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주영의 낙동강을 따라서
문화와 역사의 젖줄, 낙동강
낙동강의 걸음새는 느긋하다. 황금빛 모래톱을 끼고, 야트막한 언덕을 허리춤에 안고 도도히 흐르는 물길은 서두르는 법이 없다. 하구의 을숙도에서 강원도 태백까지 거슬러 오르면서 물길은 그 끝마디마다 기품있게 반촌(班村)을 품고 있다. 낙동강 상류, 북부 경북지역은 옛부터 양반문화의 보고였다. 유교, 불교문화 유적과 민속문화까지 엄격하게 보존된 이곳에 오면 시간이 더디게 간다. 개발이 비켜간 탓인지 산간오지에선 소달구지가 도로를 걷고, 촌사람의 억센 사투리가 정겹게 인사를 건넨다. 1300만 영남의 젓줄은 사람 내음 물씬하고 엄마의 품처럼 포근하다.
낙동강 1,600여개 발원지의 한자락, 청송 보현산 줄기에서 소설가 김주영(70)은 자랐다. 주왕산 고개를 둘이나 넘고 나룻배로 강을 건너 꼬박 하루를 걸어야 안동에 갈 수 있는 오지에서, 홀어미아래 지독한 궁핍의 시기속에서. 대학 1학년때 박목월 시인에게 시를 보여주고는 "운문에 소질이 없는 거 같다"는 일갈에 고향에 내려간 그는 단조로운 경리 일을 하며 권태를 술로 달랬다. 서른셋에 마음을 고쳐먹고 `휴면기`로 등단한 그는 이후 거침없이 `객주(客主)``활빈도``화척``야정``아라리 난장` 등의 장편소설을 쏟아냈다. 몇 해를 전국의 장터를 뒤지는 노력과 조선시대의 토속어로 떠돌이 행상의 삶을 그려낸 `객주`는 왕들의 삶에서 민초들의 삶으로 역사소설의 물줄기를 바꾼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엽연초조합의 직원이었던 그를 소설가로 이끈 것은 어릴적 하릴없이 장거리를 배회하던 그의 눈앞에 펼쳐졌던 흥겨운 기억, 행상들이 저마다 품은 사연이었다.
"마을에서 면사무소로 올라가는 오르막길 들머리에 궁핍을 겪었던 시절의 집이 있었다. 울바자 너머로는 언제나 먼지와 허섭스레기가 흩날리는 장터거리가 있고, 거기선 닷새마다 한 번씩 저자가 섰다. (…) 저자가 서는 날엔 꼭두새벽부터 노점상들과 장꾼들이 몰려들기 시작해서 아침나절이 되면 그 넓은 장터가 사람들의 아우성으로 꽉 들어찼다."
자전소설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 도입부는 필시 그 기억에서 건져올렸을게다. 분잡스러운 장터의 아우성은 물길이 멈추는 포구로부터 뻗쳐나왔다. 옛부터 낙동강 자락의 촌락은 물길 언저리에서 발달했다. 안동 대항진, 예천 용궁 삼강진, 상주 낙동진·회촌진·비가진·죽암진은 아직 그 흔적이 남아있다. 다리와 철길이 들이닥치기전 1980년대 초반까지도 100여개의 산간오지 나루는 목선을 띄워놓고 사공의 노랫소리를 실어날랐다.
# 이 시대의 마지막 주막
객주의 작가를 만나기엔 이곳이 제격이다. 예천 초입 풍양면 나루터에 위치한 삼강 주막. 필시 객주 속 인물들이 먹고 마시고 누웠음직한 이 시대의 마지막 주막이다. 영남에서 서울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해 과객과 객꾼이 끊이지 않아 장날이면 나룻배가 30여차례를 오갈 만큼 분주했다. 삼강나루의 모습이 사라진 것은 1934년의 갑술대홍수의 탓. 20세기 초에 지어진 이 자그마한 주막은 2006년까지 구순이 넘게 지켜오던 유옥연 주모할머니가 세상을 뜨면서 방치되다 이듬해 복원됐다. 영남에서만 먹는다는 배추지짐이와 막걸리 한사발을 들이킬 수 있는 곳. 주모들의 걸죽한 사투리가 기억을 되짚는다.
"저 아래 강 따라 늦은 봄이며 배가 소금을 오본이(가득) 싣고 안동까지 갔거든. 봄되면 장을 담으니껴 소금이 오는거지. 배가 내려갈 적은 나락 팔아서 갔제. 물이 얕으면 사람 대씨(여럿)서 끌거나 배쭉대로 밀고 그래 올라가더만…."
`주모`에게 한 상을 받고서 일어선다. 이제는 뿅뿅다리를 건널참이다. 20년전까지는 바지를 걷어붙이고 육지속의 섬 `회룡포`로 들어가던 길목에 놓인 구멍이 숭숭 뚫린 허술한 다리다.
# 굽이마다 백사장을 빚어낸 강
낙동강은 맨발로 밟아야 제맛이다. 활처럼 휜 구비마다 뽀얀 백사장이 숨어있다. 거친모래와 자갈이 휩쓸려올법한 상류임에도 바스락거리는 고운 모래가 밟힌다. 회룡포 마을도 마찮가지다. 맑은 물과 어우러진 천혜의 공간에서 봄이면 진달래꽃 따다 화전을 부쳐먹고, 여름이면 반짝이는 모래밭에서 두꺼비집을 지어보고, 가을에는 강낭콩, 포도를 따먹고, 겨울이면 장작불 지펴 고구마도 구워먹어 봄직하다.
한삽만 뜨면 섬이 되버릴 듯한 아슬아슬한 마을은 여남은 가구가 사는 소박한 촌락이다. 땀흘리는 농부에게 인사를 건네고 회룡대로 향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뒤 전국 세곳의 명산에 세웠다는 비룡산 장안사에서 조금만 오르면 회룡포가 눈 앞에 펼쳐진다. 송송 솟는 땀을 훔치며 눈앞의 장관에 감탄한다. 얼마나 긴 세월이 깍고 다듬어 이런 물도리를 만들었을까.
안동까지 와서 하회마을을 빠뜨릴 순 없다. 강가 모래톱 위에 나룻배가 하나 서있다. 물길을 건너 깍아지른 듯한 부용대(芙蓉臺)에 오르기 위해 배에 올랐다. 사공의 완력으로 배는 물살을 헤친다. 부용대 아래 펼쳐진 하회마을은 과연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의 형세다. 그래서인지 풍산류씨의 하회마을은 큰 인물을 유독 많이 배출했고, 한번도 큰물이 넘친적도 없다니 신비롭기 그지없다.
동서남북 제각기 자리잡은 초가집과 기와집들의 예스러움과 돌담길의 아늑함은 조선시대로 온듯 착시를 일으킨다. 발토랑의 작물과 코와 눈을 간지르는 들꽃의 유혹은 물론이고, 강변의 솔밭을 따라 걷는 맛도 일품이다. 영남 음식이 짜기만하고 맛없다는 생각도 안동 국시, 간고등어, 헛제사밥을 맛보고 날려버렸다.
# 자연을 품에 안은 서원
16세기 소수서원을 기폭제로 전국으로 퍼져나간 서원에서는 선현에 제사를 지내고 원생을 길렀다. 작가는 "영남에 집중한 서원이 조선후기 정신사상의 뿌리였다"고 말한다. 퇴계의 제자들이 이어간 학문의 터에서 길러진 것은 고집스런 성리학만이 아니었다. 낙동강을 보며 시를 읊었고, 고매한 선비정신도 다잡았다. 서원에는 단청의 장식도 금했다. "이 물길을 따라 학문과 사상도 흘러갔지. 낙동강 상류에 서원이 있었던 것도 그 탓이고."
그도 어릴적 고향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대하소설을 쓸수 있었던 원동력에는 회초리와 함께 했던 고생스런 학습의 힘도 있었다. "더이상 대하소설이 나오지 않는 것은 한문과 역사를 더이상 젊은 세대가 알지 못하는 것 때문이 아닐까"라며 혀를 차는 모습이 씁쓸하다.
하회마을에서 뒷켠에 자리잡은 안동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과 그의 셋째 아들 류진을 모신 곳이다. 특히 그가 마흔 살에 드러누워 세월의 회한을 말했던 병산서원 `만대루`는 건축가들의 필답지로 꼽힌다. 벽을 제거하고 난간을 낮춰서 화려하진 않치만 강의 정경을 품에 안았다. 만대루의 너른 자리 중 햇볕이 잘 드는 곳을 골라 앉아, 눈 앞에 펼쳐진 병산과 낙동강을 바라보면 세상의 근심이 잊혀진다. 작가는 주춧돌을 손짓하며 "기둥을 받친 돌조차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앉혔지. 저 나무가 삐뚜름히 밑둥 위에 올라앉은 건 그 때문이야"라고 말한다.
"강을 품에 안은 저 자태를 봐. 어찌 반하지 않을 수 있겠나."
낙동강은 가락국의 동쪽에 있다고해 붙여진 이름, 삼국시대 가락국은 지금의 상주 땅이었다. 낙동강 상류 기행의 종착지는 상주 경천대다. 낙동강 줄기 중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히는 전망대 절벽아래 굽이진 강은 푸른 들판을 안고 풍성함이 넘실댄다. 강을 따라 달리며 북부 경북의 예스러운 풍광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강이 품고 있는 길은 평화롭고 정취가 넘친다. 그 길을 걷지 못하겠다는 말은 축복을 걷어차는 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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