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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충청북도

충주 미륵리 미륵사지 포암산 하늘재 계립령

by 구석구석 2007.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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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내륙고속도로 충주 IC에서 문경 방면 3번 국도로 갈아탄다. 수안보, 이화령터널, 문경읍을 지나면서 901번 지방도로 들어서서 갈평리 삼거리가 나오면 좌회전한다. 도자기로 유명한 관음리 부근에 하늘재를 알리는 표지판이 보인다.

 


미륵사지는 특이하게도 북쪽을 향하고 있다. 이야기가 없을 수 없다. 이곳에서 신라의 마지막 태자인 마의태자가 송계계곡에 자리하여 남쪽을 보고 있는 덕주공주와 마주보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기 때문이란다. 미륵사 유적들이 모두 고려때의 모습이고 덕주사의 불상들도 모두 고려 이후에 만든 것이므로 신빙성은 없다.

 

 

 

가장 높은 곳에 돌부처 한 분이 곱상하게 서 있다. 석불이 보고 있는 북쪽만 열고 나머지 주변은 돌로 쌓았다. 앞쪽에 기둥을 세운 주춧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앞쪽을 목조건물로 보호하고 주변을 돌로 막은 반 석굴의 법당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불상은 크게 다섯개의 돌을 조각하여 포개놓았다. 왼손에 뭔가를 감싸쥐고 있다. 가슴 앞에서 양손을 모으고 있다. 둥그스러운 얼굴은 순박하다. 다소곳한 표정이 사람들 마음을 끈다. 전국에 널려 있는 소박한 고려 미륵불 중에 하나다.  

 

결코 오만하지 않고 수수하면서도 누구와도 쉽게 어울릴 것같은 우리들의 미륵부처같다. 친구들은 저마다 호감이 가는 미륵불에게 들리지 않게 자신의 소원을 말하고 있었다. 이 미륵부처님께는 거대한 소원보다는 조그마하면서도 소중한 소원을 빌어야 할 것 같다. 그런 소원이 무엇일까? "올해는 좀더 많은 사람과 푸근한 정을 나누도록 도와주소서"이 정도면 될까?

 

미륵사지 석불과 조형물로 모두 남북일직선상에 놓여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부처모습을 국왕으로 여겼다. 국가 차원에서 불상을 새겼고, 그 수준은 대단하였다. 선종으로 부처나 미륵을 자처한 지방세력이 연합한 나라가 고려였다. 불교가 지방으로 저변이 확대되었다. 고려때부터 불상은 지방화했고, 조각의 수준은 형편없어졌다. 소박하고 단순하며 괴량감이 들기도 한다. 수안보 미륵불은 그 중에서도 소박하고 곱상한 아름다움을 지닌 대표적 부처님으로 통한다.  

 

얼굴부위를 뺀 온몸이 세월을 견디면서 이끼옷을 입었으나, 얼굴은 너무나 깨끗하다. 머리에 갓을 썼기 때문일까? 갓을 쓴 불상에도 이끼가 낀 것이 많은 것을 생각한다면 갓 때문은 아닐 것으로 보인다. 부처님의 신통력이 통했기 때문일까? 그래서 신비로운 부처님의 능력에 의존하고픈 사람들이 이 부처님 앞에 와서 머리를 조아린다.

 

부처님이 서 있는 곳이 아마도 중심 법당이었을 것이다. 법당 앞으로 석등과 석탑이 차례대로 북쪽으로 서 있다. 바로 앞에 있는 석등은 통일신라 석등 양식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긴 중간의 간석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아래 위로 연꽃으로 장식했다. 균형잡힌 석등이기는 하나 상대석에서 보듯이 어쩐지 세련미가 떨어지고 있다.

 

석등 뒤쪽의 5층 석탑은 통일신라 양식의 고려때 석탑 모양을 제대로 간직하고 있다. 2중 기단이 필요 이상으로 거대해졌고, 지붕돌의 길이가 짧다. 5층으로 변화를 나타내보았으나, 새로운 양식으로 개발되지 못한 고려식 통일신라 석탑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석탑은 동쪽으로 조금 가면 서 있는 삼층석탑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미륵사지의 고려식 석등

 

석탑과 석등 중간 동쪽에 있는 또 하나의 석등은 완전히 고려화했다. 자그마한 규모에 다정다감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화사석은 네개의 기둥으로 대신했다. 전체 몸매가 네모다. 중간 간석 중간에는 거꾸로 된 하트모양의 안상을 만들고 그 안에 꽃을 새겼다.

 

상대석과 화창의 네기둥과 그 위의 지붕이 아래쪽의 둥근 연꽃과 어울려 푸근한 멋을 풍기고 있다. 화창에 불을 밝혀 석등으로 사용했을 것 같지는 않다. 모양 자체가 그냥 환한 불을 보듯 했다. 미륵부처님의 푸근하고 곱상한 감정은 이 석등에서 다시 한번 되새김질되고 있었다. 자료-오마이뉴스2008 신병철

  

자연미 넘치는 옛길의 흥취_ 충북 충주 하늘재

국내에서 가장 먼저 뚫린 고갯길이다. 신라시대 때 처음 열려 신라가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는 데 교두보 역할을 했던 곳이지만 조선시대 문경새재가 개통된 이후 군사와 교통의 요지로서의 역할은 사라지고 지금은 역사적 의미만 간직하고 있다.

 

계립령·대원령으로도 불리는 하늘재는 신라 제8대 아달라왕이 재위 3년(156년) 북진을 위해 길을 열었다. 죽령보다 2년 빠르다. 이 길은 한강과 바로 연결되는 까닭에 고구려 온달이 “계립령과 죽령 북쪽 땅을 되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출사표를 던졌을 만큼 삼국 이후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군사적 요충지이다. 미륵리 절터를 오른쪽으로 끼고 오르는 길이 시작되는데. 길이 험하지 않아 문경 관음리까지는 쉽게 갔다 올 수 있다.

하늘에 닿을 듯 높다는 뜻으로 하늘재라 불리지만 실제 높이는 525m에 불과한 평범한 고개. 충북 충주시 미륵리 절터와 경북 문경시 관음리를 잇는 도 경계로 미륵리에서 2km 거리에 있어 왕복으로 걷는 데 1시간이면 충분하다. 옛길 외에도 ‘역사·자연 관찰로’가 마련되어 있으며 하늘재의 문화유적과 자연생태계를 설명하는 ‘자연해설프로그램’이 매주 토·일요일 오전 11시에 운영되고 있다(7, 8월 성수기에는 11시, 3시 2회 운영).

 

초등학교 저학년 자녀를 둔 가족이라면 관찰로를 이용하는 것이 좋고, 성인들끼리라면 옛길 그대로를 따라 걷는 것이 좋다. 충주 쪽 하늘재 들머리에 있는 미륵리 절터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 국내 유일의 북향 절터로 알려진 미륵리 절터에는 석불입상(보물 제96호)과 5층 석탑(보물 제95호)이 있다.


하늘재 바로 아래에 자리한 마을 관음리는 예로부터 도자기로 유명한 곳. 지금도 사람들이 대를 이어 도자기를 빚고 있으며, 오래된 가마터도 둘러볼 수 있다. 최근 도자기 체험을 할 수 있는 곳도 속속 생겨나고 있어 일석이조의 나들이가 가능하다. 그리고 사과밭, 고추밭, 길가 등 곳곳에 세월이 묻어나는 불상이 있으니 잠시 차를 세워놓고 감상해 보는 것도 좋겠다.

하늘재와 미륵사지 부근에는 마땅히 잠을 잘 수 있는 곳이 없다. 최근 하늘재에 산장이 생기긴 했으나 작은 매점에 불과하며, 미륵사지 주변에는 음식점을 겸한 작은 민박집 말고는 별다른 숙박시설이 없다. 문경시내나 온천으로 유명한 수안보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상모면 포암산(961m)

미륵리-동남릉-정상-동북릉-만수골계곡-만수교 [ 약 3시간 40분 ]  

 

충주시 상모면과 경북 문경시 문경읍의 경계를 이루는 포암산은 월악산 국립공원 권에 속해 있으며, 북쪽으로 월악산(1,093)과 만수봉(983)이 능선으로 이어져 있으며, 월악산, 주흘산, 조령산 등과 함께 조령 5악에 속하는 명산이다.

또한 백두대간의 주능선 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하늘재(525m)를 경계로 월항삼봉과 연이어 있으며, 하늘재는 본디 한훤령으로 불리어졌으며 조선시대에 조령관문이 뚫리기 전까지 남북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로서 고개이다. 하늘재 아래 미륵사지는 고려 초기에 조성되었던 약 4천여평 규모의 대찰로 주흘산을 진산으로 하여 좌우로는 신선봉과 포암산을 끼고 멀리 월악산을 조산으로 하는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물레방휴게소에서 미륵사지 방향으로 약 1km 거리에 있는 팔랑소(八瑯沼)는 2백여 평의 암반에 폭포를 곁들인 비경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하늘에서 8공주가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팔랑소 주변에는 반석과 암벽의 절묘한 조화를 이룬 와룡대, 망폭대가 어우러져 있다.충주호 유람선을 탈 수 있는 월악 나루가 가까이 있다. 마운틴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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