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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상남도

의령 부림-입산마을 안희제생가 유학사 미타산

by 구석구석 2009.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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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읍에서 20번 국도를 따라 창녕으로 가다 보면 도중에 북쪽으로 달려 낙동강에 합류하는 유곡천과 만난다. 세간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가면 유곡천과 접한 부림면 입산리 입산마을이 나온다. 마을 입구에는 도로 양쪽으로 굵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방문객을 맞는다. 도로 오른쪽에는 ‘입산마을을 빛내신 인물들’ 일곱 분의 이름과 업적을 새겨 두었다. 백산 선생과 함께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을 한 안기종, 독립운동가 안준상 등의 이름이 나란히 있다.

마을은 해발 200m를 살짝 넘는 장백산을 서쪽에 병풍처럼 두고 동쪽으로는 논과 도로를 지나 유곡천을 바라본다. 17세기 초에 이주해와 10대를 이어온 탐진 안씨 집성촌인 입산마을에는 40가구 정도가 있는데 남북으로 긴 마을의 북쪽에 백산 안희제 생가와 탐진 안씨 종택을 비롯해 고택이 모였다. 작은 마을이지만 경남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이 다섯 채 있다. 백산 생가와 탐진 안씨 고택, 안준상 고택, 안호상 고택, 안범준 고택이다.

탐진안씨 종택

 

담장을 두르고 마당이 있는 입산마을회관 앞을 지나 논을 옆에 두고 마을 길을 걸으면 가장 먼저 안호상 고택이 나온다. 새로 지은 아래채와 협문 뒤로 1911년에 지은 안채가 들어앉았다. 역시 20세기 초에 지은 마당 넓은 안범준 고택의 좌우 골목으로 올라가면 탐진 안씨 종택과 안준상 고택이 완만한 비탈에 자리 잡았다. 황토에 돌을 쌓은 담장은 마당이 보일락말락 하는 딱 그 정도의 높이다. 종택은 잘 관리된 뜰과 집 뒤의 대나무 숲이 인상적이다. 대나무 숲 앞 벤치에서는 유곡천과 마을 앞 들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담장을 넘어온 매화가 막 꽃망울을 터트린다.

 

네 곳의 고택을 지나 모퉁이를 돌면 널찍한 주차장 건너 역시나 야트막한 담장을 두른 백산 생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마당 깊은 집에는 초가 뒤로 백산고가란 현판을 건 사랑채가 서 있다. 생가는 1990년대에 복원한 것이다. 

 

백산 안희제 생가

1885년 부림면 입산리 속칭 설뫼마을에서 태어난 안희제선생은 일제시대 근대화운동에 앞장섰던 실업가이며 광복운동에 헌신했던 애국지사였다. 1907년 창남학교, 1908년 의신학교, 1909년 동래구명중`대구교남학교를 세워 신학문 보급에 힘썼다.

27세 때 만주에서 대동청년단을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을 펼쳤으며 30세에는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설립, 독립운동자본금을 조달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 1943년 만주대종교단 사건으로 구금돼 옥고를 치르다 출소 4시간 만인 9월 2일 59세의 일기로 유명을 달리했다.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이며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93호로 지정된 생가는 안채`집사실`부속사로 이뤄져 있다. 6칸 크기의 팔작지붕 건물인 안채는 동쪽으로 마루`방`대청`부엌을 배치한 뒤 다시 남향으로 1칸 마루를 둬 사랑방 구실을 하게 만든 것이 특이하다. 초가로 된 집사실도 안채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유사한 구조다. 여러 기능을 한 건물 안에 처리한 이 같은 배치는 조선후기 민가건축양식을 잘 보여준다.

 

부림면 묵방리 유학

약1300여년전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는 고찰로 미타산 기슭에 있다. 원래 이 유학사는 미타산의 8부 능선에 자리잡고 있었으나 조선초기 때 태조 이성계의 왕사 (王師)를 지낸 무학대사가 이 유학사에 들려 사찰이 앉은 위치가 풍수지리에 맞지않다고 하여 지금의 위치에 절을 옮겨지었다는 전설이 전하여 지고 있다.

 

 무학대사는 풍수지리에 무척 밝았기 때문에 당시 이성계를 도와서 조선개국과 함께 한양에 도읍을 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일화는 누구나 다 알고있는 사실이니, 유학사의 전설 또한 전혀 근거 없는 것이 아닐 것으로 믿어진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부근의 형세가 마치 날아가는 학의 형상을 닮았다고 하고, 예전에 유학사가 있던 자리는 그 학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였다하니 학의 머리에 절이 앉아서는 아니되고 지금의 위치에 사찰이 있어야만 학이 마치 절을 품고 있는 형상이 되어서 좋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찰의 이름도『학이 절을 품은 채 머무른다』는 뜻으로 유학사라 하였다고 한다.

 

이 때가 조선초기 정종2년(1399년)이라 알려지고 있으며 그 뒤 무학대사는 오랫동안 이 유학사에 머물고 있다가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이 말은 지금에 와서 상고할 길이 없고, 다만 그러한 전설이 구전되고 있다는 사실만 기록할 따름이다.

 

▲ 유학사 약수

경남 의령 미타산(彌陀山·663m)

서방 극락정토에 산다는 아미타불의 '미타'에서 산 이름을 따왔다. 아미타는 무량수(無量壽) 무량광(無量光)의 지혜 광명을 상징하는 부처다. 그 부처가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을 깨치게 하는 산이다. 부처의 가피가 산줄기로 흘렀을까? 미타산은 국사봉과 천황산 등 예사롭지 않은 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한편으로 미타산은 '칼부림의 산'이다. 고려 무인정권기에 세력을 떨친 천민 출신 장군 이의민이 미타산에 숨어들었다가 최충헌 형제의 칼에 맞아 죽었다는 전설이 있는 산이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이라! '칼 든 자는 칼로 망한다'는 역사를 보여주는 산이다.

 

▲ 유학사 앞 주차장. 원점회귀 산행이다. 자가 운전자는 여기에 차를 대면 된다.

산행은

유학사

(留鶴寺)를 출발해 다시 돌아오는 완벽한 원점회귀 산행이다. 들머리에서 미타산 계곡을 따라 올라, 묵방리 계곡으로 내려오는 코스다. 미타산 정상까지 산행로는 뚜렷하다. 크게 신경 쓸 일이 없다. 하지만 정상에서 내려와 하산하는 길은 주의가 상당히 필요하다. 산행 이정표가 없고, 길 모양이 뚜렷하지 않아 산행 안내리본을 잘 따라가야 한다.

▲ 원효가 세우고 무학이 리모델링한 유학사. 학이 노는 절인데, 학은 없다. 그흔한 '테이프 염불' 소리가 없어 좋다.

유학사를 오른쪽에 두고 산길을 걷는다. 왼쪽 능선으로 붙는다. 10분 정도면 유학사에서 칠공 마을로 가는 마을길을 만난다. 지금은 사람이 다니지 않아 마른 낙엽이 수북이 쌓였다. 마을길 끝나는 데서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을 택해 가뿐히 오른다. 5분 정도 가면 버려진 천막집 한 채가 보인다. 바로 옆에 대나무밭이다. 어둑한 대숲 가운데로 길을 낸다.

숲길이 끊어진 지점에서 왼쪽 실개천으로 튼다. 누가 놓은 건지는 모르지만 앙증맞은 통나무 다리가 있다. 100여m 거리에 버려진 집 한 채가 또 있다. 이 집을 스쳐 길을 올라서면 곧바로 시멘트 임도를 만난다.


절 두 곳이 임도 양끝에 걸쳐 있다. 왼쪽은

백화사

, 오른쪽이

불관사

방향이다. 불관사로 간다. 불관사는 10여 년 전에 지은 사찰이다. 절의 깊이나 볼거리는 별로 없다. 불관사 대웅전은 암벽에 건물을 올렸다. 암벽은 유리와 시멘트로 벽을 쌓았다. 그 안에 네 곳의 파이프에서 물이 나온다. 용천약수다. 물맛이 깔끔하다. 물통에 물을 충분히 채웠다.

 

불관사에 5분쯤 떨어진 곳에 중요한 갈림길이 있다. 아래로 가면 미타산 가운데 산자락을 따라 오르는 길이다. 계곡에 바짝 붙어 걷는 코스다. 물이 불어나면 끊길 염려가 있다. 산행팀은 아랫길을 버리고 윗길을 택했다. 길은 둘레길처럼 평평하게 나 있다. 10분쯤 걸었다. 반송을 재배하는 곳을 지난다. 아이 키 높이만 한 반송이 질서 정연하게 산 비탈면에 자란다. 5분 정도 가자 양봉을 치는 독립가옥이 보인다. 큰 바위 하나가 입구인 듯 길가에 서 있다.

길은 하나다. 헷갈릴 일도, 서두를 이유도 없다. 철쭉이 세찬 비를 못 이겨냈는지 길가에 분홍빛을 흘리며 떨어졌다. 낙화를 보는 마음은 안쓰러웠다. 이달 말께면 미타산은 철쭉이 무성할 것이다.

비교적 완만한 비탈길이다. 쉬엄쉬엄 가면 숨이 찰 일이 없겠다. 30분 정도 올랐다. 산꾼들이 토굴집이라고 부르는 민가가 나온다. 노부부가 김을 매고 있다. 토굴집 위에 암자가 있다. 스님에게 암자 이름을 물었더니 "그게 무슨 소용이게요"라며 말을 막으며 합장한다.

 

▲ 7푼 능선에서 만난 토굴집. 노부부가 산다.

남루한 미타산성을 따라 정상 바로 앞의 능선까지 다가섰다. 정상으로 꺾는 길옆에 헬기장이 있다. 능선에 올라섰더니 쉴 만한 정자가 있다. 조망이 좋지 않아 그냥 통과한다. 정자가 있어 정상까지 조금 더 걸어야 하나 싶었는데 곧바로 정상이 나타난다. 이제 이마에 땀이 날 만했는데 벌써 정상이다. 수월하게 정상을 밟았다.

 

 

▲ 미타산 표석이다. 이 산은 이정표가 섭섭할 정도로 없는데, 정상 표석은 다른 산보다 더 잘 가꿨다.

정상 표석에 철쭉이 활짝 폈다. 표석 뒤에 조망하기 좋은 바위가 있다. 천황산과 국사봉, 대암산 줄기가 확연하다. 가야산, 비슬산, 화왕산이 하늘과 맞닿아 푸른 금을 긋는다. 지리산과 황매산이 보일 만한데, 안개로 막혔다. 합천군 초계면, 적중면 들판이 푸른색을 더 보탠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태어난 율곡면도 보인다. 광주 노씨인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조상들이 윗대부터 산다는 청덕면도 눈에 들어온다. 황강은 그런 마을 사이로 율동감 있게 흐른다.

가슴 속이 팍팍 트인다. 깊게 호흡을 하고 정상을 나왔다. 15분 정도 평평한 길을 걷는다. 여기도 철쭉이 길가에 깔렸다. 하산하는 갈림길에서 잠시 상사덤에 들렀다. 마을 처녀가 상사병에 떨어져 죽었다는 바위더미다. 끔찍한 사건을 바위 이름에 붙였더니 그대로 전설이 됐다. 듣고 보니 바위 무덤이다.

상사덤에서 돌아 나와 다시 갈림길에 섰다. 길이 확연한 등산로를 조금 걷다가 왼쪽으로 난 갈림길로 방향을 바꾼다. 이 갈림길을 놓치면 하산길이 난감해지기 쉽다. 반드시 주의해서 찾도록 하자.

5분 정도 더 걸으면 평평한 바위 전망대가 나온다. 점심을 먹거나 쉬기에 알맞다.

소나무 숲을 지나 본격적으로 하산길로 접어든다. 30분 정도 무난하게 걸으면 안부에 닿는다. 다시 한 번 능선을 넘어 두 번째 안부까지는 10분 정도. 벌목 작업의 흔적이 어지럽게 나 있어 길을 놓칠 우려가 있다. 주의해서 산행 안내리본을 챙겨 보자.

410봉을 가볍게 지나쳐 120m쯤 떨어진 곳에 묘 1기가 있다. 이 묘에서 좌회전 해 느슨한 경사를 타고 30분쯤 내려간다. 시루 모양의 바위를 보며 왼쪽으로 튼다. 시루바위에서 5분 정도 걸으면 또다시 묘 1기를 만난다. 미타산 하산길에 아무런 이정표가 없기에 드문드문 나타나는 묘를 주의 깊게 눈여겨봐야 한다. 여기서부터 산허리 숲길을 따라 묵방 마을까지 이어진다. 어느 새인가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우렁차게 들린다.

 

 

▲ 하산길에서 만난 묵방마을이다. 7~8가구가 산다.


10분 정도 지나면 묵방리로 가는 임도를 만난다. 임도 끝나는 지점에 묵방 마을 정자가 있다. 돌다리를 지나 묵방 마을을 왼쪽에 두고 아랫길로 내려간다. 계곡을 따라 시멘트 길이 구비를 돌고 있다. 20분가량 딱딱한 길을 걸어야 한다. 이런 길이 유학사까지 이어진다. 유학사는 신라의 원효 대사가 창건했다. 원래는 미타산 8푼 능선에 지었는데, 조선조 무학 대사가 풍수지리에 맞지 않다며 현재 자리로 옮겨 중건했다. 절은 극락전과 요사채 2채만을 품어 아담하다. 그 흔한 '카세트 염불'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학이 날아들었다는 유학사. 이제 학은 전설 속에서만 날 뿐 더는 절을 찾지 않는다.

 

▲유학사계곡


유학사 앞 석교 아래 계곡물이 초여름 마중을 나온 양 신나게 흘렀다. 9.7㎞, 4시간 30분 정도 소요됐다.

 

문의 : 라이프레저부 051-461-4164. 홍성혁 산행대장 010-2242-6608. 글·사진=부산일보 전대식 기자

 

유학사 주변에 먹을 만한 데가 없다. 부림면 소재지까지 나와야 한다. 터미널 앞에 있는 국밥 전문점

무진장

(055-574-7744)에 들러보자. 고기를 양껏 썰어 넣은 돼지국밥(5천원)과 담백한 쇠고기국밥(6천원)이 먹을 만하다. 찬으로 나오는 묵은지 맛도 인상 깊다. 바로 옆에 있는

충남식당

(055-573-0102)의 추어탕(5천원)도 산꾼들이 즐겨 찾는 음식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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