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에서 13번 국도로 영산대교 건너 영산포 쪽으로 가다보면 왼쪽으로 23번 국도가 나온다 이 길을 따라 장흥쪽으로 1.3km가면 다시 왼쪽으로 봉황가는 818번 지방도로.이 길로 8.4km 가면 819번 지방도로와 만나는데,여기서 다시 좌회전해 남평쪽으로 3km가면 오른쪽으로 송현제(연못)를 지나자마자 다도를 거쳐 화순쪽으로 가는 818번 지방도로가 나온다. 이 길을 따라 10km가면 우측으로 운흥사 가는 작은 길이 나온다.
암정리 899-2 문성암(文聖庵) 061-337-0711
문성암이라는 이름대로 글을 매우 잘 하는 사람이 출현할 것이라는 꿈을 꾸고 사찰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과거 운흥사(雲興寺)의 암자인 문수암(文殊巖)이 있었던 곳으로 문수는 문수대성(文殊大成)이며 여기에서 문성(文成)을 따서 암자의 이름을 지었고, 문수가 지혜를 의미하기 때문에 선원 터로 적합하다고 여겼다고 한다. 문수보살이 화현한 터라고도 한다.
문성암을 세운 다정스님은 죽림사와 운흥사를 오가며 수행할 때 문성암 앞의 커다란 소나무를 보고 사찰이 있을 만한 곳이라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또 운흥사 초가에서 기거할 때 스님이 문성암 쪽에서 빛이 찬란하게 비치는 꿈을 꾸고 절을 짓고자 결심하였다. 처음 터를 닦을 때 같이 일을 하던 보살이 꿈을 꾸었는데 불이 나서 그 불길이 하늘을 태웠다고 하는 길몽을 꾸었다고도 한다.
본래의 암자가 폐허가 된 후에는 해발 200m정도의 산 속인데도 물이 넉넉하여 논으로 경작되어 왔는데 지금도 특히 물이 좋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사찰은 여느 곳과는 조금 다른 느낌을 준다. 사찰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나지막한 차(茶)나무가 나란히 도열해 우리를 맞이하며, 그 앞에는 곧 앞마당 같은 잔디마당이 아담하게 다듬어져 있고, 한자로 쓰인 글귀가 많이 눈에 띠고, 전각의 현판도 “참회전(懺悔殿)”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갖게 하는 등 이곳은 공부하며 참회하기에 좋은 곳으로 생각하게 한다.
암정리 운흥사 061-337-2622
운흥사는 덕룡산 기슭에 있는 고찰이었다. 1775년 정문(鄭文)이 쓴 진여문4중창기에 의하면 당 희종년간(846~887)에 도선국사가 이곳의 지세가 좋아 흥덕으로부터 와서 이곳 도성암에서 첫 강회를 열고 터전을 닦은 후 신라 효공왕 년간(897~911)에 이곳에 웅점에 웅치사 창건하였다.
그후 언제인가 운흥사로 바꾸었다. 1755년 당시에는 대웅전 침계루 등 380여칸의 규모를 갖춘 사찰로 확인된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어 현재는 빈약한 사찰이다.
운흥사석장승(중요민속자료12호. 68.12.12)
이 석장생은 사찰입구 길가에 있는데 우측이 여장생, 좌측이 남장생으로 되어 있다. 여장생은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라 음각된 얇고 넓은 돌 장승인데 불회사의 여장생처럼 온화한 맛이 없는 원시예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강한 인상을 하고 있다.
좌측의 남장생은 거대해서 위엄이 있으나 안면이 온화하고 인자한 노인 특유의 인상을 지니고 있다. 또 큰 치아 두 개가 입의 좌우에 노출되어 있고 수염이 턱밑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있다.
불회사 장생과 운흥사 장생이 다른 점은 불회사는 우측이 하원당장군 남상이고 좌측이 주장군으로 여상인데 반해서 운흥사는 우측이 하원당장군으로 여상이고 좌측이 주장군(周將軍)으로 남상이 되어 위치와 새긴 글씨가 서로 뒤바꿔져 있다. 그러나 그 조각법과 원형의 눈동자 등 형태가 거의 흡사한데다 여상인 하원당장군의 뒷면에 강희 58년(1719년)이라는 명문(銘文)이 있어서 정확한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민속자료이다. 한편 여인들이 치성을 드린 흔적인 수혈이 많이 남아 있는 바위가 있어 민간신앙의 단면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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