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우거진 산 속 “바스락” 끝 없을 듯 긴긴 낙엽길
영천시 자양면 보현리에 위치한 작은 보현산(839m)은 여러모로 특이한 산이다. 지척의 명산인 보현산(1,126m)과 기룡산(966m)에 비해 지명도가 떨어지고 산의 높이가 낮지만 등산객들은 꾸준히 증가한다. 혹자는 산행 중 조망이 없어 답답하다고 하지만 그것도 생각하기 나름이다. 오지의 산이라 호젓한 산행이 약속되고 조망이 막혔다는 건 그만큼 온 산이 숲으로 우거졌다는 의미다. 등산하는 내내 멋진 숲길이 연이어져 감탄을 자아낸다.
등산의 들머리와 날머리는 거동사(巨洞寺) 입구의 ‘보현골 돌공원’. 조약돌로 미로를 만들고 돌탑을 쌓아 놓은 작은 공원이다. 공터에 ‘보현골 자연탐방로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주차를 한 다음, 작은 다리를 건너 임도를 따르면 우측 산자락에 거동사가 숨겨져 있다. 절로 가는 돌계단을 오르면 정면으로 운치 있는 소나무 숲 아래에 대웅전 기와지붕이 올려다보인다.
고즈넉하면서도 단출한 거동사는 신라 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전통사찰로 조선시대까지는 규모가 큰 사찰이었다고 한다. 한창 융성할 때는 밥을 짓기 위해 쌀을 씻으면 쌀뜨물이 계곡을 따라 3㎞ 아래인 충효사까지 흘러내릴 정도로 신도가 많았다는 것이다.
신도가 하도 많이 찾아오자 주지 스님이 유명한 대사를 찾아가 의논을 했다고 한다. 부도군을 옮기면 절을 찾는 사람들이 뜸해질 것이라는 말을 전해 듣고 거동사의 부도탑을 정면 산기슭으로 옮기자 거짓말처럼 신도의 발길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쇠퇴해 지금은 거동사만 남게 되었다고 전한다.
얼마 전, 거동사가 국가보훈처로부터 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 구한말 강제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구국의 뜻을 담은 고종황제의 밀지를 품고 분연히 의병을 일으킨 산남의진(山南義陣) 의병대 정환직 대장과 그 아들 정용기 대장이 이곳 자양면 출신이다.
산남의진은 구한말 항일운동의 대표적 의병으로 영천과 경북 남동부 일대에서 이름을 떨친 의병을 말한다. 두 장군이 많은 전공을 올리고 1907년 순국하자, 1908년 거동사에서 먼저 가신 두 장군과 의병들의 위령제를 모시고 흥해 출신 최세윤을 대장으로 추대해 다시 의진을 일으켜 끝까지 항전했다고 한다.
대웅전 좌측으로 난 돌계단을 오르면 계단 끝에 산신각이 보인다. 산신각 앞 우측으로 등산로가 연결된다. 사찰주변이 소나무 숲으로 에워싸여 있어 좀체 보기 드문 풍광을 연출한다. 50m쯤 우측으로 오르면 등산로는 능선을 따라 곧장 북쪽으로 치고 오르기 시작한다.
곳곳에 이정표가 친절하게 세워져 있다. 해발 360m 지점에서 등산을 시작하고 작은 보현산까지 거리가 짧다고는 하지만 계속 오름길의 연속이라 꽤나 힘이 든다. 가을에는 온갖 참나무들과 개옻나무가 우아하고 아름다운 단풍을 연출한다.
정상으로 치고 오르는 중간지점에서 뒤돌아보면 기룡산 정상과 갈미봉이 바라다보인다. 군데군데 이정표와 벤치가 놓여 있다. 주능선에서 작은 보현산과 수석봉으로 갈라지는 삼거리를 만나면 등산로가 비로소 완만해진다. 우측은 대태고개를 거쳐 수석봉 가는 길, 좌측이 작은 보현산과 보현산으로 가는 등산로다. 여기서부터는 시와 도의 경계길, 우측이 포항 죽장면 두마리, 좌측은 영천시 자양면 보현리다.
10분이 경과되기 전 바위 지점에 도착한다. 우측으로 기상레이더관측소가 서 있는 면봉산(1,113m)과 쌍둥이처럼 보이는 베틀봉(930m)과 무명봉이 나란히 보인다. 페이스가 좋은 사람은 작은 보현산 정상까지 1시간 남짓이면 충분히 오를 수 있다. 정상석과 삼각점이 있는 작은 보현산에서는 나뭇가지에 가려져 탁 트인 조망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정상에서 10m쯤 더 가면 편평한 돌로 만든 식사용 테이블 같은 바위지대가 있다. 이곳에서 정면 숲 사이로 보현산 천문대가 보이고 10시 방향으로 팔공산이 보인다. 하산은 직진하며 내려선다. 집채보다도 큰 바위와 그보다 조금 작은 바위가 나란히 우측에 서 있다. ‘범바위’라고 하는데 오래전부터 마을 사람들이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이곳부터 푹신푹신한 융단길이다. 바스락거리는 낙엽 밟는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린다. 잠시 후 놓쳐서는 안 될 볼거리가 좌측에 숨겨져 있다. 등산로에서 30m쯤 들어가면 여성이 다리를 하늘로 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독특한 소나무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다소 외설스러워 보이는 나무라 연리목이라는 이름은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
완만한 평지길에서 좌측으로 오름길이 이어진다. 숯가마터 같은 구덩이 두어 개를 지나면 이정표가 세워진 네거리다. 우측은 보현산 천문대, 직진은 정각별빛마을, 왼쪽이 갈미봉으로 가는 길이다. 부드러운 낙엽길이 한참 이어지더니 오름길이 다시 시작된다. 대형 파란 물통을 지나면 구들돌 채석장이다. 여러 기의 돌탑들이 바위 위에 쌓여 있는데 여기서 처음으로 탁 트인 전망이 열린다. 전방으로 작은 보현산이 우뚝하고 그 옆 좌측으로 베틀봉, 면봉산, 우측으론 수석봉이 보인다.
채석장에서 5분이면 옛 봉화대인 갈미봉이다. 이정표 나무에 ‘갈미봉’이라고 빨간 글씨가 적혀 있다. 좌측 지능선으로 내려서면 거동사 입구까지 약 1.2㎞. 잠시 가파른 길이 시작되지만 푸근한 낙엽길이 계속 연이어진다. 보현지 갈림길을 지나면서 등산로가 점점 좁아지더니 잠시 후 좌측 산허리 아래로 급격하게 등산로가 꺾인다. 급경사 지그재그길을 조심스레 내려서면 10여 분 후 등산을 시작했던 거동사 입구 돌공원에 도착한다. 갈미봉에서 50분 정도 걸린다.
보현골 돌공원에서 등산을 시작해 거동사`작은보현산`갈미봉을 거쳐 원점회귀하는 데 순수 등산시간은 서너 시간 정도다. 최근에 영천시가 등산로 곳곳을 지나칠 정도로 완벽하게 이정표와 거리를 표기해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인근에 들러볼 만한 볼거리가 많다.
영천댐과 댐 밑의 삼매리에는 매산고택이 있다. 성역화 작업을 마친 임고서원과 ‘아름다운 숲 대상’에 빛나는 임고초등학교도 차량으로 이동하면 20분 내외다.
자료 - 매일신문 글`사진 지홍석(수필가·산정산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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