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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전라남도

강진-다산유배길 다산초당 백련사

by 구석구석 2010.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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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녹차, 동백림, 철새도래지… 자연이 주는 무한 감동의 연속
‘뿌리의 길’ 거쳐 다산초당~백련사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선에 꼽혀

 

 

우리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학자로 꼽히는 다산 정약용 선생이 200년이란 세월을 거슬러 현대에 그 사상과 학문이 다시 태어나고 있다. 실사구시(實事求是)인 실용학문과 그의 방대한 사상, 엄청난 저술 등이 현대적 시각으로 재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다닌 길도 그의 사상을 담아 길 위에서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 동백나무 숲 속에서 윤영선씨와 강진 문화관광해설사 3명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의 저술과 사상, 그 자체만으로도 당연히 재조명되어야 하지만 그가 저술할 당시 유배 중이었다는 사실은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한다. 만약 그가 18년간의 유배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과연 그 방대한 저술을 남길 수 있었을까 하는 점에서는 오히려 역설적이다. 강진에서의 18년 유배생활 동안 그는 500여 권의 책을 남겼다. 정치, 경제, 철학, 지리 등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로 방대하다.

 

정조의 총애를 받고 잘 나가던 관리였던 다산이 정조의 승하 직후인 순조 1년(1801년)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유사옥 때 서학과의 관련 혐의로 경상도를 거쳐 강진으로 유배됐다. 정조대왕을 받들어 수원성을 설계, 축성하고 천주교 관련자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극심한 당파로 그의 공로는 모두 사라지고, 반대파들에 의해 멸문지화를 당하는 참변을 겪었다. 그의 형 정약종은 참수형을 당하고, 큰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그는 강진으로 유배를 떠났다. 누나의 남편인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 이승훈도 참수형에 처해졌다.

 

돌아올 기약도 없이 떠난 그의 첫 유배지가 강진 읍내 주막이다. 당시 유배자에게는 지역만 정해주고 따로 거처는 마련해주지 않았다. 반기는 이 하나 없는 강진의 주막에서 다산은 상심의 세월을 술로 지새웠다. 그러나 곧바로 정신을 가다듬고 그의 거처를 ‘네 가지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지키라’는 뜻의 사의재(四宜齋)라 이름 붙이고, 1802년 가을쯤부터 후학을 가르치기 위한 서당을 개설했다. 다산의 첫 제자 황상을 시작으로 강진읍 6제자와 다산초당 18제자 등이 이후 속속 그의 문하에 들어와 수학했다.



▲ (위)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가는 길에 야생녹차밭이 푸른 빛깔을 뽐내고 있다. (아래)강진읍에서 만덕산으로 올라가기 전 주택가 끝자락에 있는 탱자나무 울타리.

죽죽 뻗은 두충나무 사이로 길 연결

주막 할머니와 그 외동딸의 보살핌으로 1801년 11월 22일~1805년 10월 8일의 약 4년을 주막에서 보낸 다산은 후학을 가르치는 유배 온 실학자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당시 백련사 주지 혜장법사를 만나게 된다. 혜장은 다산의 깊은 학문에 반하여 ‘정대부’라 부르며 존경하게 되었고, 다산은 그의 도움으로 강진읍 뒷산에 위치한 보은산 고성사 보은산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곳에서 1806년 8월 30일까지 1년 가까이 혜장법사와 학문적 교류를 돈독히 다졌다.

 

강진읍에 거주한 제자 이학래는 그의 스승이 산중에서 혼자 쓸쓸히 지내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그의 집으로 오실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다산은 1806년 9월 1일 제자 집으로 옮겨 후학을 가르치는 데 더욱 매진하게 된다. 이학래의 집에는 1807년 12월 30일까지 기거했다.

 

이듬해 제자들과 그의 학문적 깊이를 높이 산 지인, 특히 윤씨들이 탐진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귤동마을 만덕산 자락에 다산초당을 마련했다. 그의 형 정약전이 유배 간 흑산도도 맑은 날이면 보이는 곳이었다. 다산은 여기서 유배생활이 끝날 때까지 10여 년간 실학사상을 집대성했다.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수많은 저서를 이때 쏟아냈다. 불행과 절망의 늪에서도 절대 좌절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았던 다산의 인생관이 있었기에 오늘의 ‘위대한 사상가’ 다산이 존재한 것이다.

 

오늘의 다산은 ‘다산유배길’로 다시 태어났다. 그가 다니던 길, 즉 강진 다산수련원에서 다산초당~보은산 보은산방까지 다산의 사상을 녹여내는 길이 재탄생했다.

 

▲ 1.강진 문화관광해설사 박선덕씨가 울퉁불퉁한 동백나무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2.보은산방 가는 만덕산 등산로에서 만난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고 있다. 3.백련사 내려가는 길은 12월 초순에도 활짝 핀 동백꽃이 떨어져 널려 있다.

출발은 다산수련원이다. 강진군에서 다산의 실용주의 사상과 실사구시 정신을 널리 알리고, 배우고, 닦을 목적으로 지난 2005년 개관했다. 2007년 9월부터 광주YMCA에서 위탁운영하고 있다. 다산수련원은 널찍한 주차장에 다산유물관까지 갖추고 있어 출발지점으로 안성맞춤이다.

 

다산수련원 바로 옆에서는 10년 전 조성한 두충나무 숲 사이로 나 있는 길이 다산수련원과 다산초당 가는 길로 연결된다. 껍질을 벗겨 한약재로 쓰는 나무가 바로 두충나무라고 한다. 그러나 중국산이 밀려들어와 가격경쟁력이 떨어져 그냥 방치한 게 숲을 이루게 됐다고 한다. 마치 버드나무 같이 죽죽 뻗은 나무들이 아름답게 늘어서 있다. 이 숲으로 다산 유배길은 처음부터 탐방객을 매료시켰다.

 

길은 다산초당으로 가는 만덕산 등산로와 연결됐다. 숲이 우거져 있고, 나무 뿌리들이 땅 위에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 길이다. 정호승 시인은 이 길을 ‘뿌리의 길’이라고 이름 붙였다. 대나무밭에서나 보던 땅 위로 솟은 뿌리들을 소나무 숲에서도 볼 수 있는 길이다. 기묘한 모습이다.

 

다산초당에는 다산의 정취가 묻은 3개의 길이 있다. 그 하나가 지금 걷고 있는 ‘뿌리의 길’이다. 다른 하나는 다산초당의 동암을 지나 천일각 왼편으로 나 있는 ‘백련사 가는 길’, 다른 하나가 다산의 제자 윤종진의 묘 앞에 나 있는 ‘오솔길’이다. 오솔길과 뿌리의 길은 바로 연결된다.

 

혜장스님과 산책하며 학문적 교감 나눈 듯

뿌리의 길을 지나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산초당이 모습을 보였다. 한국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가 10년 동안 지냈던 집이다. 강진에서 4번이나 거처를 옮겨 다니면서 마지막으로 묵었던 곳이다. 제자들과 학문의 깊이를 더했고, 학문적으로도 집대성한 곳이기도 하다.

 

원래 다산초당은 다산의 외가인 귤동마을 윤취서에 의해 건립된 해남 윤씨의 산정(山亭)이었다. 그러다 다산이 기거하면서 만덕산 기슭에 자생하는 녹차들을 보고‘다산(茶山)’이란 호를 붙였다. 다산은 원래 이곳의 고유지명이었다. 

 

▲ (위)다산초당에 윤영선씨와 강진 문화관광해설사 박선덕씨, 위동연씨, 윤동옥씨(왼쪽부터) 등이 앉아 있다. (아래)백련사 대웅전.

다산초당엔 본채인 다산초당과 다산 선생이 거처했던 동암, 제자들이 유숙했던 서암으로 구성돼 있다. 다산초당에는 다산이 남긴 흔적 가운데 4개를 꼽은 다산4경이 있다. 그 1경이 ‘丁石(정석)’이다. 초당 뒤꼍 커다란 바위에 다산이 직접 새긴 글이다. 자신의 성(姓)에 돌 석(石)자 한 자만을 새겨 군더더기 없는 깔끔하고 강인한 그의 성품을 반영하고 있는 듯했다. 2경은 다산이 직접 수맥을 잡아 팠다는 ‘약천(藥泉)’이라는 샘이다. 가뭄에도 좀처럼 마르지 않는 이 샘물은 ‘담을 삭이고 묵은 병을 낫게 한다’고 다산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샘은 있지만 먹을 수 없을 정도다.

 

3경은 차를 끓일 때 사용했다는 마당에 있는 평평한 돌인 ‘다조(茶竈)’. 차를 끊이는 일종의 부뚜막이었다. 4경이 초당 옆에 있는 연못인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바닷가에 있는 반들반들한 돌을 주워 봉우리를 쌓아 석가산이라 했고, 그 주변 연못엔 잉어를 키웠다. 다산은 자라는 잉어를 보고 날씨를 예측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반들반들한 돌은 없어지고 그냥 볼품없는 돌만 남아 세월의 흔적을 대변하고 있었다.

 

바로 옆엔 천일각이란 정자가 있다. 다산이 그의 형 정약전이 유배 간 흑산도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원래 없었던 정자였지만 다산의 당시 심정을 회상하며 1975년 강진군에서 새로 건립했다.

 

이제부터 백련사 가는 길이다. 다산유배길에서 만날 수 있는 세 가지 길 중에서 다산의 체취를 가장 짙게 느낄 수 있다. 유배생활 동안 벗이자 스승이요, 제자였던 혜장선사와 다산을 이어주던 통로였다. 1㎞가 채 안 되는 거리에 야생 녹차군락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숲을 만날 수 있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로 선정된 길이기도 하다.

 

이 아름다운 길을 두 사람이 오가면서 무슨 대화를 나눴을까? 동백과 야생녹차,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오가는 길 위의 아름다운 자연에 흠뻑 젖어 두 선인은 분명 선문답 같은 대화를 주고받았으리라. 그리고 다산 스스로 학문의 깊이를 더했을 그런 산책로였을 것이다. 묘하게도 백련사는 백련결사로 유명한 고려시대 불교 개혁운동의 본산이었던 곳이며, 혜장스님은 그 백련사의 주지였다.

 

야생녹차밭을 지나 대나무숲, 사스래나무 등이 등산로 옆을 지키고 있었다. 이 길은 녹차와 대나무 등으로 인해 사철 내내 푸를 것 같았다. 야생녹차는 이미 관목으로 자리 잡은 숲의 터줏대감이었다.

 

▲ 1.다산초당에 걸려 있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영정. 2.다산유배길이 시작되는 다산수련원 바로 옆에는 죽죽 뻗은 두충나무 사이로 길이 나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3.시인 정호승이 다산초당 가는 길에 땅 위로 뿌리가 솟은 모양을 보고 ‘뿌리의 길’이라고 이름 붙인 그 길이다.

 

동백꽃 즈려 밟는 백련사 가는 길

드디어 1962년 12월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된 백련사 동백림에 도착했다. 3㏊ 이상에 달하는 동백림의 수목들은 300~500년 이상 된 것들로, 일일이 번호를 붙여 관리하고 있었다. 일설에는 꽃이 핀 채로 100일, 꽃이 떨어진 채 100일이라고 해서 동백이라 했다고도 전한다. 실제로 100일이 안 될지는 몰라도 핀 꽃이나 떨어진 꽃이 상당히 오래가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원래 늦겨울이나 이른 봄에 꽃을 피우지만 요즘은 지구온난화 영향으로 초겨울에도 동백꽃을 쉽게 볼 수 있다.

 

12월 초 백련사의 동백나무들이 잔뜩 꽃을 피우고 있었다. 꽃을 피우는 시기에 따라 춘백(春柏), 추백(秋柏), 동백(冬柏)으로 나누기도 한다.

 

1500여 그루에 이르는 동백나무는 갖가지 모양을 하고 있었다. 미끈하게 잘생긴 동백부터 울퉁불퉁한 동백까지 동백나무의 모든 부분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떤 나무는 다섯 개의 가지가 영락없이 손바닥 같았다. 동백손바닥나무라 이름 붙였다. 큰 줄기에 울퉁불퉁한 동백은 상처 난 부위를 스스로 아물게 하기 위해 내뿜은 수액이 오랜 세월 굳어져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기묘한 모양이 나름대로 멋을 내고 있었다. 주변에 비자나무, 후박나무, 푸조나무 등도 함께 자라고 있어 운치를 더했다.

 

백련사 내려가는 길도 가로수가 동백이다. 낙화한 꽃들로 길은 완전 꽃길로 변했다. 마치 소월의 ‘진달래’와 마찬가지로 동백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는’ 길이었다. 언제 이런 길을 다시 밟아볼 수 있겠나. 감동의 연속이었다.

 

또 다른 감동을 만나기 위해 발길을 옮겼다. 다산이 다산초당에 오기 전 8년 동안 지냈던 세 장소를 찾아가기 위해 강진읍으로 간다. 옛날엔 다산초당에서 만덕산을 거쳐 보은산 고성사 보은산방으로, 강진읍 주막으로, 제자 이학래의 집으로 갔겠지만 1900년대 일제가 탐진강 갯벌을 매립한 이후 강둑길이 생기고 신작로가 개통되며 산이 잘려 나갔다. 매립된 땅은 농토로 변했고 둑을 막아 강물의 범람을 막았다. 그 강둑길로 걸었다.

 

탐진강 하류는 밀물 때는 남해 바닷물이 둑 상단에까지 찰 정도로 들어오지만 썰물 때는 수만 ㏊의 개펄이 형성돼 철새들의 낙원으로 변한다. 천연기념물 제201호인 고니와 청둥오리, 재두루미들이 저마다 무리지어 날갯짓을 하며 눈길을 끌었다. 정작 눈길을 주면 놀라서 날아갔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아니 그림보다 더 한가롭고 고즈넉하며 아름다운 장면이다.

 

이 갯벌이 강진읍 주민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 백합과 대합, 꼬막, 키조개, 망둥어, 바지락, 갯지렁이 등 각종 어패류들의 서식지다. 이들이 무한 서식하고 있으니 철새들이 매년 풍부한 먹잇감을 찾아 이곳에서 겨울을 나는 것이다.

 

강둑길은 2㎞ 가량 된다. 찬바람이 온몸을 움츠리게 했지만 겨울의 정취는 맘껏 느낄 수 있었다. 둑길 끝자락에는 대규모 갈대밭이 산들거려 겨울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조금 전까지 만끽했던 다산과 백련사와 동백의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탐진강의 갯벌과 겨울 철새, 그리고 강둑길과 갈대, 찬바람이 주는 색다른 감동이 다가왔다. 자연이 주는 무한 감동의 장면들이다.

 

이젠 강진읍이다. 주택으로 인해 아직 정비되지 않은 길도 있었지만 다산수련원 윤영선 위원 등이 50m 단위로 화살표나 다산유배길 이정표를 꼬박꼬박 붙여 안내하고 있었다.

 

강진읍에서 아직 찾지 못하고 있는 곳이 다산이 1년 남짓 기거했던 제자 이학래의 집이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 표시도 못하고 있다. 읍내의 한 폐가터에 제자 이학래의 집을 조성할 계획이라고 동행한 윤영선 운영위원이 전했다. 다소 무미건조한 읍내길이지만 다산의 흔적을 찾는 마음으로 하나하나 되새기며 발걸음을 옮겼다.

 

갯벌과 갈대 어우러지는 강둑길로 약 2㎞

새로 단장한 초가집이 객들을 맞았다. 사의재 주막집이다. 과거 같으면 영락없는 주막으로 보였다. 이곳이 바로 다산이 유배생활을 처음 시작한 곳이다. 오갈 데 없는 다산을 받아들여 한국 최고의 사상가로 거듭나게 한 주모의 집이기도 하다. 주모는 다산에게 “어찌 그냥 헛되이 사시려 하는가? 제자라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 주모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멸문지화 당하고 귀양 온 관리를 모두 후환이 두려워 문전박대하는 현실에서 무얼 보고 그를 받아들였는지 궁금했다. 한편의 영화 소재다. 아마 몇 년 후에 고증을 거쳐 ‘다산을 키운 주모’나 ‘다산의 주모’를 주제로 한 영화가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 1.다산이 강진으로 유배 와서 처음으로 묶었던 주막. 그 뒤채엔 사의재가 있다. 2.영랑생가 바로 위에 있는 옛 양반 자제들이 공부하던 서당인 금서당. 3.고성사 3층 석탑과 대웅전. 바로 그 오른쪽에 다산이 1년 가까이 기거했던 보은산방이 있다.

주막 뒤채엔 ‘사의재’란 간판이 걸려 있다. 유배 초기 술로서 시름을 달래다가 주모의 닥달로 곧바로 마음을 다잡고 자신의 거처를 사의재라 하고 학문 연구에 헌신키로 다짐한 곳이다.

 

사의(四宜)는 ‘생각을 맑게 하되 더욱 맑게, 용모를 단정히 하되 더욱 단정히, 말을 적게 하되 더욱 적게, 행동을 무겁게 하되 더욱 무겁게’를 말한다. 어쩌면 상심과 시련을 겪은 사람만이 알고 쓸 수 있는 그런 교훈이다. 다산 역시 얼마나 상심이 컸겠는가. 충분히 이해가 되는 사의재였다. 다산은 나중에 “내가 강진에 귀양 오기를 잘했다. 여기 오지 않았다면 어찌 사회 모순과 병리를 다 볼 수 있었겠는가”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강진의 다산유배지 네 곳 중에 세 곳을 거쳤다. 이젠 보은산 고성사 보은산방만 남았다. 백련사 주지로 있던 혜장스님이 다산을 보은산방으로 초청한 곳이다. 강진읍 뒷산인 보은산 등산로로 올랐다. 평일인데도 강진 주민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그만큼 사람들이 많이 찾는 산이다.

 

보은산 등산로를 따라 가다가 정상 우두령 가는 길과 고성사 가는 갈림길이 나왔다. 당연히 고성사 가는 방향이다. 발길을 조금 옮기니 남녀공용 샤워장이 나왔다. 남자들이야 시도 때도 없이 이용하겠지만 더운 여름날 오전엔 일정시간을 정해 여자들만 이용한다고 했다. 물론 망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무척 궁금했다. 

 

▲ 1.탐진강 개펄에서 큰 고니들이 뒤뚱뒤뚱 걸으며 먹이를 구하고 있다. 2.썰물이 되자 탐진강의 드넓은 개펄이 모습을 드러내 저 멀리 장흥 방향 산 능선들과 잘 어울렸다. 3.강진 문화관광해설사 3명이 남포다리에 앉아 탐진강과 그 옆에 산들거리는 갈대를 바라보고 있다.

강진읍은 풍수적으로 황소가 누워 있는 ‘와우(臥牛)’ 형국이라고 한다. 강진엔 실제로 소와 관련된 얘기가 많다. 보은산 정상인 우두령이 소의 머리에 해당된다. 소의 목에는 방울이 걸려 울리는데, 이를 어찌 해결할 것인가 고민하다 보은산 중턱에 고성사를 지었다고 한다. 고성사에서 울리는 범종이 소의 목에 있는 워낭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풍수는 이렇게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실제로 많다.

 

고성사는 원래 조그만 암자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중건을 거듭해서 대웅전을 포함해 구색을 다 갖췄다. 대웅전과 칠성각 건너 보은산방이 있다. 지금은 스님들의 요사(寮舍)로 사용한다. 다산이 1년 가까이 묶으며 학문의 깊이를 다지면서, 한편으로는 혜장법사와 학문적 교류도 활발히 했던 그곳이다. 여기서도 다산의 체취가 진하게 다가왔다. 마치 눈앞에 어른거리는 듯했다.

 

조선시대 강진으로 유배 간 사람은 정약용을 포함해 총 90여 명이었다. 강진에서 생가를 복원하고 그의 뜻을 기리는 사람은 단 한 사람, 다산 정약용뿐이다. 그의 위대한 사상은 이미 상당히 연구되고 있지만 그의 불굴의 정신도 또한 새롭게 평가받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하산길로 내려왔다.

 

뿐만 아니라 한 명의 위대한 사상가를 사심 없이 돌본 고마운 주모와 그녀의 딸, 강진 6제자와 초당 18제자가 머릿속에 맴돈다.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다산이 있지 않을까. 다산은 지금도 그들과 함께 다산유배길에서 숨 쉬고 있다. 그 숨소리를 들어보려면 다산유배길로 가보라. 그의 불굴의 정신과 실학사상에 대한 집념의 맥박이 느껴질 것이다.

 

다산유배길 탐방가이드 / 다산수련원을 출발점으로 잡는 게 편리

다산의 위대한 학문은 책을 통해서 많이 접할 수 있지만 그의 삶의 체취가 묻어나는 경험을 하기란 쉽지 않다. 강진의 다산유배길은 걷는 길이면서도 단순한 걷기 차원이 아닌 다산의 위대한 사상과 불굴의 정신을 체험하는 좋은 길이다.

 

현재 가장 편리하고 좋은 방법은 다산수련원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다산수련원엔 대형 무료주차장이 있어 주차하기도 편리하고 주변 숙소와 식당도 몇 군데 있다. 한옥으로 지은 주변 숙소에서 우아한 밤을 지낼 수 있다.

 

다산수련원에서 출발해 다산초당과 백련사, 동백숲을 거쳐 철새도래지~제자 이학래 집터~사의재~영랑생가~보은산~고성사 보은산방은 약 17㎞다. 다산수련원에서 아침에 출발하면 점심은 강진읍에서 해결하고, 사의재와 영랑생가를 둘러볼 수 있지만 당일로 돌아보기엔 조금 긴 거리다.

 

굳이 당일에 돌아보기를 원한다면 다산초당에서 백련사까지는 걷고 철새도래지와 강진읍은 차로 지나치면서 돌아보고 바로 사의재로 가는 방법도 있다. 그럴 경우 2~3시간은 단축할 수 있다.

 

강진읍에서 다산수련원까지는 택시를 타더라도 1만 원 정액제로 받는다. 강진은 택시요금 정액제를 실시하고 있다. 실제로 미터기로 달려보니 1만1,000원 정도 나왔다. 시간은 10분 남짓. 강진읍에서 군내버스로 다산수련원까지는 하루 11회 운행하며, 요금은 1,000원이다. 소요시간은 20분 가량.

 

개인택시조합 061-434-6161, 신진택시 061-433-9100, 광신택시 061-434-3141.



▶ 찾아가려면

수도권에서는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광주에서 제2순환도로로 갈아타서 무안광주고속도로로 간다. 함평, 나주 방면으로 빠져 나와 2번 국도를 타고 내려온다. 강진읍 남포IC에서 18번 국도로 빠진다. 잠시 18번 국도를 탄 후 해안도로를 따라 10여 분 내려가면 다산수련원과 다산유물전시관 간판이 나온다. 서해안고속도로로 갈 경우 목포까지 달린 다음, 2번 국도를 통해 곧장 가서 18번 국도로 갈아타서 영암을 거쳐 강진에 도착할 수 있다.

고속버스는 서울에서 강진까지 하루 6회 운행하며 철도는 없다.



▶ 숙박시설

가장 좋은 출발지점인 다산수련원(061-430-3786)에서도 숙박할 수 있다. 비용도 2인 기준 1만8,000원으로 저렴하나 평일엔 이용객이 적을 경우 운영하지 않는 단점이 있다. 다산수련원 측도 평일에 문의가 오면 바로 옆에 있는 민박으로 안내한다. 들꽃민박 061-432-9080, 알뜰수퍼민박 061-434-8487, 다향소축 061-432-0360, 다산촌명가 061-433-5555



▶ 별미

강진의 별미는 넓은 개펄에서 잡히는 망둥어 요리를 빼놓을 수 없다. 망둥어는 민물과 바닷물이 접하는 어느 지역에서나 잡히지만 강진읍에 있는 동해회관(061-433-1180)의 주인은 개펄에서 40여 년째 손수 망둥어를 잡는 솜씨로 유명하다. 이미 방송에도 여러 번 소개된 바 있다. 망둥어에 대한 설명을 부탁하자, 일사천리로 20여 분간 거침이 없었다. 짱뚱어라고도 하며, 탕과 구이(사진) 전부 맛볼 수 있다. 그 외 전복나라 061-433-8155, 바지락회와 한정식 전문인 부성회관 061-434-3816.

 

다산유배길 조성 윤영선씨

“수렵기간 산길 찾느라 헤매다 멧돼지로 오인할까 조마조마”

 

“다산의 체취가 발견되는 길이면 언제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철새도래지와 연결시키기 위해 도로나 강둑길로 난 구간도 있으나 편안한 흙길이나 산길을 계속 찾을 것입니다.”

 

다산유배길의 실무 책임을 맡고 있는 윤영선(44)씨의 말이다. 지난해 6월 ‘다산유배길’이 문화부 시범사업으로 선정되자 지역신문 기자와 강진문화원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던 윤씨가 길 조성 최적임자로 낙점됐다. 윤씨는 평소 ‘탐진강 원류를 찾아서’ ‘강진의 문화유적’과 같은 애향과 관련된 기획 위주로 기사를 자주 써 관련자들의 눈에 바로 떠올랐던 것이다.



윤씨는 실제로 길 조성작업을 하면서도 강진에 대한 기사를 쓴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됐다고 강조했다.



“강진의 역사를 미리 공부했던 것이 길을 찾으면서 ‘아, 이 길이 바로 그 길이겠구나’하는 순간을 자주 느꼈습니다. 길 조성이 훨씬 부드럽고 수월하게 됐던 셈이죠. 이 일을 하다 보니 더욱 고향에 애정을 갖게 된 계기도 됐습니다.”



윤씨는 그래도 3명의 자문위원으로부터 조언을 톡톡히 받고 있다. 윤동옥 다산동호회장, 전갑홍 영암 기(氣)건강센터장, 최성일 도보문화연구소장 등 3명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을 통해 다산을 배우고, 도보문화를 배우고, 월출산의 기를 배우며 길을 만들어가고 있다.



윤씨는 길을 찾으면서 위험한 고비도 몇 차례 넘기기도 했다. 수렵기간이 허용된 시기에 산에서 길을 찾느라 헤매고 있을 때 사냥꾼이 멧돼지로 오인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한다. 또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때, 산 위에 우뚝 솟은 송전탑으로 방향감각을 잡아 마구잡이로 내려오기도 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정리됐지만 아직 완성된 길도 아니고 전체 구간이 완성되려면 한참 멀었다고 했다. 다산유배길만이 아니고 제대로 된 삼남대로를 연결시키는 게 그의 목표다.



“길은 역사를 말해주는 바로미터입니다. 다산유배길은 강진만의 역사를 말하지만 삼남대로는 호남의 역사와 우리나라의 역사를 대변합니다. 강진의 작은 역사도 차근차근 쌓아가면 그게 바로 호남의 역사고, 우리의 역사 아니겠습니까?”

진한 애향심이 묻어 있는 그의 말이다.


 / 월간산 2010. 2 / 글 박정원 차장  사진 정복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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