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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기도

양주 봉양동 칠봉산 천보산 회암사지

by 구석구석 2014.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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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 수놓은 듯한 망경대 진달래 피면 ‘만산홍화 비단 병풍’

근래에 경기도 양주에서 가장 주목받는 산은 천보산(天寶山)과 칠봉산(七峰山)이다. 두 산은 양주시와 포천시, 동두천시의 경계를 이루며 이웃한다. 처음 산 이름을 접하거나 다녀오려는 사람들은 해발이 높은 칠봉산(506.1m)을 선호하지만 등산을 갔다 온 사람들은 천보산(423m)을 훨씬 더 많이 기억한다. 그 이유는 명료하다. 매화꽃으로 수를 놓은 듯 아름다운 바위산인데다 서남쪽의 회암동 자락에는 조선시대 때 대가람을 이루었고 동방에서 첫째라 기록된 회암사지가 있어서다.

 

산 하나만을 목적으로 하면 등산 시간이 다소 짧다. 그래서 두 산을 연계하는 등산을 주로 많이 한다. 여러 곳의 시작점이 있으나 크게 두 군데로 압축된다. 봉양네거리와 회암사 입구다. 3번 국도상에 있는 봉양네거리는 양주시와 동두천시의 경계로, 우측에 칠봉산 등산안내도가 보이고 좌측에 산으로 접어드는 임도가 보인다. 200여m 들어서면 산으로 바로 올라붙는다. 

매봉정상

낮은 해발임에도 주능선과 칠봉산 산정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는 조금 힘들다. 양주와 동두천의 경계를 이루는 칠봉산의 다른 이름은 어등산, 조선시대 때 임금이 올랐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산의 주능선에는 발치봉, 응봉, 깃대봉, 투구봉, 솔치봉, 돌봉, 석봉이 뚜렷하다. 순탄하면서도 아기자기한 능선이라 오르내리는 재미도 있거니와 우측은 직각의 석벽이라 조금의 스릴도 느낄 수 있다. 옛 선인들은 이 산을 가리켜 만산홍엽의 금병(錦屛)으로 비유했는데 진달래가 만개하는 봄에는 만산 홍화를 이룬다고 한다. 

 

7개 봉우리는 지명유래가 있다. 임금이 처음 등산하기 위해 떠난 곳이라 하여 발리봉(發離峯), 임금이 수렵에 필요한 매를 날렸던 곳이라 하여 응봉(鷹峯), 임금이 수렵하러 나가 수렵표시 깃발을 꽂았다 하여 깃대봉(旗臺峯)이다. 임금이 돌이 많다고 말한 곳이라 하여 석봉(石峯), 임금이 이곳에 쉬니 시위(侍衛)군사가 갑옷과 투구를 풀어놓았다 하여 투구봉(鬪具峯), 임금이 떠나며 돌이 많으니 뜻하지 않은 일에 조심하라고 당부하였다 하여 돌봉(突峯), 임금이 군사를 거느리고 떠날 준비를 하던 곳이라 하여 솔리봉(率離峯)이다. 그런데 어느 시대 어떤 임금과 연관된 봉우리인지 정확한 유래가 기록되지 않아 다분히 작위적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첫째 봉우리는 발리봉, 바위봉으로 시멘트 시설물에 깃대가 세워져 있고 이정표가 있다. 칠봉산은 산 아래 남쪽에서 바라보면 거대한 석벽이나 막상 등산을 시작하고 나면 군데군데 바위무더기만 보일 뿐 암벽은 만나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정상인 돌봉에 도착하기 전 가장 눈길을 끄는 봉우리는 매봉, 집채보다도 훨씬 큰 바위가 쌓인 듯한 모습에 등산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등산로 곳곳에 이정표와 나무벤치가 많이 설치되어 있다. 한국전쟁 발발로 죽은 전사자의 유해를 처음 발굴해 낸 장소와 정자를 통과해야 투구봉과 말봉이 나온다. 말봉은 칠봉에 들어가지 않아 이름만 있고 유래가 없다. 정상인 돌봉은 말봉과 지척이다. 등산로에서 우측으로 약간 벗어난 지점의 가장 높은 바위봉에 깃발 모양으로 만든 조형물에 ‘칠봉산 정상’이라 쓰여 있다. 우측에 정상석이 엎드려 있고 정상 표지석 앞쪽의 공터에 밧줄로 테두리를 만든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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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리봉을 통과해 내려서면 칠봉산과 천보산의 경계인 장림고개. 포장된 임도 위에 새 다리가 설치되어 있고 좌측 다리 아래에는 오리고기와 차를 파는 편의 시설물들이 있다. 고개에서 천보산 가는 길은 가파르지 않다. 완만한 주능선에서 이따금 뒤돌아보면 비로소 칠봉산이 거대한 바위봉우리란 걸 실감하게 된다. 제5보루와 천보산 휴양림으로 가는 갈림길을 지나면 천보산 정상이다.

천보산의 유래는 이러하다. 조선시대 어떤 임금이 난을 당하여 이 산에 피신하였다가 난리가 끝나자 목숨을 건진 이 산을 금은보화로 치장하라고 신하에게 명령했다고 한다. 그러나 난리가 끝난 후라 금은보화를 구하기가 어려워 신하들이 금은보화 대신에 하늘 밑에 보배로운 산이라는 뜻으로 그 이름을 지어주자고 간청해 천보산(天寶山)이라 불렸다고 한다. 남해 금산의 전설과 비슷하다. 

천보산 남릉 암봉인 405m봉에서 서북으로 본 칠봉산 정상. 칠봉산 왼쪽 멀리는 파주 감악산이다. 회암사가 아찔하게 내려다보이는 곳인 405m봉 서쪽과 남쪽은 십 수 길 절벽이다. 주변이 밟으면 미끄러운 마사토磨砂土 지역이다. 추락을 조심해야 되는 곳이다 출처 : 월간산(http://san.chosun.com)

천보산 정상에는 맑은 날이면 운악산과 주금산, 죽엽산까지 보인다. 남쪽으론 저 멀리 수락산과 도봉산이 보이고. 지척으론 임꺽정으로 유명한 불곡산과 도락산 등이 확연하다. 천보산의 최고 절경 지대는 회암사 내리막길 방향에 있는 만경대, 바위로 형성된 봉우리에는 아찔한 바위절벽이 숨겨져 있고 드러누운 분재 같은 소나무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기이한 소나무들과 어우러진 주변의 풍광이 한 폭의 선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보산 108바위와 정상

밧줄을 잡고 내려선 안부 우측에는 108바위 전망대가 있다. 고승인 나옹선사와 무학대사, 지공선사와 연관된 부도와 비석들이 보물급 문화재로 등록되어 회암사 주변에 있다. 무학대사홍융탑(보물 제388호), 회암사쌍사자석등(보물 제389호), 무학대사 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1호) 등이다. 특히 회암사 절 입구에는 고려 말에 세워졌다가 폐허가 된 회암사지(사적 제128호)와 회암사지 박물관도 있다. 

 

봉양 네거리에서 칠봉산`천보산`만경대를 거쳐 회암사지 입구까지 내려서는데 약 8.5㎞에 3~4시간 정도의 등산 시간이 소요된다. 산행을 마치고 하산지점에서 여유 있게 유적지를 두루 둘러보는 산행을 계획하려면 봉양네거리, 아기자기한 등산의 묘미에 화려한 암봉미를 눈으로 즐기는 산행을 하려면 회암사지 입구에서 시작한다. 어느 지점에서 등산하느냐에 따라 산의 경치와 이미지가 확연하게 달라진다. 

 

지금은 폐허가 된 회암사지는 12세기 중엽 고려시대 때 창건한 우리나라 최대의 사찰. 조선 초 무학대사가 주지로 재임했고, 이성계도 태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 회암사에서 기거했다.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도 이곳에서 불도를 닦았다고 전한다. 이색의 ‘목은집’에 의하면 ‘3천여 명의 승려가 머무른 곳으로 건물은 262칸, 높이 16척의 불상 7구와 10척의 관음상이 있다. 건물의 크고 화려하기가 동국 제일이며 중국에서도 이렇게 큰 사찰을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 자료 : 매일신문 2014.3  지홍석(수필가·산정산악회장)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1호(1974년 9월 26일) 무학대사비

무학(1327~1405)은 고려말 조선초의 승려로, 속성은 박(朴), 이름은 자초(自超), 호는 무학(無學)이다. 18세에 출가하여 소지(小止)에게서 구족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요운산 혜명(慧明)에게서 불법을 배운 후 묘향산에서 수도하였다. 1353년(고려 공민왕 2) 원(元)나라 연경(燕京)에 유학하여 혜근(惠勤)과 지공화상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1356년에 귀국하였다. 1392년 조선 태조에게서 왕사로 책봉되었고, 회암사의 주지로 머문 뒤 금강산 금장암(金藏庵)에서 1405년 입적하였다.

 

탑비는 총 높이 340cm, 비신 높이 223cm로 높직한 사각 하대 위에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장방형의 지붕돌을 얹었다. 지붕돌의 네 귀퉁이는 하늘을 떠받들 듯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위를 향하고 있다. 무학대사 부도와 석등이 매우 화려하고 공력을 들인데 비해, 부도비는 특별한 조각이나 문양 등이 없어 단조롭고 소박하다.

 

비문은 변계량이 짓고 공부의 글씨로 하여 비문을 새겨두었다고 하나, 순조 21년(1821)에 광주 유생 이응준에 의해 파괴되었고, 순조 28년(1828)에 다시 비를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의정부에서 3번 국도를 따라 동두천 방면으로 직진, 덕정사거리에서 덕정방향 국지도 56호선 도로로 우회전한다. 5.1km쯤 가다보면 왼쪽에 푯말이 보이는데 이곳에서 6백m쯤 지나면 바로 회암사터가 있다. 발굴현장 뒷편 중턱에 회암사가 있다.

 

천보산 남쪽 자락 밑에 자리한 회암사지에 도착하면 1만여평에서 진행되는 경기도문화재단 조사원들이 벌이는 발굴작업 모습이 제일먼저 눈에 띈다. 지금은 제1단지에 대한 발굴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 양주시청

회암사의 창건은 기록이 없다. 단지 각종 자료에 따라 그 시기를 추정할 뿐인데 현재는 고려중기 이전 존재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처음 회암사는 그리 큰 규모가 아니었다고 전해진다. 인도 스님인 지공화상의 제자인 나옹선사가 지금의 규모로 중창했다.

 

고려말부터 왕실과 관련이 깊었다는 회암사는 이후 조선시대에도 그 관계를 유지했다. 무학대사가 기거한 회암사를 태조 이성계가 빈번히 방문했다고 전해지는데, 임금의 ‘행궁’역할을 했던 ‘정청’이 절터 제일 뒷편에서 발견됐다. 정청 주변에는 경호팀(?)들이 기거했을 것으로 보이는 숙소가 있다.

 

회암사는 어린 명종을 대신해 수렴청정한 문정왕후 때 최대 전성기를 맞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정왕후의 죽음을 계기로 쇄락의 길을 걷게 된다. 당시 문정왕후의 총애를 받으며 불교중흥정책에 중심에 섰던 회암사의 허응당 보우(普雨)는 유생들에 의해 제주도로 유배되고, 거기서 피살된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9호 지공화상 부도와 석등

1370년 원나라에서 제자 달예(達睿)가 지공화상의 사리를 봉안해 고려로 가져오자 제자인 나옹이 서둘러 회암사에 봉안했다. 맨 앞단에 부도비를 세우고, 한단 위에 석등과 석상·부도가 한 줄로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부도는 팔각 지대석 위에 3단의 기단을 두었다. 우람한 크기에 비해 문양이나 조각 등이 전혀 없어 단조롭고 수수하며, 가운데 부분의 돌만 배가 볼록하다.

 

탑신은 장식이 없고, 거의 둥근 공 모양이다. 전체적인 비율에 비해 옥개석이 크고 상륜부는 한 돌로 조각되었고 길쭉한 인상을 풍긴다. 석등은 장명등과 같은 형태로, 방형의 상·중·하대석 위에 2짝으로 된 화사석을 마주 붙여 화창이 앞·뒤 두 곳만 나 있고 그 위에 사각 지붕을 얹었다.증대석이 잘룩한 허리처럼 날렵한 데 비해 화사석을 받친 상대석이 큼직하고, 화사석 위의 지붕돌은 석등 전체를 덮을 만큼 크고 두툼하다. 석등의 옥개석은 선이 반듯한 사각형에 낙수면도 곧아 완곡한 느낌을 준다. 지붕 위에는 상륜부가 가지런히 올려져 있다. 

[경기관광공사]

회암사지 사리탑

회암사지 사리탑은 1464년 효령대군이 회암사에서 연 원각법회를 계기로 건립된 진신사리 탑으로 회암사 폐사 후 훼손된 채 방치되다 광복 직후 회암사 스님과 지역 주민들이 다시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1974년 회암사지 부도탑이라는 이름으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2호로 지정됐고 1999년 발굴·해체 복원조사, 2012년 보존처리를 통해 현재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경기도 민속자료 제1호(1978.10.10) 회암사지맷돌

회암사지 동쪽에 2개가 있는데, 북쪽과 남쪽에 1개씩 있다. 북쪽 맷돌은 숫맷돌의 형태이고 남쪽은 암맷돌이 얹혀져 있는 상태이다. 맷돌은 크기가 비슷한 화강암 1매(枚)에 매함지와 맷돌이 함께 만들어져 있다. 1기의 숫맷돌은 양각(陽刻)으로 만들어져 있으나 다른 1기의 숫맷돌은 음각(陰刻)으로 되어 있다.


현재 암맷돌 1기는 없어졌다. 크기는 숫맷돌 1기는 긴지름 173cm, 짧은 지름 151cm이고, 암맷돌은 반지름 31.5cm, 두께 24cm이다.  서쪽으로 향해있는 주둥이는 타원형에 가까운 모양으로 주둥이가 짧은 조선시대 맷돌과는 차이가 있다. 안쪽에 놓인 둥근 마판(磨板)의 가운데에는 암맷돌과 연결하는 중쇠를 박았던 구멍이 나 있으며, 북쪽 맷돌의 마판은 동쪽이 더 닳아서 그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맷돌을 돌리는 맷손을 심부에 박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이 특이하다.

 

천보산 쪽으로 더 올라가면 순조때 부도 및 부도비를 중수하면서 지은 현 회암사가 있다. 이 곳에는 무학대사비를 비롯해 회암사지 쌍사자석등, 나옹선사 부도 등이 보존돼 있다. 그리 높지 않은 천보산(423m)까지 산책 삼아 올라가 양주시내를 내려보는 것도 좋을 듯. 인근에는 왕이 올라 ‘어등산’이라 불리던 칠봉산(506m)도 있다.

 

회암사가 왕실의 사랑을 받으며 번영을 구가하던 시기. 백성들은 탐관오리들의 횡포에 고통의 나날이 지속됐다.

 

식사할 곳

 지행동 일원 지행역 출입구 남쪽 골목 안 식당거리 왼쪽 맛을 찾는 사람들(863-0201), 이모네 포차(868-8666), 우거지 순대국(866-3850), 아리랑 숯갈비(868-2435), 식당 거리 오른쪽 일초닭발(858-3782), 솥뚜껑 삼겹살(864-9288) 등 이용.

 지행초교 앞 사거리 다모칼국수·손만두(863-3323)식당 오른쪽(남쪽) 공인중계사 사무소 앞 ㅓ자 삼거리에서 왼쪽(동쪽) 사당골 은행나무 방면길인 식당거리 왼쪽 지랄돼지(010-6732-3392), 놀부네 닭갈비 (863-9229), 세자매 곱창집(862-6761), 바른중식(861-3735), 식당가 오른쪽 착한삼겹살(859-9293), 부대찌개 돌구이(857-1616) 등 이용.

 봉양동 일원 31번 버스종점에 자리한 칠봉산 하누식당(010-8006-4684) 이용. 

 덕정역 일원 덕정역 앞 버스정류장에서 동쪽 도로 건너편 오른쪽 덕정 삼거리 방면 김밥나라 덕정점(866-3939), 북경중화요리(857-7888) 등 이용.

 회암동 일원 회암사지 들머리인 56번도로 남측 한정식 댓돌(866-8367), 녹각삼계탕(865-2616) 등 이용.

출처 : 월간산(http://s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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