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라고 했던가. 골이 깊으니 물길 또한 길다. 영남알프스의 주산 가지산에서 시작한 물이 생금비리를 지나며 한 골을 이룬다. 문복산에서 흘러내린 물은 계살피 계곡이 되고, 지룡산 배너미재에서 내려온 물까지 모여 삼계 계곡이다.
그런데 물이 합쳐지는 삼계리에서 한 뼘만 하류로 내려오면 계살피 계곡보다 더 깊은 골짜기가 하나 숨어 있다. 수리덤계곡이다. 청도 서담골봉(837m)에서 발원한다. 삼계리재에서 내려온 물과 옹강산에서 흐르는 물길을 보태 계곡이 넓다. 덩치를 키운 수리덤 계곡은 이내 삼계 계곡과 몸을 섞고 운문댐의 수량 확보에 큰 공을 세운다.
삼계계곡에 가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수리덤 계곡은 수량이 풍부하고, 골이 깊어 여름철 계곡 산행지로 으뜸이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 서담골봉과 수리덤 계곡을 다녀왔다. 흐르는 물을 그냥 먹어도 될 만큼 맑은 계곡. 인적 없는 계곡의 낙화유수에 노닐다가 원점회귀가 완벽하게 가능한 산행지다.
언양~운문사 69번 지방도 옆의 에델바이스 펜션 입구에서 시작하여 옹강산 서남릉~641봉~옹강산(832m)~전망바위~삼계리재~769봉~서담골봉(837m)~수리덤계곡~합수지점~사방댐~삼계농원~69번 지방도까지 12㎞를 6시간50분 동안 걸었다.
여름철 삼계계곡은 발 디딜 틈이 없다. 한때 오지였지만, 산천경개에 반한 사람들이 찾아들기 시작하여 펜션과 식당이 빼곡하다. 계곡물에 발 한 번 담그려 해도 눈치가 보인다. 인근 펜션과 식당에서 좋은 자리를 다 차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꾼들은 개의치 않는다. 발품을 들인 만큼 때 묻지 않은 상류의 청정 계곡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 언양에서 운문사로 가는 69번지방도 바로 옆에 수리덤 계곡 입간판이 크게 세워져 있다. 에델바이스펜션 입구가 산행 출발지가 된다.
에델바이스 펜션 입구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계곡을 지나 솔나무 펜션 이정표를 보고 한 5분쯤 가면 바로 왼쪽에 옹강산 남서릉으로 오르는 능선길이 시작된다.
처음부터 만만찮은 길이다. 이 삼복더위에 오르막을 1시간이나 올라야 한다. 그러나 641봉에 얼추 고생은 끝이 난다. 올라가면서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처음엔 쉬려고 그랬는데 나중엔 그 때문이 아니다. 운문령에서 달려온 계곡과 그 속에 깃든 마을들이 아늑한 풍경을 선사하고 있다. 배너미재 너머에 있는 운문사 사리암의 위치를 가늠해 보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다.
▲ 삼계계곡을 지나 수리덤 계곡으로 들어간다. 앞쪽에 높이 솟은 봉우리가 서담골봉에서 뻗은 능선이다.
작은 돌에 매직 글씨로 641봉이라 적어 놓았다. 열혈 산꾼들 덕분에 산행이 더 재미있다. 누군가가 이정표를 만들어 붙이고, 글씨를 적고, 리본을 달면서 그것은 길이 된다. 자연을 크게 훼손하지 않는 이런 수고는 악천후 등 위기 상황에서 큰 도움이 된다.
▲ 옹강산 남서릉으로 오르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삼계리가 3개의 계곡 합수 지점에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다.
641봉에서 뚜렷한 능선을 따라 옹강산으로 간다. 잘 생긴 소나무 숲은 이제 끝이 나고 갈참나무와 신갈나무가 한껏 뽐내며 섰다. 평소 산행에서는 보지 못한 버섯들이 자주 눈에 띈다. 9월 송이나 능이버섯이 나기 전에 나는 버섯을 보통 잡버섯이라고 한다. 장마철에 솟아나는 버섯들이 보기엔 탐스럽지만, 대부분 독버섯이니 감상만 하시길.
10분을 더 걸어 운문면 오진 마을로 내려서는 계곡 갈림길을 지났다. 641봉에서 옹강산까지는 딱 한 시간이면 도착한다. 능선은 완만하고, 숲 그늘은 짙어 무더위는 이미 저만치 달아나 버렸다.
옹강산 정상에서 경주 산내(심원사) 방면 이정표를 따라 15분쯤 내려가니 갈림길이 나온다. 능선이 더 발달한 왼쪽은 심원사로 떨어지는 길이다. 오른쪽 길에 '산&산' 안내 리본을 달아 놓았다.
갈림길을 지나니 앞이 확 트이는 바위 전망대가 나온다. 발아래로 삼계리재가 아득하다. 가야할 서담골봉이 11시 방향에 있고, 문복산이 떡 하니 정면에 버티고 있다. 왼쪽 골짜기 아래 심원사가 홀로 외롭다.
고작 15분을 내려왔는데 삼계리재 가는 길은 끝 모를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다. 여름철 산행인 데다 고갯마루에서 다시 서담골봉을 오를 생각을 하니 그랬다. 삼계리재는 중간탈출로로 그만이다. 이곳에서 하산할까 고민하다가 수리덤 계곡의 속살을 보기 위해 힘을 냈다.
▲ 서담골봉 정상 돌탑이다. 문복산의 위세에 가려 빛을 잃고 있지만, 800미터가 넘는 꽤 높은 봉우리이다. 이곳에서 발원한 수리덤 계곡은 오히려 문복산 계살피 계곡보다 더 길게 뻗어 있다.
769봉까지는 40분이 걸렸다. 오래된 소나무는 송진 채취의 상흔이 역력했다. 한 그루는 끝내 고사했는데 그래도 쓰러지지 않고 버티고 서 있어 숙연함을 자아냈다. 갈참나무의 둥치 부분이 꼭 코뿔소 같아 사진에 담았다. 산행 도중 기묘한 바위와 나무를 많이 만나지만 코뿔소 나무는 영락없다.
20분 남짓 더 올라 서담골봉이다. 작은 돌탑이 정상임을 말해준다.
아무래도 발길이 뜸한 계곡 하산로의 들머리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문복산 정상 방면으로 4분쯤 더 걸어 오른쪽으로 난 우회길로 접어든다. 정상에서 삼계리재로 하산할 때 서담골봉을 우회하는 길이었다. 골짜기의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올라왔던 능선길과 만나자마자 2분 정도 왼편 계곡 방향을 향해 직하강 하면 수리덤 골짜기의 시작이다.
▲ 한참을 내려서야 삼계리재에 도착한다. 다시 오르기가 귀찮거나 빨리 하산해야 할 사람은 이곳에서 원점회귀 할 수 있다.
호젓하게 계곡 산행을 즐긴다. 작은 물줄기와 바위를 요리조리 지나며 아래로 아래로 한참을 내려간다. 고로쇠 수액을 받는 까만 호스가 설치돼 있다. 하산길은 수액 호스와 나란히 간다.
▲ 의외로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 원시 그 자체의 비경을 간직하고 있는 수리덤 계곡이다. 계곡을 한참 내려서면 삼계리재에서 내려온 계곡과 합수지점에 이르게 되는데 수량이 한껏 풍부해진다.
문복산 작은 골짜기의 물과 만나면 물줄기가 굵어진다. 물이 깊은 곳에 소가 있다. 작은 폭포도 있다. '알탕(계곡에서 목욕을 하는 행위로 산꾼들의 은어)'의 유혹을 어찌 뿌리치랴. 온몸을 담그자 더위에 한껏 달아올랐던 몸이 이내 시원해진다. 손발이 오그라들어 금방 나왔다.
▲ 수리덤 계곡 합수지점을 지나자 제법 물이 많아지고, 여러 사람이 쉬어가도 좋을 소가 나온다. 이곳에서 더위에 시달린 몸이 추위를 느끼도록 쉴 수 있었다.
물길을 밟으며 계곡 산행을 고집해도 될 뻔했다. 알고 보니 하산로는 계곡을 살짝 비껴 산허리를 감고 돈다. 쉬엄쉬엄 걸어 삼계리재에서 내려온 물길과 만나는 사방댐까지 1시간40분이 걸렸다.
▲ 농원까지는 길이 잘 닦여 있다. 주변에 펜션을 물론, 계곡변에 평상을 만들어 피서객을 유치하고 있다. 20분 정도 걸어 나가면 원점회귀를 한다.
삼계농원이 보이는 곳부터는 주변이 사유지여서인지 다들 유료 평상과 숙박시설들이다. 어떤 곳은 울타리를 쳐서 계곡 접근을 막고 있다. 무릉도원에서 속세까지는 20분이면 족했다.
부산일보 라이프레저부 051-461-4164. 박영태 산행대장 011-9595-8469. 글·사진=이재희 기자
산행을 마친 후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운문사 입구에 가면 울산아지매식당(054-373-0568)의 손맛이 많이 알려져 있다. 산채비빔밥(6천원)이나 손칼국수(5천원)도 좋고, 인근 개울에서 잡은 잡어매운탕(3만5천원)을 시키면 4명이 충분히 먹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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