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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전라북도

정읍 입암면-대흥리 입암산 보천교

by 구석구석 2008.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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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8번지방도는 내장산 서북쪽방향을 지나는 길로 호남고속도로 내장산 나들목과 연결되며 노령-대흥리-입암산-신정동을 거쳐 정읍시내로 이어진다.

 

내장산은 풍수상으로 화체(火體)형국이라고 한다. 화생토(火生土)이니 입암산(笠岩山)이 토체(土體)형국이고, 토생금(土生金)이니 방장산(方丈山, 고창)이 금체(金體)형국이며, 금생수(金生水)이니 비룡산(飛龍山, 입암면)이 수체(水體)형국이다. 수생목(水生木)이니 국사봉(國師峯, 입암면)이 본체(木體)형국이고, 목생화(木生火)이니 내장산(內藏山, 내장면)이 화체(火體)형국으로 5행이 상생(相生)한다고 한다.

 

 그래서 일제시대 한 때 600만 신도를 자랑하는 보천교(普天敎)가 입암산 아래 대흥리에 자리잡았다고 전해진다. 보천교 본소내에는 십일전(十一殿)이라는 성전이 있었다. 십일전 내에는 성탑이 있었고 중앙에 입암산을, 왼편에 삼성봉을, 오른편에 방장산을 그리고 산 위에는 해, 달, 칠성을 그린 벽화와 도금한 십이층 원형탑과 구층정방형 탑과 칠층칠각탑의 삼위를 봉안하여 이것을 신앙대상으로 할 만큼 입암산은 신비스러운 산이었다.

입암산은 1935년 조선총독부관방문서과 촉탁(임시공무원) 무라야마지쥰(村山智順) 이 쓴『조선의 유사종교(類似宗敎)』944쪽에도 정읍(井邑)의 ''정(井)''자는 물의 근원 즉 만물을 생육하 는 것. 자료-정읍시청

 

입암면 대흥리 보천교본부

강일순(증산)은 4240년(1907) 금구면 거야 주막에서 우연히 차경석을 만나 입암면 대흥리로 오게 된다.
여기서 강증산은 차경석의 이종매(姨從妹)인 고씨 부인과 결혼하고 차경석에게 도를 전한 다음 4242년(1909) 전주로 이거했으나 4243년(1910) 나이 서른 아홉 살에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채로 세상을 뜨게 된다.

바로 이 해가 보천교의 창교기원일이다. 강증산이 김제군 금산면 동곡리(銅谷里/구릿골)에서 39세로 요절한 다음 당시 문하의 신도들이 각기 분파하여 수많은 교파를 낳게 되었다. 그 중 보천교(4242년/1909년 창교 당시는 보화교)는 한때 600만(혹자 700만) 신도를 자랑하는 종교로 성장했다.

차경석의 자는 윤홍(輪洪) 호는 월곡(月谷)이다. 4213년(1880) 동학접주 차치구(車致九. 본명 重弼)의 아들로 고창군 부안면 연기동(선운사 어구 동편)에서 출생하였고 강증산을 만나 도를 전수 받았다.

보천교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억압하에서도 기구를 조직하고 웅대한 교전을 축조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해체되었다. 차경석의 차남인 차문현씨에 의하면 보천교의 신자수가 늘면서 밖에다 지은 건물중 일부인 십일전은 현 조계사 건물로 원래는 안과 바깥쪽에 공포가 15개가 있었으나 각각 6개의 공포를 제거한 뒤에 복원하였다 하며 일제가 민족의식을 가진 보천교를 탄압하면서 건물을 장작으로 뜯어서 팔기도 했다 한다. 보화문은 북에 위치한 정문으로 현재 내장산 대웅전으로 복원되어 있다.

보천교는 한때 한국일보의 전신인 시대일보(사장 최남선)의 주식을 사들여 실질적인 주주역할을 하기도 했다.
당시 대흥리는 민가 10여호로 구성된 한촌이었으나 교세가 확장되면서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신자들로 일약 700여호를 헤아렸다 한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교세가 서서히 줄기 시작했다. 교리는 인의(仁義)이며 4대 강령이 경천(敬天) 명덕(明德) 정론(正論) 애인(愛人)이다. 상생(相生)이 주의이며 대동(大同)을 목적으로 한다. 자료-정읍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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