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셕 시대 에세이*정의와 불의,그 기로의 선택 제1부 11. 한국전쟁 4대 영웅 선정의 진실
제1부. 1장 625 한국전쟁 그 무렵 11. 한국전쟁 4대 영웅 선정의 진실
전쟁에는 영웅이 출현한다. 우리나라 역사를 통해 가장 위대한 영웅을 추대하라면 단연코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장군이다. 어디 임진왜란뿐이랴, 우리나라는 반만년 간 수 없는 외세의 침탈에서 그때그때 영웅이 나타나 나라를 지켰다. 한국전쟁, 우리는 6.25전쟁으로 호칭한다. 역사상 가장 처참한 동족상잔은 6.25전쟁일 것이다. 그 전쟁에서의 인명 피해와 재산 손실이 역사상 가장 큰 것으로 유추하기 때문이다. 1983년, 정부와 육군본부는 전역 후 전업 작가로 창작에 몰두하고 있는 나에게 중요한 과제가 주어졌다. 한국전쟁의 영웅을 부각시켜 그 영웅의 전기 소설을 집필해달라는 내용이었다. 한편 그 작품을 원작으로 하여 KBS 1TV에서 3부작 드라마로 방영하겠다고 했다. 창군 이후 군부에 관한 홍보 프로젝트로서는 그 규모가 가장 컸다. 그 연유를 알아보니 전두환이 집권하면서 선배 장군들을 인사법까지 고치면서 임기를 단축해 60여 명을 예편시킨 데 대한 반대 여론을 누그러트리기 위한 유화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 딴에는 선배를 무시하지 않고 존중하고 있다는 의도로 선심을 쓴 셈이었다. 처음에는 내심 마음이 내키지 않아 망서렸지만 작가인 나에게 던져진 미끼로서는 욕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이 간섭만 하지 않는다면 나의 작품 세계를 넓히는 기회라고 생각해 받아들였다.
나는 관계 당국에 그 프로젝트에 참여한다는 내 의중을 알리고 이 가운데 김홍일 장군 전기 소설을 집필하기로 하였다. 집필에 착수한지 3개월만인 1984년 10월 1일 '五星將軍 김홍일'을 서문당 출간작으로 완성했다. 김홍일 장군은 옛 중국군 유일한 정규군 중장으로 2성이었고 한국군 중장 3성을 함께 해 5성장군으로 비유했다. 그러나 나의 깊은 뜻은 지금까지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에 의해 독점되어 왔던 4성장군 보다는 한 수 위라는 것을 역사에 각인하기 위해서 였다. 이어서 다음 해인 1985년에 유현종 작가에 의해 '白馬高地'를 을지출판사에서 출간, 김종오 장군 전기소설을 당국에 제출됐다. 1985년 KBS 1TV는 박경석 원작 3부작 '五星장군 김홍일' 을 3일간에 걸쳐 국군의날을 기해 골든 타임에 방영 되었고 다음 해에 유현종 원작 '白馬高地'가 역시 골든 타임에 KBS 1TV에서 방영했다. 한편, 맥아더 장군과 워커 장군은 영상 자료를 편집 해 다큐멘터리로 방영 했다. 그 후 긴 세월 동안 아무런 잡음 없이 한국전쟁 4대 영웅이 이미 공개한 김홍일, 김종오, 맥아더, 워커로 전해지고 있었다. 특히 당시에는 6.25전쟁 참전 당사자들이 거의 생존해 있어 그들의 여론도 중요시됐다. 따라서 육군본부를 거쳐 재향군인회를 통한 여론 조사에서도 4대 영웅 선정에 동의한 것으로 통보됐다. 그런데 근간에 엉뚱한 두 영웅이 출현 해 이 글에서 진실을 밝히기로 한다. 근간 세상 사람의 입에 회자되는 미국이 선정한 한국전쟁 4대 영웅이라며 맥아더 장군과 릿지웨이 장군, 한국군 측 영웅은 백선엽 장군과 김동석 대령 이름이 떠돌고 있다. 한국군측 백선엽과 김동석은 1980년대 초 조사 10명의 예비 명단에도 없었다. 다만 근래에 들어서자 일간 신문에 백선엽 장군의 전기가 계속 연재되고 있었고 일부 추종자들에 의해 백선엽 장군을 명예 원수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미국에서는 영웅이라는 호칭 개념이 우리와 달리 흔하게 사용하다 보니 생겨난 해프닝이었다. 특히 백선엽 장군의 경우 낙동강전선의 다부동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마치 구국의 영웅처럼 알려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 아님을 명백히 밝히고자 한다. 너무 자신에 의해 과장되었다. 낙동강 방어선은 총 길이가 240km에 달하며 국군 5개 사단과 미군 3개 사단이 투입되었다. 바로 백선엽은 8개 사단장 가운데 한 사람이며 그의 공적 또한 8분지 1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으로 자청해서 부임한 뒤 6.25전쟁사를 편찬하면서 철저하기 자기의 전공을 부풀렸다.
전쟁 영웅이 때때로 가짜가 돌출하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 구 일본군의 경우 태평양전쟁 중 '육탄3용사' 라는 전쟁 영웅을 부각시켜 일본 여러 곳에 동상을 세우는가 하면 교과서에도 일제히 게재되어 일본 국민들이 눈물을 흘려가며 추앙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일본군 '육탄3용사'가 조작되었음이 밝혀져 해프닝으로 끝났다. 6.25전쟁에서도 일본군 출신 장군들에 의해 가짜 영웅이 만들어져 한때 소동이 벌어졌지만 요즈음은 잔잔해졌다. 적 전차를 육탄으로 부셨다는 '심일 소령'과 '육탄5용사', 적 토치카를 육탄으로 파괴하고 장렬하게 산화했다는 '육탄10용사' 사건이 대표적인 해프닝이었다. 육탄으로 토치카를 부수고 전사했다는 '육탄10용사' 가운데 한 사람이 북한 방송에 귀순병으로 출현한 사건은 웃어 넘길 수 없는 우리의 지난 부끄러운 전사의 한 가닥이었다. |
2020.6.14 MBC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에서는 6·25전쟁 70주년 특집.
설민석은 "6월 27일 새벽에 국회가 소집되는데, 그중 절반만 왔다. 어찌됐든 수도를 사수하자고 결의하고 경무대로 달리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없었다"라고 밝혔다.
북한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한강인도교를 폭파했지만, 너무 많은 희생이 있었다. 성유리는 "다리를 건너고 있는 사람들이 보일 텐데 폭파 계획만이라도 알려줬으면 많은 희생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라며 안타까워했다. '선을 넘는 녀석들'은 한강대교에 남겨진 비극의 흔적을 찾았다. 한강대교 곳곳에 총탄의 흔적이 있었다.
또 설민석은 대한민국을 지킨 숨은 영웅들에 관해 밝혔다. 설민석은 "김홍일장군 덕분에 6일간 버틸 수 있었다. 세 번 빚을 졌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독립운동 당시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도왔고, 6.25 전쟁 당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애썼던 역사 속 숨은 영웅이었다.
한국 역사 속의 영웅들 – 오성장군 김홍일 장군
6.25 전쟁 초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었다. 시흥 육군참모학교장이었던 김홍일은 김종오의 6사단이 춘천-홍천 전투에서 북괴군 2군단을 저지하고 있는 가운데, 후퇴하는 백선엽의 1사단, 유제흥의 7사단, 이형근의 2사단 장병들을 대대 단위로 재편, 한강방어에 투입하였다. 공황에 빠져 후퇴하는 병사를 수습하기란 쉽지 않다. 이들에게는 무엇보다 밥을 먹여야 한다. 김홍일은 부녀자들을 동원 주먹밥을 만들어 배를 채웠다. 그리고는 문짝을 때어내어 ‘미군 참전’이라는 프랑카드를 큼지막이 내걸었다. 배가 채워지고, ‘미군 참전‘이라는 말에 용기를 얻은 장병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려 싸울 수 있는 병사가 되어 갔다.
시흥지구전투사령부는 7월 4일까지 북괴군을 저지하였다. 김일성이 서울 함락 후에 수일을 지체한 이유로, 첫째, 수도가 함락되면 전쟁은 끝났다는 ‘상식’ 때문이었을 가능성, 둘째, 박헌영의 남로당원 20만이 궐기하면 후방에서의 전쟁은 끝난다는 장담이었을 것이다. 김일성의 박헌영 숙청 이유다. 그러나 이나마 서울을 지탱한 것은, 김종오의 6사단이 서울 외곽으로 진출하려는 북괴군 2군단의 기동을 차질을 빚게 한 것과, 김홍일의 시흥지구전투사가 한강방어선을 1주일동안 지탱해낸 것이 결정적이었다.
6월 28일 영등포에 비래한 맥아더는 한국군이 궤산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미 지상군의 투입만이 이 사태를 막아낼 수 있다는 것을 트루먼에 건의하였다. 이때 노량진 언덕에서 분전하고 있는 한국군 병사에게 ‘귀관은 언제까지 이 언덕을 사수할 것이냐’고 물었을 때 ’명령이 있을 때까지‘라는 단호한 답변을 듣고 크게 감명을 받아 ’이러한 청년들이 있는 한국은 지켜줄 가치가 있다‘고 결심하였다는 에피소드는 한국군 장병의 감투정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한강선 방어의 主將 김홍일의 불굴의 정신이 빛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강선 방어 이후 김홍일은 1군단장으로서 미군이 본격적으로 투입되기 이전, 낙동강 전선에 이르기까지 지연전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1951년 김홍일 장군을 주중대사로 보내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五星將軍이라는 휘호를 내렸다. 국군에 元帥 계급은 없지만, 김홍일의 공은 元帥로 임하기에 족하다는 것이다.
자료출처 : 육군 김국헌 예비역소장의 시사리포트에 기고한 칼럼 중에서.
김홍일과 백선엽
육군본부가 1963년에 발행한 <유엔군 전사(戰史),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제1집은 이렇게 설명한다.
'6월 25일 현재 98,000명이었던 한국군은 6월 말에는 22,000명으로 보고받고 있었고, 수일 후에는 6 및 8사단 병력을 합하여 54,000명이 되었다. 제6사단과 제8사단을 제외한 전 부대는 최초 공격을 받아 와해되었으며 반격 작전 능력은 전혀 없었다.'
사정이 이랬으므로, 미군 참전 이전에 인민군이 좀 더 빨리 움직였다면 전쟁이 조기에 끝났을 수도 있다. 인민군 역시 미군 참전 이전에 대세를 결정짓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미 육군 제24사단 선발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부산에 상륙한 것은 7월 1일이고, 이 부대가 경기도 평택과 안성에 진지를 편성한 것은 7월 2일 밤이다. 인민군은 단 사흘 만인 6월 28일 서울을 함락했다. 이 기세로 몰아붙였다면 미군 개입 이전에 전쟁 양상이 달라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단 3일 만에 한강 이북을 점령한 인민군이 5일간이나 한강 이북에 묶인 것은 한강선 방어전투를 수행한 시흥지구전투사령부(시흥사) 때문이었다. 6월 28일까지만 해도 육군참모학교 교장이었던 김홍일 소장(1898~1980)이 시흥사의 지휘관이었다.
그간 한국에서는 백선엽의 역할만 부각됐을 뿐, 김홍일의 역할은 거의 평가되지 않았다. 하지만 6·25 때 실제 벌어진 상황을 보면, 김홍일보다 백선엽이 더 부각돼 있는 현실이 상당히 불공정하다는 판단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야전부대 지휘관도 아닌 참모학교 교장이 시흥사를 맡게 된 것은 6월 25일부터 단 3일 사이에 국군의 시스템이 대거 손상됐기 때문이다. 가장 절실한 한강선 방어를 '교장 선생님'에게 맡겨야 할 만큼 국군의 처지가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홍일은 교육 및 기획 능력 못지않게 전투 경험도 풍부했다. 21세 때인 1919년 중국으로 가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와 소련에서 항일전투에 참여했다. 또 장개석(장제스)의 중화민국 군대에 참가해 참모장 등을 역임했다. 김원봉의 조선의용대에서도 교관으로 활약했다. 또 김구가 주도하는 한국광복군에도 참가했다. 1945년 5월에는 한국광복군 참모장에 취임했다.
김홍일은 항일투쟁의 기념비적 사건에도 가담했다. 1932년 윤봉길 의거의 숨은 공신이 바로 그였다. 윤봉길이 던진 '도시락 폭탄'이 그의 손을 거쳤던 것이다. 독립투사 정정화의 회고록 <장강일기>에 이런 대목이 있다.
당시 중국 중앙군에는 한인 군관들이 여러 명 있었다. 그중에 가장 직위도 높으며 중국의 실권자인 장개석의 개인적인 신임을 받고 있던 사람은 중국군에서 왕웅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던 김홍일이었다.
그는 상해의 조병창에서도 근무했는데, 이봉창 의사가 수류탄의 성능 때문에 왜황을 죽이는 데 실패하자, 백범은 그에게 특제 폭탄을 비밀리에 제조해줄 것을 당부하였다. 그 결과 물통 모양과 도시락 모양으로 된 특제 폭탄 수십 개가 만들어졌고, 홍구(홍커우) 공원의 의거 때는 고성능의 폭탄을 사용하여 왜장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던 사열대를 단숨에 날려버렸던 것이다.'
이처럼 국군이 사실상 와해된 한국전쟁 초기에 한강 방어선을 맡은 장군은 독립군 출신이었다. 국군 상층부를 장악한 친일파들이 뒤로 물러나고 이때는 독립군 출신이 국군의 운명을 책임졌던 것이다.
소규모 소총부대로 사기충천한 인민군에 맞서
국방부 군사(軍史)편찬연구소가 2016년 6월 발행한 <군사> 제99호에 수록된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이동원 연구원의 논문 '6·25전쟁 초기 김홍일의 활동과 예편'은 이렇게 설명한다.
'시흥사는 (6월) 29일까지 예하 혼성사단으로 진지 배치를 일단 완료하였으나, 혼성사단은 이름만 사단이지 병력은 1개 연대 규모에 불과했고, 그나마 보유하고 있는 공용화기란 연대당 고작 박격포 2~3문, 기관총 5~6종에 지나지 않는 소규모 소총부대 수준이었다.'
소규모 소총부대 정도의 병력을 갖고도 김홍일은 사기충천한 인민군과 대결했다. 그 상태로 7월 3일까지 인민군 주력을 묶어놓았다. 시흥사와 김홍일의 놀라운 전투력은 소련 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보고서에서도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위의 이동원 논문에 인용된 바에 따르면, 라주바예프는 6월 30일부터 7월 1일 사이의 전투 상황을 보고하면서 "적의 조직적인 소총과 기관총 사격 및 포격으로 인해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고 말했다. 6월 28일에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이 7월 3일까지도 한강 여의도를 점령하지 못한 것은 시흥사의 놀라운 전투력 때문이었다.
서울 함락 당시만 해도 국군은 사실상 궤멸돼 있었다. 이랬던 군대가 김홍일의 지휘를 받자마자 놀라운 전투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상태에서 인민군 대군을 5일간이나 저지했다. 지휘관의 능력에서 원인을 찾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상황이다. 1964년에 <사상계> 제138호에 기고한 '나의 6·25 서전(緖戰) 회고 - 한강방어작전에서 평택 국군 재편성까지'에서 김홍일은 이렇게 회고했다. 이동원 논문에 인용된 것을 재인용한다.
'나는 결사적 결의로써, 후방 보급이 되지 않아 병사들과 같이 주먹밥에 소금물을 마시면서 삼일삼야 한잠도 자지 못하고 부하들을 고무 격려하면서 장병들의 애국심에 힘입어 참으로 기적적이고 위대한 임무를 완수하였던 것이다.'
한강선 방어전투가 상당부분을 김홍일의 개인 역량에 의존했다는 점은 국방부가 발행한 책에서도 확인된다. 1987년에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 <한국전쟁>은 이렇게 설명한다.
'어려운 전세 하에서 한강방어를 위해 편성된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지휘하게 된 김홍일 소장은 무엇보다도 먼저 장병의 침체된 사기를 되살려야 한다는 판단 아래 2, 3일 동안 굶주린 장병들에게 우선 급식을 제공하고 '미군 참전'이라고 크게 쓴 간판 수십 개를 만들어 길목마다 세우게 하였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미군의 참전이 확정된 것은 아니었으나, 철수 중인 병력들에게는 용기를 북돋아주는 활력소가 되었다.'
김홍일의 역할은 '남북한의 대결 구도'가 '한국·미국 대 북한의 대결 구도'로 바뀔 때까지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었다. 미군이 방어태세를 갖춘 뒤인 7월 3일, 김홍일은 한강 방어선을 포기하고 후퇴했다. 그날 인민군은 대규모 한강 도하를 개시했다. 너무 뒤늦은 도하였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백선엽이 아니라 김홍일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백선엽은 미군이 주도권을 잡은 상태에서 전공을 세운 데 반해, 김홍일은 미군이 없는 상태에서 인민군을 묶어놓았다. 김홍일이 없었다면, 미군의 참전이 '뒤늦은 참전'이 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김홍일이 있었기에 인민군의 도하가 '뒤늦은 도하'가 되고 말았다. 한국전쟁과 관련해 백선엽이 받는 찬사의 상당부분은 실은 김홍일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백선엽은 김홍일에게 돌아가야 할 찬사를 상당부분 차지했을 뿐 아니라 김홍일의 활동에도 적지 않은 지장을 주었다. 서울이 함락되기 전날인 6월 27일 오후,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참모총장)은 '문산지구 제1사단장인 백선엽 대령의 작전을 지도하라'는 명령을 김홍일 소장에게 내렸다.
이에 따라 김홍일 소장은 백선엽 대령의 전투 상황을 관찰했고, 백선엽 부대가 적의 포위망에 들어가고 있다는 직감을 갖게 됐다. 그래서 백선엽에게 신속히 후퇴해 한강 방어에 주력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백선엽은 지시를 거부했다. 자기는 그런 명령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총참모장이 김홍일에게 부여한 권한이 백선엽에 대한 지휘권이 아니라 작전 지도권이었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지만, 백선엽의 지시 거부는 전쟁 초반에 국군의 전력 손실을 가중시키는 요인이 됐다.
위의 회고록에서 김홍일은 "백 사단장은 '사수하라는 명령만을 받고 있는데 어떻게 독단으로 후퇴하겠는가'고 결심을 내리지 못하였다. 사단장 이상의 대부대장은 이런 때의 독단 전행(專行)이 필요하거늘 이를 이해치 못하니 가탄할 일"이라고 백선엽의 전략적 판단 능력 부족을 한탄했다.
만주군 출신들에게 밀려 전쟁 중에 2선으로
백선엽은 만주군관학교 출신이다. 만주군 출신인 백선엽 때문에 어려움을 겪은 김홍일은 한강 방어선 전투의 공을 인정받아 제1군단장이 된 뒤에도 만주군 출신들 때문에 시련을 겪었다. 9월 1일 김홍일은 만주군 출신들에게 밀려 야전 지휘관에서 물러났다.
낙동강 방어전투가 한창이던 그날, 김홍일은 제1군단장에서 육군종합학교 교장으로 전임됐다. 전쟁에서 가장 큰 역할을 수행하던 장군이 전쟁 중에 갑자기 2선으로 밀려나는 어이없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동원 논문은 정일권 같은 만주군 출신들을 부각시켜 군부 장악력을 높이고자 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계획과 더불어, 김홍일이 작전 수행 과정에서 미군과 마찰을 빚은 것이 김홍일의 2선 퇴진을 초래한 원인이라고 분석한다.
이렇게 일선 지휘관에서 물러난 김홍일은 전쟁이 한창 때인 1951년 3월 육군 중장으로 예편되고 말았다. 이승만은 물러나는 그를 '오성장군'으로 치켜세웠다. 중국군 소장으로 퇴역한 경력과 국군 중장으로 퇴역한 경력을 합쳐 그렇게 불러준 것이다.
하지만 그의 6·25 전공은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했다. 백선엽의 전공이 과도하게 치켜세워진 데 반해 김홍일의 전공은 과도하게 저평가됐다. 이동원 논문은 "6·25 전쟁기 한국군 지휘관으로서 그 역할과 성취에 비해 가장 저평가된 인물을 꼽는다면 김홍일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김홍일의 지시를 거부하며 국군의 전력 손실을 확대시킨 백선엽은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칭송받으며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돼있다.
자료 출처 : 오마이뉴스 김종성 2020.8.15 news.v.daum.net/v/20200815142100345
백마고지전투의 영웅 김종오 9사단장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발발시 38선에 배치된 4개 사단 중 김종오(金鍾五·1921~1966)의 6사단만이 전선의 적 진출을 지연시켰고, 서울의 우익으로 진공하려던 북한군 2군단의 남하를 지체시켰다. 격노한 김일성(金日成)은 군단장 김광협(金光俠)을 군단 참모장으로 좌천시키고 동북항일연군의 맹우 최현(崔賢)을 군단장으로 임명하였다. 6사단은 춘천·홍천 방면에 집중하는 적의 공격을 3일 동안 저지함으로써 김홍일(金弘壹)의 시흥전투사령부가 한강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을 버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그리하여 춘천전투는 오늘날 ‘춘천회전’으로까지 불린다.
춘천-홍천 전투에서 적을 지연시킨 김종오의 6사단은 음성군 동락리-무극리 전투에서 경계를 소홀히 하고 있던 인민군 15사단 48연대를 기습, 사살 1000명, 곡사포 14문을 노획하는 등 개전 이래 최대의 전과를 올렸다. 여기서 노획한 장비는 유엔에 소련군의 개입을 알리는 결정적 자료가 되었다. 6·25전쟁 초기에 지연전을 성공시킨 김종오의 전공은 실로 컸다.
휴전협정이 한창인때 김종오 장군은 9사단장으로 백마고지전투에 참여하였는데 이곳은 서울진격로이자 전사적 요충지로 주요보급로이기에 중공 38군과 10일간 24번이나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전투를 벌여 중공군 1만여명, 한국군 3,5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10월 15일 우리의 승리로 종결된 전투로 한국전쟁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전투이다.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백마고지전투를 가장 높게 평가하고 있으며 중공군도 한국전쟁에서 유일하게 국군에 패배한 전투로 기록하고 있다.
자료출처 : 육군 김국헌 예비역소장의 시사리포트에 기고한 칼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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