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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상북도

경산 부호리 금호서원

by 구석구석 2022.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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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시 하양읍 부호리 114(가마실길 2길 32-1)에 위치한 금호서원(琴湖書院)은 조선 세종때 좌의정을 지낸 경암 허조(許稠 1369-1349)선생을 배향한 서원이다. 선생의 호는 경암(敬庵)이며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다. 조선왕조 통치의 기본 법전인 경제원과 속육전을 수찬하였고 국조오례의 사례의를 찬정하여 석전의식을 개정하였다.


이 서원은 효종 4년(1653) 영남 유림에서 금호동( 현 하양읍 금락리)에 사당을 창건하였으며 숙종 10년(1684)에 위판이 봉안되었다. 경종4년(1724)에 사이동(현 하양읍 서사리)으로 이건하였으며 정조14년(1790)에 사액되었다.

유생들의 숙소로 이용되었던 성경재

고종8년(1871)에 서원 정비령(대원군의 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고종38년(광무5년:1901) 훼철원지에 유허비각을 건립하고 1923년 현 위치에 유림들에 의하여 서원이 복원되었다.

내삼문
금호서원의 사당인 경덕사

경암 허조(許稠 1369-1349)는 1369(공민왕 18)∼1439(세종 21). 고려 말에서 조선 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하양(河陽). 자는 중통, 호는 경암. 판전객시사 허수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관정랑 허윤창이고, 아버지는 판도판서 허귀룡이며, 어머니는 통례문부사 이길의 딸이다. 권근의 문하이다.

 

1383년(우왕 9) 진사시, 1385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390년(공양왕 2) 식년문과에 급제해 전의시승이 되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좌보궐·봉상시승으로서 지제교를 겸해 예악제도를 바로잡는데 힘썼다.

 

1397년 전적이 되어 석전의 의식을 개정했으며, 1399년(정종 1) 좌보궐로서 지제교를 겸하였다. 태종이 즉위하자 사헌부잡단으로 발탁되었으나, 강직한 발언으로 왕의 뜻을 거슬러 완산판관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강직한 성품이 다시 인정받아 1402년(태종 2) 이조정랑, 1404년 호군·집현전직제학으로서 세자시강원좌문학이 되었다. 1406년 경승부소윤, 이듬해 예문관직제학으로서 세자시강원문학을 겸임하였다. 세자가 명나라에 들어가게 되자 집의에 올라 서장관으로 수행하였다. 이 때 명나라의 여러 제도를 자세히 조사하였다. 그리고 귀국 중에 들렀던 궐리의 공자묘를 본떠 조선의 문묘에서 허형을 제향하고 양웅을 몰아내었다.

 

1408년 판사섬시사로 세자시강원우보덕을 겸했으나, 조대림사건에 연루되어 춘주로 귀양갔다. 그러나 곧 경승부윤으로 복직했으며, 1411년 예조참의가 되어 의례상정소제조를 겸임하였다. 이 때 사부학당을 신설하고 왕실의 각종 의식과 일반의 상제를 정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태종조에 이루어진 많은 예악제도는 거의 그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다시피 하였다. 뒤에 이조·병조의 참의를 거쳐 평안도순찰사가 되었는데, 도내의 민폐를 자세히 조사·보고하면서 조세 감면과 왕의 수렵 자제를 극간하기도 하였다.

 

1415년 한성부윤·예문관제학, 1416년 예조참판·제조, 1418년 개성유후사유후·경기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세종 즉위 후에는 공안부윤·예조판서로서 부민고소금지법을 제의해 시행케 하였다. 또한 시관이 되어 많은 인재를 발탁하였다. 1422년(세종 4) 이조판서가 되자 구임법을 제정해 전곡을 다루는 경관은 3년, 수령은 6년 임기를 채우도록 정하였다. 그리고 죄인의 자식이라도 직접 지은 죄가 없으면 처벌하지 않도록 하는 법제를 만들었다. 또한 이듬해에는 『속육전』의 편수에도 참가하였다.

 

1426년 참찬·빈객이 되었다가 이조판서에 재임했는데, 이때 대간들의 간언을 두호(斗護: 남을 두둔해 돌보아 줌.)해 언로를 넓힐 것을 주장하였다. 1428년 판중군도총제부사가 되어서는 동북방의 적을 막기 위해 평안도에 성곽을 쌓고 전선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1430년 찬성을 거쳐, 1432년 다시금 이조판서에 올라 관리 임명에 공정을 기하는 한편, 효자순손과 충현들의 자손을 발탁해 예교를 장려하는 데 힘썼다. 이듬해 세종이 파저강야인 이만주 등을 치려고 하였을 때는 후환이 있을 수 있다면서 극력 반대하였다.

 

1435년 지성균관사가 되고, 이듬해에는 예조판서를 겸임하였다. 과거시험에서 사장보다는 강경을 중시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초장강경을 주장했으나, 이를 성사시키지는 못하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는 사장 중시의 경향이 강했던 때문이었다.

 

금호서원 수교당

1438년에는 세종을 도와 신숙주 등 진사 100인과 하위지 등 문신급제자 33인을 뽑았고, 같은 해 우의정 영집현전춘추관사 세자부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궤장이 하사되고 좌의정 영춘추관사에 올랐으나, 그 해에 생을 마쳤다.

 

『소학』·『중용』을 즐겨 읽었고 효행이 지극했으며,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 특히, 유교적 윤리관을 보급해야 하는 조선 초기에 태종·세종을 도와 예악제도를 정비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세종묘정에 배향되었다. 2003년 10월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49호로 지정됐다. 충효의 도리를 중시하고 인(仁)과 덕(德)을 숭상했던 조상들의 지성은 우리의 전통과 역사에 켜켜이 쌓여 오늘에까지 학원도시 하양의 위상을 되새기게 하는 본바탕으로 이어져 나갈 것이다.


[출처 : 시니어매일 2019 장희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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