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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기한강유역

고양 북한산성과 행궁지

by 구석구석 2016.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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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동 산 1-1 북한산성 사적162호 관리사무소 02-357-9698, 02-381-2775

 

북한산성은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할 때 도성을 지키는 북방의 성으로 백제 개루왕 5년(132)에 축성되었다. 이 때 백제의 주력군이 이 성에서 고구려의 남진 세력을 막았다. 그 후 근초고왕의 북진 정책에 따라 북정군의 중심 요새가 되었다. 

 

 

개루왕 21년(475)에 강력한 고구려군이 북한산성을 7일간 공격하여 치열한 공방전 끝에 성이 함락되자 백제의 도성도 유린되어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군에 잡혀 살해당했다. 이 싸움으로 인하여 백제는 공주 웅진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연합 전선으로 막았다. 진흥왕 14년(553)에 신라는 백제의 영토였던 한성 지역을 신라의 영토로 빼앗았다.

 

진평왕 25년(603) 8월 고구려 장군 고승이 신라의 북한산성을 포위공격하자 신라 진평왕이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였으며 무열왕 8년(661) 5월 고구려 장군 뇌음신이 말갈 장군 생개와 더불어 북한산성을 20일간 포위 공격하여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이때 북한산성 성주 동타천은 성 내 주민을 합한 2,800명의 인원으로 필사 결전을 감행하여 이 산성을 방어하였다. 

 

* 주요문화재
1)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터(사적 제 228호)
2) 마애석가여래좌상(보물 제 215호: 종로구 구기동),
3) 마애석가여래입상(보물 제 657호: 은평구 진관내동)
4) 태고사 원증국사탑비(보물 제 611호: 고양시 북한동)
5) 태고사 원증국사탑(보물 제 749호: 고양시 북한동)
6) 탕춘대성(지방문화재 제 33호: 종로구 신영동, 홍제동)
7) 연산군묘(사적 제 362호)

 

기념물 제160호 북한산성행궁지

 

행궁은 유사시 왕의 행재소가 되는 곳으로 북한산성이 축성을 시작하기 1달 전인 숙종 37년 5월 25일에 당시 산성의 공사를 주관하던 감동당상인 김우항에 의해 건립이 처음 제기되었다. 동왕 5월 왕의 윤허를 얻어 8월부터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바위가 많고 지세가 험하여 공사에 큰 어려움을 겪자 조정에서는 영건청을 두고 호조판서 김수항과 공조판서 이언강을 주관당상으로 하여 공사를 진행하였다. 

 

목재는 산성밖의 삼천동에서 얻어서 지었는데 동왕 37년 10월 까지는 내전의 기와, 외전의 정초가 공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해 2월부터는 다시 내전의 창호·청판·토역 등의 수장공사와 외전의 입주상량 등 일이 순서대로 진행되어 숙종 38년 5월에 낙성을 보게 되었다. 《북한지(北漢誌)》에 의하면, 행궁 규모는 내전이 좌·우 상방 각 2칸, 대청이 6칸, 사면퇴 18칸을 합한 총 28칸이었다. 이 정전 외에 또 좌·우각방·청·대문·수라소 등의 부속건물이 35칸이나 되었다. 외전 역시 내전과 같은 규모의 정전 28칸, 내행각방 12칸을 위시한 루(樓)·청·고간(庫間)·대문 등 총 33칸의 부속 건물이 있었다.

 

이 모든 건물을 합치면 모두 130여 칸에 달하는 많은 건물들이 즐비하게 있어 그 위용을 자랑하였다.
그 후 일제 시대까지 그 건물이 보존되어 있었으나 언제 지금과 같은 모습의 터만 남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행히 일제 시대에 찍힌 사진이 남아 있어 당시의 모습을 알 수 있을 뿐이며 단국대학교에서 실시한 발굴조사를 통해 정확한 규모와 성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 경기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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