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2월유네스코등재
경주역사유적지구(Gyeongju Historic Areas)는 신라천년(B.C 57 - A.D 935)의 고도(古都)인 경주의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있는 불교유적, 왕경(王京)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이미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일본의 교토, 나라의 역사유적과 비교하여 유적의 밀집도, 다양성이 더 뛰어난 유적으로 평가된다.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유산이 산재해 있는 종합역사지구로서 유적의 성격에 따라 모두 5개 지구로 나누어져 있는데 불교미술의 보고인 남산지구, 천년왕조의 궁궐터인 월성지구, 신라 왕을 비롯한 고분군 분포지역인 대능원지구, 신라불교의 정수인 황룡사지구, 왕경 방어시설의 핵심인 산성지구로 구분되어 있으며 52개의 지정문화재가 세계유산지역에 포함되어 있다.
경주 남산은 야외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신라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곳으로 신라 건국설화에 나타나는 나정(蘿井), 신라왕조의 종말을 맞게했던 포석정(鮑石亭)과 미륵곡 석불좌상, 배리 석불입상, 칠불암 마애석불 등 수많은 불교유적이 산재해 있다.
남산에는 왕릉 13 개와 산성터 4 개가 있고 40여 개의 계곡에 147 개의 절터, 113 개의 돌부처, 탑 96 기, 석등 22 개 등 모두 672 점의 문화유적이 존재고 있으며 그 가운데에는 보물 제63호인 배리삼존불입상을 비롯해 문화재만도 무려 43 점에 이릅니다.
월성지구에는 신라왕궁이 자리하고 있던 월성, 신라 김씨왕조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난 계림(鷄林), 신라통일기에 조영한 임해전지, 그리고 동양 최고(最古)의 천문시설인 첨성대(瞻星臺)등이 있다
경주시내에서 불국사방면으로 가다보면 오른쪽에 반월성이 보이는데 유채꽃밭 뒤로 벚꽃이 만발하여 볼만하다.북쪽 성루 중간지점에 성루를 잘라서 남쪽에 입구르 내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닥을 경사지게 하여 물이 성 밖으로 나가도록 중앙에 배수로가 설치된 보물66호인 석빙고가 있다.삼국유사에 따르면 3대유리왕때부터 얼음창고가 있었다고 전한다.
계림은 경주 교동에 있는 경주김씨 시조의 발상지로 사적제19호이며 느티나무 물푸레나무 싸리나무등 100여그루의 고목이 무성하며 숲속에는 1803년 순조가 세운 비가 있다.
안압지는 대궐에서 잔치하던 전당인 임해전의 정원에 파 놓은 못이다. 주위에는 높고 낮은 산을 만들고 못 안에는 세 개의 섬을 꾸몄는데, 물위에는 언제나 부평초가 떠있어 바람이 불면 풀무더기들이 구름처럼 떠다니기에 그 정경을 가리켜 "압지부평"이라 한 것이다.
가운데 3개의 섬과 북쪽 동쪽으로 12봉우리를 만들었는데 이는 삼신산과 무산십이봉을 상징한 것으로 이곳에 진귀한 동물을 기르고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었던 신라원지의 가장 대표적이다.
첨성대는 선덕여왕때 만들어진 국보31호로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이다.삼국유사에 의하면 360여개의 돌을 쌓아 병모양의 9미터로 위로 올라갈 수록 가늘어지는 원통형으로 위에 4각형의 돌이 있고 아래부분도 4각형의 돌단이 있다.
대능원지구에는 신라 왕, 왕비, 귀족 등 높은 신분계층의 무덤들이 있고 구획에 따라 황남리 고분군, 노동리 고분군, 노서리 고분군 등으로 부르고 있다. 대릉원 앞은 넓은 잔디위에 왕릉들이 잘 다듬어져 있고 그 뒤로 원시의 숲이 펼쳐져 있다. 반월성과 계림 숲이다. 이곳은 신라를 세우고 다스린 왕들과 신라인들이 잠들어 있는 신성구역이라고 할 수 있다.
1973년 발굴된 천마총에서는 금관이나 천마도, 기마인물상, 유리잔과 같은 화려한 신라문화의 진수가 쏟아져 나왔다. 이 유물들은 교과서와 많은 역사서들을 통해 많이 소개된 것들로 현장에서 이를 다시 되새긴다는 것 또한 새로운 의미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리잔은 멀리 아라비아에서 건너왔다고 하여 KBS 다큐멘터리 ‘역사스페셜’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지만 이 유물들을 관람하려면 경주박물관을 찾아야 하는 것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사적40호로 지정된 대능원지구에는 구획에 따라 남산의 북쪽에서 부터 국립경주박물관자리와 반원성을 거쳐 황오동 황남동 노동동 노서동으로 이어지는 평지에 고분들이 집중적으로 있다. 황남동의 대능원 고분군이 23기로 가장크다.
천마총은 높이 12.7m로 냇가의 돌로 쌓은 적석층이 있고, 안에는 길이 6.5m 너비4.2m 높이2.1m의 나무로 된 방이 있어 그 중앙에 목관을 놓고 시신을 안치했다. 지금은 분묘의 내부를 돔형으로 축조하여 천장을 만들고 관이 안치된 내부를 유리를 통하여 들여다 볼 수 있게 하여 놓았다.
이곳의 왕릉 중에 흥미로운 유물이 발굴된 곳이 미추왕릉이다. 미추왕은 신라 13대왕으로 김씨족 출신으로는 처음 국왕이 된 왕으로 이곳에서 출토된 ‘토우부장토기(국보195)’는 당시 시대상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토기에는 당시 사람들의 원초적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국가 체제를 갖추어 가는 당시 신라 사회의 모습 같기도 하다.
미추왕은 김씨족의 시조인 김알지의 7대손으로 김알지는 서기 65년 지금의 계림 숲에서 한 마리 장닭에 의해 그 탄생이 알려진 설화적 인물이다. 계림 숲은 미추왕릉 부근이어서 이러한 설화적 상상력과 신라 고대사회의 모습들을 한꺼번에 생각할 수 있게 한다. 마을 앞의 당산나무가 신성시되듯 계림 숲은 김씨족의 시조가 되었다는 김알지의 설화를 간직하며 설화적 상상력과 함부로 침범하기 어려운 신성성을 느끼게 한다.
황룡사지구에는 황룡사지와 분황사가 있으며, 황룡사는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되었으나 발굴을 통해 당시의 웅장했던 대사찰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 40,000여 점의 출토유물은 신라시대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산성지구에는 A.D 400년 이전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명활산성이 있는데 신라의 축성술은 일본에까지 전해져 영향을 끼쳤다.
신라 말기의 석탑 분황사탑.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0호로 지정되었다.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으로, 현존하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분황사 모전석탑이라고도 부르며, 원래는 9층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3층만 남아 있고 높이는 9.3m이다.
왕궁 방어시설의 핵심인 산성지구로 신라 수도의 방어성인 경주시 천군동(千軍洞)과 보문동(普門洞)에 걸친 명활산에 있는 신라시대 석축산성인 명활산성이 있다.
사적 제47호. 둘레 약 6km. 축성연대는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 <실성왕기(實聖王記)>에 405년(실성왕 4) 왜병이 명활산성을 공격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므로 그 이전인 것만은 확실하다. 축성방법 역시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한 신라 초기의 방식이다. 즉, 왜의 침략이 극심한 때를 전후하여, 왜적침입 대비목적으로 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431년(눌지왕 15)에는 왜적이 성을 포위 ·점령하려 하였고, 또 473년(자비왕 16) 7월 이 산성을 개수하여, 475년 정월에 왕이 성에 이거(移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은 대부분 허물어져, 자연석을 깨뜨려 가공 없이 쌓은 자취만 몇 군데서 볼 수 있는데, 이 축조는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554년(진흥왕 15)에 개축한 것으로 추측된다. 서쪽의 선도산성(仙桃山城), 남쪽의 남산성(南山城)과 함께, 당시 수도 경주를 방어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경주역사유적지구는 한반도를 천년이상 지배한 신라왕조의 수도로 남산을 포함한 경주 주변에 한국의 건축물과 불교 발달에 있어 중요한 많은 유적과 기념물들을 보유하고 있다.
/ 자료 - 남상학의 시솔길 / 네이버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