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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전라남도

목포 유달산둘러보기

by 구석구석 2009.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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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교동 산 27-1 유달산 공원관리소 061-270-8357

목포시와 다도해를 한 눈에 굽어볼 수 있는 높이 228m의 목포 뒷산으로 기암절벽이 첩첩하여 "호남의 개골" 이라고도 한다. 유달산에는 대학루, 달선각, 유선각, 낙선대, 소요정, 관운각 등 6개의 정자가 있으며, 산 주변에는 2.7km의 유달산 일주도로가 개통되어 있다. 산 아래에는 4.19 기념탑, 현충탑, 가수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 노래비' 등과 조각작품 100여점이 전시된 조각공원, 난공원 등이 있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유달산은 노령산맥의 맨 마지막 봉우리이자 다도해로 이어지는 서남단의 땅끝인 산이다.

 

이엉으로 바위 전체를 덮어서 마치 아군의 군량미처럼 꾸며 왜군이 감히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는 설화가 전해오는 노적봉을 비롯하여 해발 228m의 일등바위와 이등바위로 나뉘어져 있다. 정상에 올라서면 목포시와 다도해의 경관이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고 그 사이를 오고 가는 크고 작은 선박들의 모습이 마치 한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노적봉은 유달산 정문격인 등구의 좌측변에 솟아있는 큰바위 봉우리이다. 목포시 대의동 2가 1의 120번지에 위치한 노적봉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전술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오고 있으며 한때 초등학교 교과서에 소개되어 더욱 유명해진 곳이다. 임진왜란때 충무공 이순신께서는 적은 군사로 많은 왜적을 물리치기 위하여 이 봉우리에 이엉을 덜어 아군의 군량미로 위장함으로써 우리의 군사가 엄청난 것처럼 보이게 하여 겁을 먹은 왜군이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가게 했다는 장군의 뛰어난 전술을 이야기한 것으로 진도의 강강술래, 영산강 횟사루, 울뚝목 쇠줄 등은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겠다.

 

 

오포대는 조선식 선입포로서 조선 헌종 10년(1667년)에 제작되었고, 높이 5자, 구경 3자 5푼, 기부 8치, 주량 733근, 1회 발사시 화약 소비량 30량이었다고 한다. 1913년 8월 신식 대포로 일본 오오사까 포병공장에서 구입, 대체했고, 그 전에 있는 구식 대포는 일본의 신사경내로 옮겼다고 한다.

 

당시 오포대 담당직원이 정오에 맞춰 현재의 이충무공 동상 뒤에 있는 오포대에 올라가서 포탄 없이 포구에 화약과 신문지를 넣고 쏘아 굉음과 함께 목포 상공에 휴지가 흩어지면, 시민들은 "오포 텄다. 점심 먹자"라는 신호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 말기 일본이 전쟁수행을 위한 공출로 신·구 오포를 걷어가 버렸다고 한다. 1988년 12월 다시 이를 복원, 당시 오포대에 전시하고 지방문화재138호로 지정 ·보존하고 있다.

 

* 유달공원 입구 - 달성각 - 유선각 - 마당바위 - 일등바위 (2km, 40분 소요)
* 유달공원 입구 - 소요정 - 이등바위 (1km, 20분 소요)

 

목포시 죽교동 333번지 목포시사 전라남도 기념물 제21호

목포시사는 40.49m²(12.25평) 크기의 목조 기와로 되어 있으며 1890년 건립되었다. 1997년 10월 11일 전남 기념물 21호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은 조선 중기부터 구한말까지 당대의 명사들이 매년 봄·가을에 모여 한시(漢詩) 백일장 등의 행사를 가졌다. 1890년에는 유산정이라 불리웠으며 1920년에 유산사(儒山社)로 개명하고 확장·중수하였다. 그 후 1939년 목포시사로 다시 개명되었다. 그 무렵 구한말의 학자 정만조선생이 머물면서 학풍을 진작하여 그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노래비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 삼학도 파도깊이 숨어드는데 / 부두의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


1930년대 가수 이난영씨가 불러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노래 '목포의 눈물'이다. 1934년 조선일보사는 일제의 탄압으로 억눌려 있던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서를 북돋우기 위한 문화사업의 하나로 향토 신민요 노래가사를 공모했는데, 목포 출신인 문일석씨의 가사가 당선되었고, 작곡가 손목인씨가 곡을 붙여 '목포의 눈물'노래가 탄생하게 되었다. '목포의 눈물'은 음반이 출시되자마자 대히트를 기록하였으며 전국적으로 알려져 오늘날까지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부르는 대표적인 목포의 노래이다. 

 

1917년 목포시 양동에서 태어난 이난영씨는 집안이 어려워 목포공립보통학교를 자퇴하고 조선면화주식회사 조면공장의 여공으로 일을 하기도 했다.
16세때 삼천리가극단의 특별단원으로 채용되었고 이후 OK레코드사를 통해 본격적인 대중가수로서의 이름을 떨치게 된다 그녀는 당시 일제 식민 치하의 서러움을 노래하듯 애달프게 이 노래를 불러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리게 했는데, 목포의 눈물노래비는 바로 이 노래를 부른 목포 출신 가수 이난영씨와 작사가 문일석씨를 기념하기 위해, 1969년 예총 목포지부가 주관하여 세운것으로 비의 높이는 211cm, 너비는 247cm이다.
목포항에서 20분 정도 걸어가면 운치있게 지어진 목포문화원 건물이 나타나는데, 이 건물은 본래 1900년 일본영사관으로 지어진 것을 1990년부터 목포문화원에서 사용하고 있다. 이곳에서 조금만 더 걸어 올라가면 유달산 입구에 도착하게 된다.

유달산은 서울의 남산 처럼 목포를 대표하는 상징이라 할 수 있어 목포를 처음 찾는 여행객이라면 꼭 한번 둘러 보아야 하는 관광지라 하겠다. 목포의 눈물노래비는 바로 이 유달산중턱에 세워져 있다.


이 곳에 오르면 푸른 바다에 둘러싸인 목포 시가지, 유달산의 수도하던 선비를 사모하던 세 처녀가 섬으로변했다는 전설 이 얽혀 있는 삼학도, 그리고 다도해의 절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여 저절로 목포의 눈물 노래 가락을 흥얼거리게 한다.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자리잡고 있는 유달산(해발 228m)은 전지역이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는 돌산이다. 소나무에 의해 조금 가려지기는 했지만, 유달산은 산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바위덩어리로 보이는데 산 입구에서부터 정상까지의 등산코스가 대부분 돌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달산은 목포시민들이 즐겨찾는 곳으로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고, 산 주 변에는 2.7km의 유달산 일주도로가 개통되어 있어 접근하기에도 편리하다. 갖가지 모양의 기암괴석과 정자, 누각, 사찰 등이 산재해 있고, 산 아래에는 1만3,000여평의 부지에 한국조각연구회 회원들의 작품 100여점이 전시되어 있는 조각공원. 그리고 한국난, 동양난, 양난 등 250여 종의 난을 전시하고 있는 난 전시관 등이 있어 찾는 이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가을 문학예술기행의 목적지로 선택하기에 목포 만큼 적합한 장소도 없을 듯 싶다.목포의 눈물 노래비 이외에도 목포에는 시원스레 펼쳐진 다도해의 절경을 배경으로 향토문화관, 박화성 문학기념관, 남농 기념관, 해양유물전시관 등 다양한 문화와 예술을 감상할 수 있는 볼거리들이 풍성하기 때문이다. 목포의 눈물을 흥얼거리며 유달산정상에 올라도 보고, 가을바다를 감상하며 예술인들의 숨결을 느껴 보고, 신선한 해물요리와 바닷가레스토랑에서의 커피한잔으로 여행을 마무리하는 것은 어떨까 추천해본다.

이난영 (본명 옥례)은 1916년 여름. 목포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양동의 초가집에서 태어 났다. 아버지의 술주정과 가난에 시달리다 못한 어머니가 제주도로 가정부살이를 떠나버린 것은 그녀 나이 10세 무렵. 그 때부터 오빠가 다니는 솜공장(조선면화 공장)의일도 거들었다. 그러다가 북교 초등학교 4학년 때에 어머니가 계신 제주로 가게되어 학교도 중퇴 했다. 엄마와 함께 제주도의 생활이 시작되고 극장을 경영하는 주인집의 아이를 돌보면서 흥얼거리는 노래소리를 높이 평가하게 된 집주인이 그녀를 소위 막간가수(영화나 연극이 시작 되기전 나와서 노래하는 가수)로 활동하게 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삼천리 가극단장의 권유로 특별 단원으로 채용된 것이 1932년 16세되던 해였다. 극단단원으로 일본 공연을 갔었으나 흥행에는 실패했다.우연히 OK레코드 이철 사장의 눈에 띄어 작곡가 손목인에게 소개되어 목포 출신문일석의 작사인 "목포의 눈물" 을 부르게 된것이 드디어 노래의 여왕 이난영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목포의 눈물은 이난영 특유의 목소리와 우리의 한이 서린가사로 지금도 널리 애창되고 있다. 그녀는 4남 3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모두 미국에서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유달공원 입구 - 목포의 눈물 노래비 - 달선각 - 유선각 - 마당바위 - 일등바위 (약 1시간 소요)

 

유달산조각공원  061-270-8357

목포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양지 바른 유달산 기슭 이등봉 아래 산자락에 자리하고있다. 
 

 

유달산 조각공원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조성된 14,000여평 규모의 야외공원으로 1982년 10월 문을 열었다. 처음에는 조각을 인간의 의지로 사물에 질서와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이라 믿는 현대조각가 모임 한국조각연구회 회원 44명의 작품 104점이 유달산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며 전시되었고, 1994년 11월에 한국조각연구회 회원 64명의 예술성이 높은 빼어난 조각작품 78점이 교체되어 한국 조각예술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야외 전시 방법이 여러 가지 자연 형태와 조화를 이루고 있어 목포 찾는 관광객들은 이곳의 움직이지 않은 조형물의 생명력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기 위한 인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야외 조각공원이기도 한 조각공원에는 야외음악당, 분수, 휴게소 등의 부대시설 및 사찰인 관음사가 있으며 우리의 전통 한옥 한 채가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조각품주변에는 희귀수목으로 조경되어 있고,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가 한데 어우러져 있다.

 

죽교동 산 27 유달산체육공원

 

목포시는 우리나라 최서남단의 항구도시로 유달산과 호남 옥토를 가로질러 흐른 영산강, 그리고 그림같은 다도해가 어우러진 고장이다. 유달산은 영혼이 거쳐가는 곳이라 하여 영달산이라고도 불렀다. 죽교동 체육공원은 목포시가 체육시설 20종 74점을 설치하여 시민의 건강증진에 기여하는 곳이다. 기암괴석 사이로 오밀조밀한 등산로가 있어 유달산의 정취를 한껏 즐길 수 있다.

 

유달산에는 영혼이 심판을 받는다 하여 이름지어진 일등바위(율동바위), 심판을 받은 영혼이 이동한다 하여 생긴 이등바위(이동바위), 옛날 봉수를 올려 소식을 알리던 봉수대, 전통 사찰인 달성사 등이 있다.

 

죽교동 300 달성공원

 

유달산 자락의 달성공원은 선조들의 얼과 풍류가 깃든 자연과 예술이 함께 조화를 이룬 쉼터로 정상 등반, 다도해 시가지 전망의 기능을 가진 공원이다.

 

인근에는 달성사라는 고찰이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대둔사의 말사로 본디 대원사라 불렸다절의 창건에 대해서는 조선 말기 창건설 및 1913년 창건설 등이 있는데 1913년 4월 초파일 대둔사에 있던 노대련선사가 이곳에 와서 창건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죽교동 317 달성사 061-244-1489 

 조각공원으로 가는 길을 따라 200m가면 입구에 표시가 나타난다. 여기에서 약 50m의 계단을 오르면 산 아래에 위치한다.  

 

달성사는 유달산의 동남방에 위치하는 대한불교조계종 대둔사의 말사다. 달성사는 전통사찰 69호이며, 문화재(전남 유형문화재 제228호, 제229호)를 보유하고 있는 목포에서 유일한 사찰이다.

 

절 앞에는 달성사 창건주인 노대련선사를 기리기 위한 창건주노대련선사창공비가 세워져 있다.

 

달성사는 목포시내에 위치하고 시민들이 많이 왕래하는 지리적 특징에 어울리게 현대적인 느낌을 물씬 풍긴다. 사찰의 주변은 석축으로 둘려있고 높은 돌계단 위를 올라서 사찰이 자리하고 있어서 마치 요새를 보는듯한 느낌도 준다.  

 
최근 신축불사가 거의 마무리된 전각의 모습도 화려하고 웅장하다. 본래 달성사(達城寺)라 하였는데 사찰의 안내판에는 달성사(達聖寺)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그 연유를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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