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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대구광역시

달성 묘리 육신사

by 구석구석 2022.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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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 육신사와 배롱나무 붉은 꽃길 

 

대구 달성 하빈의 묘리 묘골마을 동구에서부터 '충절문' 현판이 걸린 사주문을 지나고, 작은 들도 지나고, 동네 초입의 사육신기념관에 이르기까지, 꽃은 내내 붉었다. 기념관을 지나서야 생활의 기미가 확연한 집들이 하나둘 드러난다. 마을 안길이 살짝 굽어지더니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나간다. 곧은 길 양쪽으로 덩실한 기와집들이 참으로 정돈된 자세로 잠잠하고, 길 끝에 높이 선 회화나무의 푸른 가지 아래로 육신사 붉은 외삼문이 보인다.

 

묘골 동구에서부터 충절문을 지나 사육신기념관에 이르기까지 배롱나무 꽃이 붉다.

박순(朴珣)의 아내 성주이씨(星州李氏)의 배 속에는 아기가 자라고 있었다. 나라에서는 그 아이가 아들이면 죽이고 딸이면 관비로 삼을 것을 명했다. 대구에서 관비로 있던 부인은 아들을 낳았다. 부인은 몸종의 딸과 자신의 아들을 바꾸었다. 이렇게 목숨을 건진 사내아이는 '박씨 성을 가진 노비', 박비(朴婢)라 불렸다. 그 소년이 박팽년(朴彭年)의 손자, 사육신(死六臣)의 후손 중 오직 하나 남은 핏줄이다.

 

육신사는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죽임을 당한 여섯 충신,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이개(李塏), 유응부(兪應孚) 그리고 박팽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사육신은 혹독한 고문을 당한 뒤 사지를 수레에 매달아 처참하게 찢어 죽이는 거열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박팽년은 자신은 물론 이조판서였던 아버지 박중림(朴仲林)과 형제 인년(引年), 기년(耆年), 대년(大年), 영년(永年), 아들 헌(憲), 순(詢), 분()등 3대 9명이 화를 당했고 부녀자들은 관비가 되었다. 박순은 박팽년의 둘째 아들이었다. 몸종의 아들로 자라난 박비는 열여섯이 되자 성종 임금을 찾아간다. 성종은 그에게 귀한 혈육이라는 뜻에서 일산(一珊)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후 박일산은 후사가 없는 외가의 재산을 물려받아 이곳 묘골에 종택을 짓고 정착했다.

 

태고정은 박일산의 종택에 딸린 정자로 보물 제554호다.

삼문에 들어서면 붉은 홍살문과 붉은 배롱나무 꽃과 멀리 검붉은 내삼문이 푸르름 가운데 선명하다. 왼편에는 방형의 연지가 있다. 꽃은 보이지 않고 상처 없이 깨끗한 연잎이 무성하다. 홍살문을 지나면 오른편으로 태고정(太古亭)이 보인다. 일시루(一是樓)라고도 하며 보물 제554호다.

 

육신사가 세워지기 전 이 대지에는 박일산의 아흔아홉 칸 종택이 있었다고 한다. 태고정은 종택에 딸린 정자로 1479년 처음 세워졌고,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1614년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오른쪽은 대청이고 왼쪽은 방인데 부엌이 딸려 있는 것이 특이하다. 대청에는 팔작지붕, 방과 부엌 쪽에는 맞배지붕에 부섭지붕을 달아냈고 그에 따라 겹처마와 홑처마로 달리 둘렀다. 아주 복잡한 것 같지만 부섭과 맞배에서 팔작의 추녀로 이어지는 선이 매우 점잖게 곱다.

 

축대 높은 곳에 사당이 자리한다. 내삼문인 성인문(成仁門)은 잠겨 있다. 문 옆 담장 너머로 사당의 웅장한 모습이 절반쯤 보인다. 현판은 숭정사(崇正祀)다. 육신사가 아닌 것은 사육신과 더불어 박팽년의 아버지 박중림의 위패가 함께 봉안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1974년 '충효위인유적정비사업'에 따라 성역화됐다. 축대 아래에 사육신의 행적을 기록한 커다란 육각비가 서있다. 그 옆에는 박정희, 최규하, 그리고 박팽년의 18세손인 박준규 전 국회의장의 서명이 새겨진 작은 비석이 서있다.



경내의 좌측의 언덕진 곳에는 박팽년의 아버지 박중림을 모신 충의사(忠義祠)가 위치한다. 오르는 돌계단이 고적하다. 박중림은 대제학, 공조판서, 형조판서 등 많은 벼슬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세조가 등극하자 벼슬에서 물러났고 아들과 집현전 제자들의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했다가 능지처참 당했다. 사육신과 그들의 가족을 포함해 당시 죽임을 당한 이는 200여 명에 달한다. 박중림은 영조 때 신원되어 관작을 회복했고 정조 때는 단종의 능인 장릉의 충신단에 배향되었다.



충의사에서 육신사 전체가 내려다보인다. 평일인데도 육신사에는 방문객이 많은 편이다. 꽃이 피어서 일지도, 혹은 뜨거운 8월이라서. 하나둘 떨어지는 빗방울 속에서 사람들은 해설사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다.

 

박일산이 이곳에 자리 잡은 후 묘골에는 박팽년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묘리(竗里)는 지형이 묘하게 생겨서 생긴 이름이라 한다. 풍수적으로는 묘골의 형국을 '용이 몸을 틀어 꼬리를 바라보는 형'이라고 하는데 숭정사 성인문 앞에서 바라보면 나지막한 산들이 사방을 감싸고 있어 어쩐지 폐쇄적으로 느껴진다.

 

박일산이 이곳에 자리 잡은 이후 묘골에는 박팽년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구한말까지는 300여 호의 집이 골짜기에 꽉 들어차 있었다는데 지금은 30가구 정도만이 남아있다. 육신사 외삼문 앞에서 직선으로 뻗어 내려가는 길을 본다. 덩실한 기와집들을 감싸고 있는 담벼락도 단을 그리며 내려간다. 담장은 매우 높게 느껴지고 내부의 모습은 조금도 가늠되지 않는다.

도곡재는 1778년에 지어진 서정 박문현의 살림집으로 1980년대에 들어 도곡 박종우의 재실로 사용하였다.

 

도곡재는 원래 대사성 서정(西亭) 박문현(朴文鉉)이 정조 2년인 1778년에 살림집으로 지은 건물이라 한다. 이후 1980년대에 들어 도곡(陶谷) 박종우(朴宗佑)의 재실로 사용하면서 그의 호를 따 도곡재라 했다.



박종우는 인조 때의 사람으로 한강 정구의 문인이었다.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고 '달성십현(達城十賢)'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인조가 머물던 남한산성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는 아흔에 가까운 양친 때문에 직접 전투에 나서지 못했다. 1637년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자 박종우는 그동안 썼던 저술을 모두 불태우고 스스로 숭정처사(崇禎處士)라고 부르면서 생을 마칠 때까지 은거했다. 사랑마루 왼쪽의 툇마루는 후대에 달아낸 것 같다. 대청을 넓혀 누마루처럼 꾸몄는데 꼭 평상처럼 편안해 보인다. 그러나 평생 쓴 글들을 모두 불태운 심사를 생각하면 저곳에 앉아 꽃 보는 일은 엄두도 나지 않는다.

 

여행 Tip

달구벌대로 성주방향 30번 국도를 타고 간다. 문양 지나 오른쪽 왜관으로 가는 907번 지방도로 빠져나간다. 하빈파출소 지나 우회전해 직진, 하빈교 삼거리에서 좌회전해 직진하다보면 오른쪽으로 버스정류장과 충절문이 보인다. 배롱나무 가로수길을 따라 들어가면 마을 가장 안쪽에 육신사가 자리한다.

[출처 : 영남일보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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