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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전남 섬

신안 하의도 능산도 신도 대야도

by 구석구석 2023.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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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여객터미널에서 하의도까지 차도선이 1일 2회 운항하고, 교량이 연결된 신의면까지는 1일 4회 운항한다.

차도선 - 소요시간 2시간 30분 조양페리 061-244-0038

하의여객 061-275-2230 / 하의택시 061-275-8875

연화부수(蓮花浮水). 물 위에 연꽃이 떠있는 모습이라 하여 ‘하의도'라 부르게 되었으며, 유인도 9개, 무인도 47개로 구성되어 있다. 야산으로 된 지형은 농업용수와 식수에 어려움이 많고 천일염과 수산양식으로 소득을 높이고 있으며, 신도와 대야도는 모래밭과 송림이 좋아 천혜의 해수욕장이 되고 있다. 

하의도 웅곡포구에 들어서면 어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깃배조차 눈에 띄지 않고 넓은 들판이 다가온다. 하의도 마을들은 대부분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고 섬 전체가 논밭으로 가득차 있어 섬처럼 느껴지지 않는 섬이다. 하의도 사람들은 예로부터 농사를 주업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그들에게 토지는 삶의 원천이고 자부심이었으나, 하의도 사람들은 이 땅에 대한 피와 눈물이 맺힌 3백년에 걸친 통한의 역사를 안고 있다. 

하의도 농민운동의 역사는 지금도 하의도 토지항쟁비가 말해주고 있으며, 군에서는 하의도 토지항쟁기념관 건립을 구상중에 있다.

하의도는 또한 지조 높은 유학자 초암 김련 선생의 고장이기도 하다. 유학자 초암 김련 선생은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도 서당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기 위해 당시 신간서적이라면 국내는 물론 중국, 일본까지 다니면서 2,000여권의 고서(필사본)를 모았던 분이다. 당시 초암의 높은 학문을 배우기 위해 나주, 신안의 모든 지역에서 수 천명의 제자들이 모여 들었고, 제자들은 선생의 높은 뜻을 기리고자 덕봉강당을 건축하였다. 현재는 초암 선생의 아들인 김춘배 옹(1912년생)이 관리하고 있는데, 대를 이어 책 관리는 물론 5선현의 제사도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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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의면 웅곡리 하의도 토지항쟁비와 덕봉강당  

예로부터 농사를 주업으로 살아온 하의도 사람들에게 토지는 삶의 원천이고 자부심이었는데, 하의도 사람들은 이 땅에 대한 피와 눈물이 맺힌 삼백년에 걸친 통한의역사를 안고 있다. 하의도 농민운동의 역사는 조선시대 선조때 임진왜란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선조는 맏 딸 정명공주의 불치병을 치료한 홍계원을 부마로 삼고 하의3도(하의도, 상태도, 하태도) 를 그에게 무토사패(나라에서 받을 토지세를 대신 받음)로 준다. 그러나, 정명공주의 증손자인 홍석보가 죽으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정명공주에게 준 면세전 20결이 그 후손들에게 상속되었는데, 그 후손들은 세섬의 모든 토지에대한 절수권(국가 대신 세금을 받을 권리)을 받았다면서 백성들이 경작하는 모든 토지에서 세금을 받아간 것이다.

백성들은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나 무모한 일이 되고, 세월이 흘러 홍씨들이 권좌에서 물러나 고 1870년 이완용의 아버지 이호준이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자 다시 하의사람들의 진정이 시작된다. 이 감사는 모든 토지에대해 1부에 백미 2되씩만 홍씨들에게 주라고 판결해 주었으며,이에 대해 하의도 사람들은 송변준의 글씨로 옥도에 송덕비를 세웠다. 이 후 하의도는 1901년 토지지권발급으로 인해 토지가옥 증명규칙을 만들어 모든 부동산의 문서화에 착수하는 과정에서 하의도 토지는 모두 궁토로 간주되어 왕실 재산을 관리하는 내장원 토지로 등재된다. 1905년 일본 조선 통감부는 역둔토 조사사업을 벌이면서 모든 궁토도 역둔토로 통합해 국유화 조치를 취하는데, 이 때 홍씨들은 하의 3도의 토지를 국유화에서 탈루시켜 홍우록의 사유지로 지권을 발급받는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하의도 사람들은 같은 해 6월 각계에 진정서를 내고 즉시 경성지방법원 소송을 제기했다. 홍우록은 일본인과 한국인 무리배들을 하의도에 보내소작료를 받도록 했으나, 당시 면장 김준열을 비롯한 주민들의 강력한 항의를 받고 철수했다. 이 때 김 면장은 목포에서 몰려온 깡패들에게 맞은 여독으로 10일만에 죽고 문경수씨는 총상을 입기도 했다. 이처럼 하의도 소유권행사가 순조롭지 못했던데다 후손간의 분쟁도 있어 홍우록은 지권을 집안의 홍우승에게 양도해 버렸고, 홍우승은 다시 서울갑부 조병택에게 1만 5천원의 값으로 팔아 넘겨 버렸다. 이에 하의도 사람들은 일본인 변호사를 선정해 홍씨들을 상대로 부당 이득반환 및 토지확인 청구소송을 제기해서 1심에서는 패하고 2심에서 승소하였다.

하의도 주민들은 이 사건의 변호를 맡았던 일본인 변호사 '목미호지조' 와 사무원 남만웅의 송덕비를를 하의도에 세웠으나, 땅을 지키다 죽은 4명과 형무소살이를 한 31명에 대한 추념비는 하나도 없다. 또한, 하의도는 지조 높은 대유학자 초암(草庵) 김연(金鍊)선생의 고장이기도 하다. 초암 선생은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도 서당을 지어 후학들을 양성 하였는데, 당시 신간서 적이라면 국내는 물론 중국, 일본까지 다니면서 2,000여권의 고서(필사본)를 모았으며, 항상 정직하게 살아갈 것을 강조하고, 고, 공자의 예절을 높이 숭상하여 5선현을 모시고 매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당시 선생의 높은 학문을 배우기 위해 나주, 신안의 모든 지역에서 수 천의 제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하며, 그후 제자들이 선생의 높은 뜻을 기리고자 1965년 하의면 대리에 신안군 향토자료 제22호인 덕봉강당을 지어 선 의 유물인 성리대전 등166책, 1,435여권의 책을 보관하였으나 건물의 노후로 1994년에 군비 5천만원의 사업비를 들여개축하였고, 고서적 등 초암선생의 유물을 과학적으로 보관 전시할 수 있는 전시관(강당1동, 유물전시관 1동)을 2001년에 건립하였다. 현재는 초암선생의 아들인 김춘배옹(1912 년생)이 관리하고 있는데, 대를 이어 책 관리는 물론 5선현의 제사도 지내고 있다.

 

하의면 후광리 100 김대중대통령생가

하의도가 세간의 큰 관심을 끌게 된 사건 가운데 하나가 바로 파란과 곡절을 상징하는 '인동초, 김대중' 이란 거목을 낳은 고장이라는 것이다. 지난 1992년 대통령 선거 무렵에는 그의 생가 집터가 있는 후광리에 수백명의 국내기자와 외신기자들이 몰려드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으며, 김대중 대통령이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생가도 지금은 옛 모습을 찾게 되었다. 

1999년에 종친들이 성금을 모으고 대구 노인복지대학노인회에서 120만원을 모금해 보내오기도 하여 집터만 남아있던 생가의 구조물을 그대로 이용, 어은리마을에 집을 짓고 살던 주민으로부터 다시 집을 사들여, 후광리에 대지 2,466.12m²(746평), 건평 59.5m²(18평)의 목조초가 본체와 창고, 측간으로 구성된 생가를 원형대로 복원(신안군 향토자료 제23호)하여 신안군에 기증하였으며, 군에서는 복원된 김대통령 생가를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주변에 화장실 등 기본시설을 갖춰 찾아오는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방문해 화제가 되기도 했던 이 바위는 신안군 하의도 해안도로 앞에서 보면 작은 섬 한쪽이 영락없는 사람의 얼굴 형상을 하고 있다. 20~30m 높이의 `얼굴' 쪽은 바위이고 `머리' 쪽은 나무가 머리카락처럼 휘날리는 듯한 모습을 한 `큰 바위 얼굴'이다. 

 

인동초의 집

‘인동초의 집’은 신안 하의도 5천124㎡ 부지에 2동 6객실을 갖춘 한옥펜션 숙박시설이다. 김대중 대통령 생가를 찾는 방문객과 하의도 관광객이 숙박시설 부재로 불편을 호소함에 따라, 주민 건의로 지난 2013년 10억 원을 들여 조성했다.

코로나 이전까지는 매년 1천여 명의 방문객이 이용했고, 최근 2억 5천만 원을 들여 노후 시설을 유지보수하고, 편의시설을 정비했다.

인동초의 집은 하의면사무소가 있는 웅곡선착장에서 서쪽으로 2km 떨어진 대리마을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다. 붉은색 지붕의 한옥 건물로 6객실 모두 동일한 크기와 구조로 이뤄졌으며 전용면적 36㎡ 규모다. 객실은 거실과 방 등 2칸으로 구성된 펜션 형태로 주방기구가 비치돼 4인이 이용하는데 적합하다.

이용 요금은 4인 기준 평일에는 1일 8만 원, 주말 및 성수기(7․8월)에는 10만 원으로, ‘인동초의 집’ 누리집을 통해 예약할 수 있다.

펜션 앞에는 아름다운 다도해가 펼쳐져 전남 섬 여행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인근 관광명소로는 김대중 전 대통령 생가, 하의3도 농민운동 기념관, 큰바위얼굴 등이 있다.

/ 투어코리아 - No.1 여행·축제 뉴스

해상국립공원 '신도' 

하의도는 목포로부터 57.9㎞ 떨어져 있고, 동경126°02′, 북위34°36′에 위치해 있다. 신도는 목포항에서 남서쪽으로 42km, 하의도에서 서쪽으로 3km 떨어진 섬이다. 신도는 섬 전체가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하며, 2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된 면적 1.68㎢의 작은 섬으로 섬 전체에 섶(땔감나무)이 많이 있어 섶섬이라 불렀으며 지금은 섶신(薪)을 써서 신도(薪島)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섬 전체가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중간의 서쪽해안에 형성된 해수욕장에는 길이 800m의 백사장이 있는데 백사장 주위에는 마치 원시림을 방불케 할만큼 송림이 울창하다. 또한, 마을 사람들이 20여년 전부터 안태산(큰산)에 방목하여 기르는 천여 마리의 흑염소는 산에 자생하는 각종 야생초와 약초를 먹고 자라기 때문에 약효가 뛰어나며, 섬 주변 청정해역 바위에서 자란 돌미역은 맛과 질이 좋으나 생산량이 적어서 수요에 못 미치는 실정이다.

 이 섬에서는 전국에서 가장 맛이 좋은 꽃게도 잡힌다. 해수욕장 주변의 민가와 솔 숲에서는 민박이나 야영이 가능하고 식수 사정은 좋은 편이며, 민박집에 미리 예약을 하면 흑염소바베큐와 각종 해조류, 생선도 먹을 수 있고 봄철에 채취해놓은 돌미역도 구입할 수 있다. 목섬과 대야도에서는 갯바위낚시도 즐길 수 있는데 주로 농어와 감성돔, 우럭, 장어가 많이 낚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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