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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전라북도

완주 죽림리 공기마을 편백나무숲 상관숲 창암이삼만

by 구석구석 2022.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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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군 상관면 죽림편백길 184 / 공기마을 

 1976년 마을주민들이 나서 만들었다. 뒤편 산자락에 85만9천500㎡(26만여 평)이나 된다. 이후 40년 넘게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다. 사람들이 들기 시작한 것은 2011년 영화 '최종병기 활'이 촬영된 후부터다. 주인공 남이(박해일 분)가 청나라 장군 쥬신타(류승룡 분)에게 화살을 날리는 마지막 장면을 이 숲에서 찍었다.

공기마을 유래도 재미있다. 마을 뒷산엔 옥녀봉과 한오봉이 있다. 여기서 내려다보면 마을이 밥그릇처럼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생긴 이름이 공기마을이다. 창암 이삼만 선생이 만년을 보낸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편백숲으로 가는 길은 어렵지 않다. 죽림리 초입에서 공기마을까지 좁은 길을 따르면 된다. 2㎞ 남짓 오르면 커다란 주차장이 마을 입구에 있다. 주차장을 조금 지나자 편백숲 오솔길이란 팻말이 있다. 여기를 들머리로 삼으면 된다.

경사진 숲에는 삼림욕장이 있다. 산객들이 쉴 수 있도록 만든 공간이다. 머물면서 나무 향을 즐길 수 있다. 잠깐 누워 낮잠을 청하는 이들도 있다. 책을 펴든 이도 있다. '걷는 숲'이라기보다 '머무르는 숲'으로 제 역할을 다 한다.


오솔길에 들면 처음 몇 분간은 좀 힘들다. 상당히 가팔라 숨이 차다. 하지만 10여분만 오르면 평탄한 오솔길이 이어진다. 완만한 나무데크를 따라 숲을 오른다. 편백들이 서로 견주 듯 하늘로 쭉쭉 뻗는다. 욕심껏 숨을 들이쉰다.

국내에서 가장 넓은 편백림이라는 말이 느껴진다. 하늘을 덮는 나무의 녹음은 보기만 해도 서늘하다. 울창한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볕은 청량하다. 봄날의 맑은 기운을 제공한다. 누구든 삼림욕을 하며 고즈넉하게 보낼 수 있다.

숲의 나무가 봄꽃보다 예쁘다. 혼자서도 맘껏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여기저기에 나무 데크가 있다. 초입부터 삼림욕을 즐길 수 있다. 그저 편백나무 세상에 빠져들면 된다. 훤칠하게 솟은 편백들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길은 숲으로 미로처럼 나 있다. 아래위로 여러 갈래다. 때론 빼곡한 나무들이 길을 감추기도 한다. 울창하다는 표현으론 부족하다. 밤새 내뿜은 피톤치드가 몸과 마음을 맑게 헹군다. 한 번 호흡으로 도시오염이 중화된다.

온 종일 숲에 퍼지는 편백향이 짙고 그윽하다. 그지없이 맑고 상쾌해 마음이 편하다. 완만한 나무데크를 따라 숲을 오른다. 나무로 만든 작은 목교를 지나기도 한다. 거기서도 서로 경쟁하듯 울울창창 곧게 뻗는다.

시간이 지나도 숲 향이 물결치듯 흘러간다. 그 안에서 그 에너지로 아름다운 생명들이 맥동한다. 눈에 담긴 모든 풍경들이 작품으로 빛난다. 도열한 편백 군락이 여전히 수직 풍경을 빚는다. 지친 몸과 마음이 절로 치유된다.

쭉쭉 뻗은 편백나무숲은 시원하다. 하늘을 덮은 청정림은 울창하다. 그 사이로 난 숲길은 색다르다. 공기도 다르고 햇빛도 다르다. 한참 거닐다 돌아보면 편편이 명품이다. 사철 푸른 나무가 눈 맞춤을 하며 반긴다.

 

# 온몸으로 밀고 나아가다…이삼만

서울의 추사 김정희, 평안도의 눌인 조광진과 함께 ‘조선 후기의 3대 명필’로 일컬어지는 창암 이삼만. 그의 묘가 완주 구이면 야산 자락에 있다. 이삼만은 평생 관직이 없이 벼루 두 개를 구멍 낼 정도로 서예 연마에만 힘써 끝내 일가를 이룬 인물이다. ‘삼만(三晩)’이란 이름은 ‘세 가지(三)’가 ‘늦었다(晩)’는 뜻을 담아 바꾼 이름인데, 집이 가난해 글공부가 늦었고, 벗을 사귀는 게 늦어 사회진출이 늦었으며, 장가를 늦게 들어 자손이 늦었다는 의미다.

창암 이삼만은 추사 김정희와 여러모로 대비된다. 둘 다 내로라하는 명필이지만, 환경과 삶은 전혀 달랐다. 추사가 이른바 ‘금수저’ 집안의 유복한 천재였다면, 창암은 초야에 묻힌 가난한 명필이었다. 추사와 창암은 딱 한 번 만났다. 추사가 제주로 유배 가는 길에 전주에 들른다는 이야기를 듣고 창암은 제자들을 이끌고 그를 찾아갔다. 이때 창암의 나이가 일흔하나. 추사의 나이는 열여섯 살 아래인 쉰다섯이었다. 창암은 나이는 한참 아래지만 당대 최고의 대가로 인정받는 추사에게 글씨를 보여주고 품평을 받고자 했다. 창암의 글씨를 본 추사의 간략한 평이 이랬다. “노인장께선 지방에서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 모욕에 가까운 평가였다.

9년의 유배생활 속에서 교만과 독선을 벗고 한결 사유가 깊어진 추사는, 유배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창암을 만나기 위해 전주를 다시 찾았다. 창암은 3년 전에 세상을 뜬 뒤였다. 추사는 창암의 묘비 글씨와 묘문을 남겼다고 전한다. “여기 한 생을 글씨를 위해 살다간 어질고 위대한 서가(書家)가 누워있으니 후생들아 감히 이 무덤을 훼손하지 말지어다.”

추사가 묘문으로 써서 당부한 창암의 묘가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 1047-17에 있다. 자주 엉뚱한 곳에다가 좌표를 찍는 네이버 지도가, 어쩐 일인지 이삼만 묘는 정확한 위치로 데려다준다. 아, 그리고 지금 이삼만 묘 앞의 묘비 글씨는 추사의 것이 아니다. 추사가 썼다던 묘비는 대체 어디로 갔을까.

/ 문화일보 2021 박경일전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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