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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전라북도

순창 둔전리 훈몽재

by 구석구석 2023.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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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군 쌍치면 둔전2길 83 / 훈몽재 선비의 길

길은 추월산 자락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다. 길 아래로는 담양호가 아름답게 펼쳐진다.

담양호반을 따라가는 길은 언제가도 절경이다. 우뚝 솟은 추월산과 금성산성 사이에 담양호가 고즈넉하게 자리를 잡았다. 담양에서 담양호를 거쳐 순창군 쌍치면으로 넘어가는 29번 국도는 최고의 드라이브코스다.

순창군 복흥면과 쌍치면 일대에는 하서 김인후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훈몽재는 백방산을 등지고 자리를 잡았다. 앞으로는 추령천이라 불리는 하천이 유유히 흘러간다. 훈몽재 입구에 삼연정(三然亭)이 자리하고 있다.

오늘 우리는 김인후가 남긴 발자취를 찾아간다. 복흥면을 거쳐 쌍치면으로 가는 길도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산자락에는 농경지와 마을이 형성돼 소박한 농촌풍경을 이룬다.

‘훈몽재 선비의 길’은 훈몽재에서부터 시작된다. 훈몽재는 백방산을 등지고 자리를 잡았다. 앞으로는 추령천이라 불리는 하천이 유유히 흘러간다. 입구에 들어서자 삼연정(三然亭) 현판이 붙은 팔각정자가 맞이한다. 삼연정은 하서 김인후가 산(山), 수(水), 인(人) 등 세 자연을 노래한 ‘자연가’(自然歌)에서 명칭을 따왔다.

훈몽재(訓蒙齋), 양정관(養正館), 자연당(自然堂) 등 커다란 한옥 세 채가 추령천을 바라보며 나란히 앉아있다.

하서 김인후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성리학자다. 김인후는 1510년(중종 5) 전남 장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시문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김인후는 22살에 사마시에 합격한 뒤 성균관에서 아홉 살 연상인 퇴계 이황을 만나 함께 학문을 닦았다. 31살 별시 문과에 급제해 권지승문원부정자에 등용됐으며, 이듬해 홍문관저작이 됐다. 그리고 훗날 인종이 된 세자를 가르치는 세자시강원설서로 일했다.

인종이 갑자기 승하하자 고향인 장성으로 낙향한 하서 김인후는 1548년(명종 3) 봄 처가가 있는 전북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점암촌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곳에 초당을 세우고 편액을 훈몽(訓蒙)이라 걸고 후학을 양성했다. 현재의 훈몽재는 2009년 순창군에 의해 재건됐다.

옥과현감으로 있던 김인후는 자신이 가르쳤던 세자가 임금(인종)이 되자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그러나 인종은 임금이 된 1545년(인종 원년)에 갑자기 죽고 말았다. 인종 승하 후 명종이 즉위하자마자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김인후는 고향 장성으로 낙향해 성리학 연구와 후학양성에 전념했다.

을사사화는 윤원형을 비롯한 명종의 외척세력이 자신들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인종 측근들을 해친 사건이다. 명종은 김인후를 여러 차례 벼슬자리에 제수했으나 병을 이유로 사양했다.

장성에 머물던 선생은 1548년(명종 3) 봄 처가가 있는 전북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점암촌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곳에 초당을 세우고 편액을 훈몽(訓蒙)이라 걸고 후학을 양성했다. 제자로는 당대의 석학들인 변성온·기효간·조희문·양자징·정철 등이 있다.

현재의 훈몽재는 2009년 11월 중건된 건물이다. 훈몽재 앞 추령천변에는 30명 정도 앉을 수 있는 너럭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에는 송강 정철이 쓴 대학암(大學巖)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김인후는 이 바위에서 정철, 양자징, 조희문 등 여러 제자들에게 ‘대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훈몽재 앞 추령천변에는 30명 정도 앉을 수 있는 너럭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에는 송강 정철이 쓴 대학암(大學巖)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훈몽재 선비의 길’은 훈몽재를 출발해 추령천변을 따라 이어진다.

하서 김인후 선생은 물론 문하생들도 여가를 이용해 이 길을 걸었을 것이다. 470여 년 전 선비들이 걸었던 그 길을 걸으며 선비정신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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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쫓아 사람의 도리를 헌신짝처럼 버리기 일쑤인 현대인들에게 도(道)와 의(義)를 중시했던 선비정신의 복원이 절실하지 않을까 싶다.

‘훈몽재 선비의 길’은 훈몽재를 출발해 추령천변을 따라 이어진다. 하서 김인후 선생은 물론 문하생들도 여가를 이용해 이 길을 걸었을 것이다. 470여 년 전 선비들이 걸었던 그 길을 걸으며 선비정신을 생각한다.

길은 데크길로부터 시작된다. 데크길 아래로 추령천이 흘러간다. 하천은 숨죽여 흘러가고, 가을의 전령 풀벌레들은 목청을 돋운다. 길은 고요하고 평온하다. 데크길이 끝나는 지점에 2층으로 지어진 사과정(麝過亭)이란 정자가 우뚝 서서 길손을 맞이한다. 사과정은 하서 김인후의 ‘사과춘산초자향(麝過春山草自香)-사향노루가 봄 산을 지나니 풀이 절로 향기롭다’는 시 구절에서 따온 이름이다.

사과정에서부터는 황토를 다져놓은 황톳길이다. 이 구간은 맨발로 걸어도 좋을 듯 싶다. 황톳길을 걷다가 산책을 나온 현대판 선비 한 분을 만났다. 하얀 도포에 갓까지 쓰고 계신 선비는 훈몽재에서 한문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란다. 길에서 도포 입은 선비를 만나니 ‘훈몽재 선비의 길’의 의미가 되살아나는 것 같다.

훈몽재를 감싸고 있는 백방산 자락을 흘러가는 추령천의 모습이 유연하다.

길지 않은 황톳길을 지나 제방흙길로 접어든다. 제방길에는 이팝나무와 단풍나무가 양쪽으로 심어져 가로수를 이룬다. 훈몽재 선비의 길에도 가을이 무르익어가고 있다. 길가에는 호박도 누렇게 익었고, 밤송이도 곧 입을 벌릴 채비를 하고 있다. 대추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대추도 붉게 익어간다. 소박한 농촌마을은 높지 않은 산에 기대고, 마을 앞에는 산골치고는 좁지 않은 들판이 펼쳐진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농촌마을 풍경이다.

중리마을에 있는 가인 김병로 생가. 김병로 생가는 순창군에서 후손들의 고증을 거쳐 안채와 문간채를 2014년 5월 복원했다.

중리마을을 지나는데 가인 김병로 생가가 있다. 하서 김인후 선생의 15대손인 가인 김병로는 이곳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지냈으며,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법조인이자 정치가다.

가인 생가는 당초 안채, 사랑채, 문간채로 이뤄졌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됐다. 김병로 생가는 순창군에서 후손들의 고증을 거쳐 안채와 문간채를 2014년 5월 복원했다.


들판은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황금색 들판과 고개 숙인 벼들이 풍요로운 가을기운을 전해준다. 누렇게 익어가는 벼를 보면서 걷다보니 내 마음도 풍성해진다. 내 마음이 넉넉해져야 상대방에게도 너그러울 수 있다. 가을은 인간에게 풍요로운 마음을 갖게 해주는 계절이다.


들판이 끝나는 지점에서 작은 언덕이 앞을 가로막는다. 이 언덕 위에 낙덕정이 있다. 낙덕정이 있는 언덕은 추령천 옆에서 기암절벽을 이루는데, 이 바위를 낙덕암이라 한다. 낙덕암에 지어진 정자라 해서 낙덕정(樂德亭)이라 했다. 정자는 팔방이 위아래로 열고 닫을 수 있는 문으로 돼 있다. 정자 내부에는 1칸 방이 있고 바깥으로 마루가 깔려 있다.

하서 김인후는 훈몽재에 머무르던 시절 이곳 낙덕암에서 학생들과 학문을 논하고, 속세를 벗어나 시와 술을 벗 삼아 유유자적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김인후 선생의 발자취를 기념하기 위해 1900년 후손인 역사학자 김노수가 세운 낙덕정.

이 정자는 1900년 후손인 역사학자 김노수가 선조인 하서 김인후 선생의 발자취를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후손 가인 김병로도 유년시절 이 정자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낙덕정에 앉아 있으니 한 평생을 올곧게 살다간 김인후 선생의 영혼이 느껴지는 것 같다. <장갑수·여행작가>

※여행쪽지
▶‘훈몽재 선비의 길’은 조선중기 성리학자 하서 김인후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던 훈몽재에서 출발해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낙덕정까지 추령천을 따라 걷는 길이다.
▶코스 : 훈몽재→사과정→석보교→가인 김병로 생가→낙덕정
▶거리, 소요시간 : 6㎞, 2시간
▶출발지 내비게이션 주소 : 훈몽재(전북 순창군 쌍치면 둔전2길 83)

/ 출처 [장갑수와 함께 걷는 길]순창 훈몽재 선비의 길 - 광주매일신문 (kjdaily.com)

 

[장갑수와 함께 걷는 길]순창 훈몽재 선비의 길

길은 추월산 자락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다. 길 아래로는 담양호가 아름답게 펼쳐진다. 담양호반을 따라가는 길은 언제가도 절경이다. 우뚝 솟은 추월산과 금성산성 사이에 담양호가 고즈넉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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