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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전라북도

완주 대흥리 송광사 종남산

by 구석구석 2022.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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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양천의 상류인 오도천을 따라 소양면에서 송광사(松廣寺)까지 1.6㎞ 길에 40년 이상 된 아름드리 벚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다. 이 길은 봄날 완주의 벚꽃 명소다. 벚나무의 어둑한 줄기 사이로 찬란한 여름이 번쩍번쩍 지나간다. 소실점으로 멀어지는 터널을 남겨두고 송광사로 빠져나간다. 벚나무 길은 천을 거슬러 1㎞ 이상 더 이어진다고 한다. 하늘에 봉우리 하나가 오뚝하다. 백두대간이 남서쪽으로 기세를 떨치다 뚝 멈추었다는 종남산(終南山)이다.

 

소양면 송광수만로 255-16 / 송광사

완주 송광사는 종남산 동남쪽 끝자락에 자리한 평지 가람이다. 신라 경문왕 때 도의(道義)선사가 종남산 남쪽에 영험한 샘물이 솟아나 그 옆에 절을 짓고 백련사(白蓮寺)라고 했다고 전한다. 종남산의 이름도 도의선사가 자신이 수행하던 중국의 중난산(終南山)과 모습이 비슷하여 지은 것이라 한다.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통일신라 말이다. 보조체징(普照體澄)이 설악산 억성사에서 수행하다 선법의 요체를 구하러 중국으로 유학을 가던 길에 백련사가 영험도량이라는 소문을 듣고 잠시 머무르게 된다. 그는 선종의 전파가 소나무의 독보적인 생장과 같다고 하여 '소나무가 널리 자리한다'는 송광(松廣)으로 절 이름을 바꾸었다. 송광사 가람 배치도가 아름답다. 섬세하면서도 따뜻한 수묵담채화다. 

송광사 / 영남일보 류혜숙

일주문은 규모가 작은 편이다. 연꽃이 새겨진 보조기둥과 용머리로 장식한 공포가 화려하다. 원래 일주문은 지금 위치에서 3㎞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점점 절의 영역이 좁아지면서 1944년에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옛 사세를 짐작게 하는 부분이다. 일주문 속에 금강문, 천왕문이 일직선으로 서 있다. 멀리 보이는 옥빛의 세살문은 대웅전의 어칸일 것이다.

일주문에 들어서면 길 좌우로 꽃길이다. 모든 번뇌를 없애 깨달음의 세계로 나가게 해준다는 금강문을 지난다. 천왕문에 들어서자 거대한 사천왕상에 압도된다. 키가 4m가 넘는데 흙으로 빚은 것이라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소조 사천왕상으로 보물 제1255호로 지정되어 있다. 천왕문을 지나면 연꽃 모양의 커다란 수반에서 약수가 청량한 소리로 떨어지고 먼 뒤에서 동자승을 다섯이나 안고 있는 포대화상이 아무런 근심이 없다는 듯 싱긋 웃고 계신다.

송광사 / 영남일보 류혜숙

정면으로 대웅전이 보인다. 앞마당에 중심 축선에서 우측으로 살짝 비껴선 소나무 한 그루가 높다. 왼편에는 매우 특이하고 화려한 2층의 종루가 서 있다. 송광사 종루는 조선시대 유일한 열 십(十)자형 평면이다. 가운데 칸을 중심으로 동, 서, 남, 북에 각각 1칸씩이 더해진 형태다. 지붕 역시 팔작지붕이 교차되어 가운데서 모아지는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다.

중앙에 범종을 두고 돌출된 각 칸에 목어, 북, 운판이 매달려 있다. 마루 밑의 기둥들은 원형기둥과 사각기둥이 섞여 있고 위 기둥들은 모두 원형기둥이다. 보물 제1244호로 지정되어 있는 종루는 전체적으로 작은 부재로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어 한국 전통 목조 건축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꼽힌다. 언제 건축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임진왜란 이후 송광사를 중창할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송광사 삼불좌상은 565㎝로 한국 소조상 가운데 가장 크며 섬세하다. / 영남일보 류헤숙

송광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전소되었다고 한다. 1636년에 세워진 '송광사개창비(松廣寺開創碑)'에 따르면, 송광사는 인조의 척족(戚族)인 이취반(李就潘)이 폐허가 된 절터를 시주하였고 광해군 14년인 1622년부터 역사를 시작해 이듬해에 7칸 2층의 대웅전을 건립했다. 병자호란 이후 인조 임금은 피폐해진 민심을 회복하기 위해 벽암스님을 송광사로 보내 대대적으로 복원하고 '선종대가람(禪宗大伽藍)'으로 사액하여 호국원찰로 삼았다.

송광사개창비의 비문은 당시 선조의 사위였던 신익성이 썼고, 글씨는 선조의 아들인 의창군이 썼다. 송광사 최종 낙성식은 1641년 법당에 본존 삼존불을 봉안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는데 이 때 벽암스님이 화엄대회를 50일간 개최했다고 한다. 송광사 일대는 전주한지의 뿌리인 소양한지의 본고장이다. 송광사의 사하촌인 송광마을도 한지 제조로 이름 높았다고 하는데, 완주 소양에 한지제조법을 전파한 이가 송광사 벽암스님이라고 한다. 벽암스님은 병자호란 때 팔도도총섭으로 승군을 이끌며 남한산성을 쌓은 분이다.

이후 송광사는 대찰로 성장했다. 1640년에 명부전, 1649년에 천왕전, 1656년에 나한전, 일주문 등이 연이어 신축되었다. 그 후 사세의 오르내림이 있었고, 1707년에 네 번째 중건이, 철종 8년인 1857년에 다섯 번째 중건이 있었다. 현재의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건물로 다섯 번째 중건 때 세워진 것이다. 개축당시 대웅전의 모습은 처참했다고 한다. 내부에는 불전이 터져나갈 듯한 크기의 조소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아미타불, 오른쪽에는 약사여래불이다. 이에 따라 대웅전의 왼쪽 처마에는 무량수전(無量壽殿)현판이, 오른쪽에는 유리광전(琉璃光殿)현판이 걸려 있다. 뒤쪽에는 보광명전(普光明殿)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비로자나불을 모시지는 않았지만 삼신불의 의미를 모두 가진 불전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한다.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은 조각승 17명이 4년에 걸쳐 인조 19년인 1641년에 완성했다. 복장유물의 기록에 따르면 병자호란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청나라에 볼모로 보낸 인조가 두 왕세자의 무사환국과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 외적과 싸우다 전사한 이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삼존불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불상은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속설도 전해진다. 대웅전 천장에는 11점의 비천상이 그려져 있다. 아름답다. 부처님 옆에는 세 개의 목패가 걸려 있는데 각각 '주상전하수만세(主上殿下壽萬歲)' '세자전하수천추(世子殿下壽千秋)' '왕비전하수제년(王妃殿下壽齊年)'라고 적혀 있다. 인조와 왕비, 그리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다. 이제 흐려진 글씨가 찡하다. 송광사 대웅전은 보물 제1243호,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은 보물 제1274호로 지정되어 있다.

송광사 백련지 / 영남일보 류혜숙

송광사 백련지에 연꽃이 피었다. 하늘은 맑고 종남산은 스르르 엎디었다. 활짝 핀 연꽃을 보았으니 운이 좋다. 소식에 의하면 올해 송광사 연꽃은 일찍 피었고 서둘러 졌다고 한다.

 

여행팁

12번 대구광주고속도로 광주 방향으로 가다 함양분기점에서 35번 통영대전고속도로 대전·무주 방면, 장수분기점에서 20번 익산장수고속도로 익산 방향으로 간다. 소양IC로 나가 진안 방향으로 좌회전해 가다 해월1교차로로 빠져나가 좌회전, 송광사 방향으로 좌회전해 천 따라 오르면 된다. 전북에는 완주, 전주, 익산, 김제의 천주교, 불교, 기독교, 원불교 등 4대 종교명소를 잇는 순례길이 있다. 송광사는 '아름다운 순례길' 2코스의 시작점이다. 송광사에서 시작해 천주교 천호성지까지 27.1㎞ 가량 이어지며 8시간 정도 걸린다. 초창기 천주교의 역사와 고난이 담긴 길을 송광사에서 시작한다는 점이 이채롭다.

[출처 - 영남일보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완주 대흥리 위봉마을 해바라기마을 (daum.net)

 

완주 대흥리 위봉마을 해바라기마을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산21 / 위봉사 시골마을로 찾아 오는 사람들이 없었으나 오랫동안 묵혀있던 땅에 목사님이 해바라기를 심어 이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온단다. 위봉교회(안양호목사)

blo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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