무울타리가 쳐있으며 동.남.북쪽으로 3개의 문이 있으며 정자 1동외 충재선생이 공부하던 별체가 있으며, 바로 옆 종가건물 마당에는 충재유물 전시관이 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청암정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별서 정원」이라 했다. 널찍한 마당 한쪽에 따로 담을 둘러 만든 청암정은 거북이 모양의 튼튼한 암반위에 지어진 정자이다. 충재선생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큰아들 권동보와 함께 청암정을 지었다고 한다. 넓은 암반 위에 지어진 정자는 느티나무·향나무·단풍나무 등과 어우러져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간접적으로 느끼게 한다.
 

 

본채에서 떨어져 있는 靑巖亭은 선비들의 올곧은 정신을 느끼게 한다.월간조선

충재선생은 바위를 평평하게 다듬지 않고 자연 그대로 살려 주춧돌과 기둥의 길이를 조절하여 정자를 지었다. 그로 인해 위치에 따라 정자의 높이가 각각 다른 것이 특징이다. 「자연의 美」와 「인공의 美」를 조화시킨 정자는 충재선생의 미의식이 돋보이는 곳이다.


 

 

과거 닭실마을로 오르는 초입부분 우측편에 자리하고 있는 삼계서원(문화재자료 제417호, 2002년 2월 14일)은 조선 중종때 명신 충재 권벌(1478 1548)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당시 안동부사였던 김우옹이 조선 선조 21년(1588)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조선 선조 31년(1601)에 한강 정구가 사당을 충정공사(忠定公祠), 당호를 정일당(精一堂), 동재를 사무사(思無邪), 서재를 모부경(母不敬), 정문을 환성문(喚惺門), 문루를 관물루(觀物樓)라 각각 명명하였다. 그리고 현종 1년(1660)에 삼계서원으로 사액받았다. 고종 5년(1868)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충정공사, 환성문, 관물루가 훼철되었다가 1951년에 복원하였다.

 

권벌은 연산군 2년(1496)에 진사가 되고 중종 2년(1507)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다. 명종 2년(1547)에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평안도 삭주에 유배되었으며, 이듬해에 그 곳에서 죽었다. 

 자료 - 봉화군청 문화관광과

 

닭실한과  닭실마을 부녀회 054-673-9541, 674~0788

봉화읍 삼계리‘닭실마을’은 조선 중종때 문신 권벌이 터를 닦은 안동권씨 집성촌이다. 닭이 알을 품은 모양인 닭실은 한반도에서 손꼽히는 명당터로 옛날부터 이름을 날렸다.

 

요즘 닭실마을은 한과로 더 유명하다. 안동 권씨 집안의 까다로운 제사가 닭실한과의 시작이었다. 종부인 손숙(61)씨는 “제사상에 오르는 한과는 가문의 수준을 가늠하는 잣대로 삼을 만큼 중요시했고, 자연 한과 만드는 기술이 좋아졌다”고 했다.

닭실마을 입구에는 부녀회관이 있다. 부녀회관에 가면 한과 만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찹쌀을 빻아 시루에 쪄낸 뒤 홍두깨로 밀어 손바닥만한 떡살을 만들어 온돌 바닥에 바싹 말린다. 떡살을 식용유에 넣고 나무주걱으로 눌러 지진다. 손바닥만하던 떡살이 방석만하게 부풀어오른다. 물엿을 바르고 튀밥을 묻히면 한과의 한 가지인 입과(산자)가 만들어진다. 일주일쯤 걸린다. 모두 수작업이다. 수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잔과(손가락 크기 강정)는 찹쌀 튀밥과 잘게 자른 건포도로 꽃 장식까지 한다. 속이 촘촘하면서 입안에서 녹듯 부드럽다. 딱딱한 덩어리가 씹히지 않는다. 손숙씨는 “미지근한 기름에서 천천히 튀기는 정성이 비결이라면 비결”이라고 일러줬다.

 

추석은 주문이 전국에서 쏟아지는 대목이다. 그래서 요즘 한과 만드는 아낙들 손길이 유난히 바쁘다. 바구니 크기에 따라 3만5000원, 6만원, 8만원에 판매된다. 제사, 선물용 등을 알려주면 맞춰서 포장해 택배로 보내준다. 택배비 4000원. 10일 전 미리 주문해야 좋다.

 

거촌리 쌍벽당 중요민속자료 제170호, 봉화군 봉화읍 거수1길 17

조선 중기 성리학자 쌍벽당 김언구가 살던 거촌리에 그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유림에서 (명종21년(1566)건립한 정자이다. 현재 쌍벽당과 함께 있는 본채는 ㅁ자형의 건물로 안채와 사랑채가 연이어져 있고 안채는 선생의 부친이 1450년에 건립하였다.

 

쌍벽당은 김용석 어른의 둘째인 죽헌공(竹軒公) 균(筠)이 봉화 거촌에 터를 잡고 지은 집이다. 쌍벽당이란 당호는 죽헌공의 맏아들인 언구(彦求)의 호인 쌍벽당(雙壁堂)에서 따 왔다고 한다.

 

쌍벽당 건물의 배치는 전저후고(煎低後高-앞은 낮고 뒤가 높은 지형)의 지형에 따라 솟을대문이 있는 대문채를 앞으로 그 뒤로 안채, 사랑채가 자리 잡고 있으며, 쌍벽당은 사랑채의 동쪽에 별당으로 붙어있다.

 

이 고택은 다른 고택과 다른 것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바로 대문 앞에 높게 올라와 있는 사랑마당이다. 이 집의 사랑마당은 다른 집과 달리 세벌대로 쌓은 기단 위에 높이 만들어져 있다. 보통의 경우라면 마당은 낮추고 사랑채는 축대를 높이 올려 사랑채를 우러러 보듯 짓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쌍벽당의 사랑채는 이와는 반대로 사랑마당은 높이고 사랑채는 낮춰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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