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고속도로 최남단 동해시까지 간 다음 7번 국도를 타고 남하, 원덕면 소재지 지나자마자 416번 지방도로 우회전한다. 7km쯤 가면 축전리에서 사곡리로 들어가는 도로표지판을 따라 좌회전하여 5km쯤 가면 사곡리 마을이다.
삼척 응봉산 재량밭골
여름 계곡 산행지로는 거의 환상적 조건 갖춰사곡리~재랑밭골~절터~정상~덕구온천 20km
응봉산은 등산꾼들에겐 보물 산이다. 정상 동서남북 사방으로 하나하나 정성들여 선별해 끌어모은 듯한 절경의 능선과 계곡들을 지녔다. 동쪽의 덕구온천장에서 이어지는 옛재 능선과 온정골, 구수골, 서쪽의 용소골, 북쪽의 재랑밭골 등은 지리산이나 설악산 중의 산릉ㆍ계곡들과 수평의 저울대를 이룰 만큼 경치가 뛰어나다.
간혹 어떤 꾼들이 설악이나 지리보다 더 낫다고까지 말하는 것은 탐승의 자유롭기까지 따져서다. 절경으로 이름난 산들은 대부분 국립공원이나 도립공원으로 지정돼 자유로이 즐기기가 매우 까다로워졌다.
저 안의 계곡 경치가 아무리 좋아뵈도 허용된 길이 아니면 들어가선 안 되며, 계곡에서 막영은 커녕 잠시 탁족하려 해도 눈치가 뵈는, 자유로움 속의 자연이 아니라 긴장 속의 자연이 되었다.
응봉산은 이러한 제약에서 한껏 자유롭다. 숲 그늘이 좋은 곳이면 거기 텐트를 치고 하룻밤 막영할 수 있으며, 아름다운 암반 무늬가 어른거리는 계류 한가운데로 첨벙거리며 거슬러 오를 수도 있고, 몹시 더우면 온몸으로 뛰어들어 더위를 식힐 수도 있는 자유가 이 응봉산에는 있다.
설악, 지리의 시각적 아름다움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응봉산이 가진 이 자유로움의 값어치를 결코 뛰어넘지 못할 것이다.
다만 기이한 일은, 사람들이 이곳 응봉산에서도 그저 남들이 갔던 곳만 반복해 찾아간다는 점이다. 옛재 능선과 온정골, 그리고 용소골만이 응봉산의 모두인 듯, 이 세 가닥 등산로만 주로 왕래하고 있다.
그래서 새삼 주목한 곳이 응봉산 북쪽의 재랑밭골. 용소골이나 옛재 능선에 비해 찾는 이들이 극히 드물지만, 이런 점이 의아스러울 정도로 재랑밭골 풍치는 뛰어났고 탐승 조건도 좋았다.
용소골은 계단이나 밧줄이 없다면 지나기 어려운 곳이 여러 군데여서 초심자를 동행하기가 다소 꺼려지지만 재랑밭골은 그런 데가 거의 없다. 계곡이 넓고 순하여 골을 따르다가 폭포나 소로 길이 막힌다 해도 어렵지 않게 우회해 지날 수 있다. 계류에 간혹 몸 담그기도 하며 무더위를 깡그리 잊을 수 있는, 여름 계곡 산행지로는 거의 환상적 조건을 갖춘 대상지다.
우리는 이 재랑밭골을 자유롭게 즐기기로 했다. 산행 코스를 미리 정할 것이 아니라, 계곡을 따라 오를만큼 오르다가 절터쯤에서 되내려오기로 했다. 7월4일 오늘 일기예보는 ‘오전 한 때 비, 오후에 갬’이다. 연중 일기예보가 가장 부정확한 시기이지만, 한 번 믿어보기로 했다.
이곳 사곡리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용주 이장(59) 말을 빌면 저 위에 밭터가 넓은 게 있어서 재랑밭골이라 했다고 한다. 재랑밭의 ‘재랑’은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른다며 고개를 저었다. 계곡 중간에 큰 지류인 사곡리산기골이 갈라지는 지점의 둔덕엔 이씨가 어릴 적만 해도 여러 가구가 살았으나 울진ㆍ삼척 무장공비 사태 이후 이 골짜기 안의 민가는 모두 철거되었다. 이씨는 “이 골 안에서도 공비를 몇인가 잡았다지요”했다.
하촌 마을 박태식씨네 한옥 민박집에서 나와 일단 사곡분교장까지 가서 주차했다. 하늘선에서 이미 범상치 않은 기상을 보이는 노거송을 길 저 안쪽에 두고 지나자마자 우측 아래로 짤막한 경사로가 나 있다. 풀이 우거진 이 길로 50m쯤 들어가면 훤하고 정갈한 분교장 마당이다.
이곳 사곡분교장은 옛 교사는 모두 헐리고 ‘충효(忠孝)’ 두 글자가 희미한 표석만 하나 남았다. 해바라기와 흡사하여 첫눈엔 해바라기라고 착각한, 원추천인국(圓錐天人菊)이라는 외래종의 화사한 노랑색 큰 꽃이 교정의 절반을 뒤덮고 있다.
학교터의 경계로 향나무들이 담장처럼 빙 둘러 서 있어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다. 야영터로 그만이지만, 다만 수도마저 철거되어버려 식수는 가까운 마을 집에 가서 구해야 한다.
상촌마을 안 삼거리 모퉁이엔 아름드리 거목이 여러 그루 모여 섰고, 그 가운데 당집을 들인 성황당이 있다. ‘허가 없이 무속행위를 금한다’는 팻말까지 세워놓은 것으로 보아 무속인들에겐 상당히 영험한 곳인 모양이다. 이 성황당 앞을 지나 내려가면 곧 재랑밭골 주류이지만, 시간을 좀 절약하기 위해 삼거리에서 왼쪽 농가 앞마당 길로 접어들었다. 마지막 농가를 지나서 저 위까지 차가 들어갈 수 있지만, 올 여름이 되기 전에 차단기를 설치할 것이라 하니 분교장에 차를 두고 걸어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입산통제기간을 알리는 팻말 오른쪽, 풀이 수북하게 자란 임도로 들어가자 곧 곧 길고 키가 큰 소나무들이 서늘한 그늘을 드리운 숲지대다. 임도가 곧게 그 송림 속을 꿰고 있다. 송림길 중간의 밝은 주황색 지붕을 한 건물은 가축을 기르던 폐축사로,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채 음침한 어둠을 안고 있다.
송림이 끝나고 작은 공터가 훤하게 드러난다. 왼쪽엔 잡석을 대강 쌓아올린 잿빛의 작은 축대들이 산비탈을 이루고 있다. 이용주 이장이 말한 철광터다. 30여 년 전 이 철광이 폐광되기 전엔 철광 덕에 집이 120호까지 될 만큼 마을이 컸다고 한다. 원래 이장네 집터가 분교 자리였으나 학생 수가 늘면서 지금의 분교장 자리로 옮겨 짓기까지 했지만, 지금 사곡리는 35호 정도로 줄었다.
공터 아래 수중보의 둑을 타고 계곡을 건너가면 둔덕 위에 평평하고 그늘이 진 숲지대가 있다. 이곳에서 하루 막영하고 산행해도 좋을 것 같다. 우리가 송림 속으로 이미 지나쳐온 구간이긴 했지만, 수중보 하류쪽의 계곡 경치도 대단했다.
양쪽으로 물길을 가르는 암반지대와 세찬 물줄기를 부챗살처럼 내리쏟고 있는 작은 폭포 등으로 절경을 이루고 있다.
공터에서 100m쯤 더 오르자 비로소 찻길은 계류에 막힌다. 여기서 골 우측으로 건너며 등행길이 이어진다. 길은 옛 산판길 흔적을 거의 그대로 따랐다. 골짜기의 가장 낮고 평평한 곳을 따라 트럭이 오르내리는 길을 만들었을 것이다. 때문에 줄곧 계곡을 수도 없이 좌우로 건너며 길이 이어진다.
건너는 곳마다 이곳 울진지역 산악회를 비롯해 여러 등산모임들의 리본이 매어져 있지만, 리본이 없는 곳도 매우 많다. 신경을 기울여 살피면 오래지 않아 건너편 길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우정 그렇게 길만 찾아 오를 이유가 없었다. 그냥 골을 따르다가 소나 폭포 등으로 길이 막혔을 때만 우회할 작정을 하고 골을 따라 오르면 된다.
하상은 기복이 그리 심하지 않아 편안한 마음으로 물살을 즐기며 올랐다. 굵은 바윗덩이들이 모인 곳이거나 호박돌들이 모여 하상을 뒤덮은 곳, 혹은 잔돌 하나 없이 말끔한 암반을 이룬 곳 등으로 변화를 보이는 재랑밭골에서 우리는 더위를 잊고 서늘한 물속을 걸어 오르는 재미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물속엔 또한 수많은 종류의 물고기들이 까불거리며 헤엄쳐 돌아다녔다. 실로 오랜만에 이런 절경의 원시 계곡을 만끽하는 즐거움은 종내는 이 계곡에 대한 고마움과 애정으로도 변했다.
산판길이 다시 오른쪽으로 건너며 저 앞 수풀 사이로 긴 축대가 바라뵌다. 분교장에서 약 3km 상류지점으로, 고압선이 정수리 바로 위로 지나고 축대 오른쪽 옆으로 굵은 지류인 사곡리 산기골 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계류를 건너 축대 밑을 따르다가 둔덕 위로 올랐다. 작고 말끔한 오두막집과 간이화장실이 한 모퉁이에 선 널찍한 묵밭이 펼쳐진다. 하촌 마을 어느 노부부가 이따금씩 묘목을 돌보러 올라온다는 그 묵밭이다(WGS84 좌표 N 37°06′41″ E 129°14′46.3″). 이곳 공터에서 다시 산판길은 뚜렷한 형태로 골 상류를 향하고 있다.
오전에 잠시 비가 내린 뒤 곧 개겠다는 일기예보는 역시 맞지 않았다. 가늘게 뿌리기 시작한 빗줄기는 결국 ‘한때 비’ 정도를 넘어서는 장대비로 변하여 간헐적으로 뿌리기를 오전 내내 반복했다.
집터를 떠나 위로 오르다가 계류를 왼쪽으로 건너 100m쯤 오른 곳엔 짧고 굵은 뚝발소가 세차게 꽂히고 있다. 4~5m 남짓한 폭포 위 검은 바위면에 붉은 페인트 십자가가 그려져 있고, 그 아래는 사람 두어 명이 비집고 앉아 비를 피할 만한 공간이 있다. 누군가 종종 찾아와 기도를 드리곤 하는 자리 같다.
집터를 떠나 10여 분 뒤부터 산판길 흔적은 점점 희미해지더니 소로로 변했다. 결국 산판길 흔적은 말끔히 사라진다. 왼쪽 산비탈로 족적이 보이길래 따라가 보았으나 지류를 따라 저 위 능선을 향해 올라가는 길이다. 다시 계곡으로 내려와 계류 가장자리를 따라 오르다가 리본과 더불어 나타난 길목을 잡아 올랐다.
이곳은 송이산지라서 곳곳으로 송이 채취꾼들이 다닌 소로가 나 있다. 그러므로 무턱대고 길이 있다고 하여 따라 갔다가는 큰 고생을 하게 되므로 항상 계곡 주류를 잃지 않도록 유의한다.
길이 소로로 변하며 경치는 한결 더 좋아지기 시작했다. 계곡이 좁아지며 암반지대가 시작된 것이다.
집터에서 1km쯤 상류로 올랐을까. 다시 우측에서 큰 지류가 흘러들고 있다. 주류와 수량이 비슷해서, 왼쪽이 주류임을 모르고 이곳에 다다랐다면 어느 것이 절터쪽의 주류인지 헷갈릴 정도다(WGS84 좌표 N 37°06′09.3″ E 129°14′25.1″).
▲ 층을 지어 흘러내리고 있는 재랑밭골 계류
주류로 접어들어, 절벽과 뚝발소로 길이 막히면 다시 몇 걸음 되내려와 족적을 찾아 오르기를 반복했다. 어떤 곳은 사태가 나서 흙비탈이 흉하게 드러난 한편 계곡이 크게 넓어지며 숲이 또한 무성하여 방향을 잡기 어려운 곳도 있었다. 이런 곳에서는 길을 찾으려 하지 말고 계류의 흐름을 따르면 된다.
빗줄기는 너무 굵어지고 너무 오래도록 쏟아졌다. 이런 비를 줄창 맞자 오한이 들었다. 계곡을 즐기려는 마음은 사라지고, 저 하류쪽 수량이 얼마나 늘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절터는 두 가닥의 지류가 합해지는 지점의 오른쪽(북쪽) 사면에 드러나뵈는 여러 단의 축대로 쉽게 알 수 있었다(WGS84 좌표 N 37°05′39.7″ E 129°14′05.7″). 이장 말로는, 일제 때도 있었던 절이 폐사된 이후 15년쯤 전 어느 스님이 다시 작은 절을 짓고 지냈으나 그 스님이 죽은 뒤 건물을 모두 철거했다고 한다. 날이 음습하게 흐린 탓인가, 이런 깊은 산골에서 어떻게 사시사철 홀로 지냈을까 싶게 절터에는 음기가 맴돈다.
그간 내린 비로 하류쪽 골 수량이 제법 불었을 것 같다. 그래서 여성들과 더불어 몇 사람은 응봉산 정상 넘어 옛재 능선길로 안전하게 덕구온천으로 하산키로 하고, 힘 좋은 남자 두 사람만 빠른 속도로 골을 따라 하산해 내려가 차를 가지고 온천장으로 마중오기로 했다.
응봉산 정상 북릉으로 이어지는 지릉길은 이곳 절터에서 만나는 두 계곡의 가운데 능선을 찾아 오르면 된다.
우측(남서쪽) 지류 옆의 족적을 따르다가 나뭇가지에 비닐을 매어 누군가 길 표시를 해둔 곳에서 왼쪽으로 빠져 골짜기를 가로지른 다음 지능선으로 접어들자 길이 나타났다.
코가 닿을 듯 가파른 급사면 지능선에 족적이 갈짓자로 꺾이며, 희미하나마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능선 중간 재랑밭골이 내려다뵈는 조망처에서 한숨 돌린 뒤 30분 이상 허덕인 끝에야 가파르고 답답한 구간이 끝났다.
이제는 노거송들이 듬성듬성 늘어선 멋진 능선으로 변했다. 이 능선 일대는 오소리 천국인 것 같다. 오소리의 검은 똥무더기가 몇 걸음마다 하나씩 놓였다. 어떤 녀석은 아예 똥통 삼아 구덩이를 파고선 그 안 가득 똥을 채워두었다.
이윽고 T자형 삼거리를 만났다. 커다란 소나무 고사목이 공룡뼈처럼 앙상한 가지를 뻗은 채 드러누운 곳의 밑둥치로 길이 이어진다. 만약 역으로 재랑밭골로 내려갈 경우 이 고사목을 지표 삼으면 될 것이다(WGS84 좌표 N 37°05′03.4″ E 129°13′39.2″).
이곳이 T자형 삼거리이긴 하지만 주능선의 삼거리는 아니다. 비닐 끈과 퍼런 천막이 버려져 있는 송이막터를 지나 조금 더 걷자 비로소 좌우로 뚜렷하게 길이 지나는 주능선에 다다랐다.
이 지점에서 300m쯤 더 가면 또한 T자형 삼거리가 나온다. 지형이 평평한 여기서 우측으로 난 뚜렷한 길은 용소골 상류부로 빠지는 길이므로 왼쪽 길을 택해야 한다.
울창한 숲속의 뚜렷한 길을 따라 큰 비석이 선 정상에 다다랐다. 우리가 올라온 길 초입에 ‘북릉, 탕곡, 벼락바위봉. 길이 험하니 반드시 경험자와 동행하라’는 간판이 서 있다.
정상 표지석 앞에서 잠시 쉬었다가 90도 왼쪽 온천장 길로 내려섰다. 바로 아래에 헬리포트가 있는데, 이곳에서 헷갈리지 않도록 한다. 우측의 온정골쪽 간판은 온천 원탕과 온천장까지의 거리까지도 표기돼 있어 이 길이 유일한 길인 줄 착각하기 쉽다. 물론 이 길로 내려가도 된다. 하류부엔 세계의 유명한 교량 미니어처가 골을 건너는 데마다 가설돼 있다.
그러나 비가 많이 내렸을 경우는 어떻게든 옛재 능선길로 내려가야 한다. 옛재 능선길은 헬리포트 왼쪽 옆으로 나 있으며, 리본이 여러 개 매어져 있지만 안내판은 없으므로 유의한다.
옛재 능선길은 소나무의 고장 울진의 대표 명산답게 아름드리의 길고 곧은 금강송들과 솔바람으로 시종일관 시원스러웠다. 이제 솔바람도 그만 지겹다 싶어질 즈음 앞이 훤히 트이며 계단 저 아래에 계곡으로 하산을 일찌감치 마친 최민희, 정상진씨 두 사람이 손을 흔들고 서 있다.
재랑밭골은 넓어서인가, 서너 시간 이어진 그 굵은 빗줄기에도 그렇듯 수량이 크게 불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물이 불어나니 경치만 더 좋더라”면서 두 사람은 녹초가 된 정상팀 앞에서 휘파람을 불었다.
자료출처
월간산 454호 안중국 차장
숙박(지역번호 033) 재량밭골 하류의 사곡리에 민박집과 펜션들이 몇 있다. 다만 어떤 펜션은 악취가 심한 돈사(豚舍)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여름이라 냄새가 심하지는 않은지 전화로 주인에게 직접 확인해 보고 이용하는 것이 좋다. 이용주 이장집(572-5876)은 민박과 마을에 하나뿐인 가게도 겸하고 있다. 박태식씨집(572-6655)은 산비탈 조망 좋은 곳에 자리 잡은 한옥민박집이다. 이밖에도 재량밭골로 진입하는 길에 여유로운 삶펜션(572-6724), 죽화우펜션(576-1500), 황토펜션(010-4199-9113)이 있다.
‘자연희 체험학교’ 운영하는 황정선씨 033-573-8696
재랑밭골 하류의 자그마한 마을 사곡리는 날로 인구가 줄어 결국 사곡분교장도 폐교되고 말았지만, 그 대신 근래 소박한 자연학교가 대신 문을 열었다. 이름하여 ‘자연희 체험학교’다.
명지대 가정학과를 나온 황정선씨(38)가 ‘교장’으로, 성악가 출신인 남편 한상현씨(43)와 더불어 운영하고 있는 이 체험학교는 물론 비상설의 소박한 체험교실일 뿐이지만, 한 달에 며칠이나마 외지인이 손님으로 드나들며 마을의 활기를 되살려주고 있다.
‘자연희’는 ‘자연’과 큰 딸 아이 이름 ‘희연’을 조합한 이름이다.
황 교장은 성인 여성을 대상으로 댓잎, 양파, 밤꽃, 쪽 등을 이용한 실크스카프 염색, 청소년들에게 숯, 감 등을 이용한 웰빙염색 등을 매달 정기적으로 가르치고, 남편 한씨는 솟대 제작 교실을 열기도 한다.
황 교장의 정성을 다한 천연 염색과 개량 한복은 멀리 산 바깥의 삼척시내까지 소문이 나서, 미처 주문에 대지 못하고 있을 정도다. 삼척시 평생교육원에서 장애인 대상으로도 염색을 가르치고 있다.
두 부부는 새천년이 시작되던 2000년, 한 세상 자연과 더불어 살겠다는 생각으로 이곳을 찾아들었다. 시작이 그러하기에 무농약으로 작물을 재배, 된장이나 고추장도 만들어 알음알이로 연결된 도시민들과 직거래하며 살아간다. 몸은 고달프지만 마음은 이 재랑밭골의 정적처럼 평안하다며 부부는 웃었다. 원덕읍 남쪽 월천 해수욕장에는 이들 부부가 운영하는 민박집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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