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시 도산면 하계길 1-9 / 수졸당 010-6265-0264
경북 안동에 있는 수졸당에서는 여름철 유둣날(음력 6월 15일)이 되면 옛 전통을 따라, 건진국수로 조상들에게 제사를 올린다. 수백 년간 고집스럽게 전통을 이어온 퇴계 이황의 후손, 진성 이씨 수졸당 종가를 찾아 사라져가는 우리의 전통문화를 엿봤다.
잊혀져 가는 전통 명절, 유둣날
한국의 전통 세시풍속의 하나인 유두(流頭)는 동류수두목욕(東流水頭沐浴)의 약자로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고 목욕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동쪽이 양기가 왕성한 방향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음력 6월 보름날 동류에 머리를 감음으로써 액(厄)을 씻어 버리고, 준비해 간 음식을 나누며 화합과 소통을 도모했다.
유두는 원래 추석과 같이 전국적으로 행해지던 주요 명절 중 하나였다. 오늘날 유두는 사라져가는 명절 중 하나로 대부분 사람에게는 생소한 이름일 것이다. 하지만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무려 신라 때부터 이어져 온 유서 깊은 명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명종 15년 <고려사(高麗史)>에도 이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서는 고려 명종 때의 학자인 김극기의 문집을 인용하면서 유두가 경주의 오래된 풍속이라는 기록이 남아있기도 하다. 이 밖에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여러 문헌에서 유두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귀한 분이 오면 내어주던 안동 건진국수
하계마을에 있는 400년 된 고택, 수졸당에서는 매년 음력 6월 15일, 건진국수로 ‘유두차사(流頭茶祀)’란 이름의 제사를 지낸다. 지역에 따라 농사를 지은 햇곡식으로 만든 여러 가지 음식과 햇과일을 사당에 차려놓고 차례를 지내는데, 경북 지역에서는 주로 밀로 만든 음식으로 제를 올렸다. 그중 콩의 생산량이 많았던 산간 내륙지역인 안동에서는 밀과 콩가루를 활용한 음식이 발달했다. 특히 콩가루를 넣어 얇고 가늘게 만든 건진국수는 경북 지역 안동 문화권을 대표하는 향토 음식이 되었다.
“여름철 갓 수확한 밀과 햇과일로 조상님께 ‘이렇게 곡식을 거두었다’고 알리는 의미에서 국수를 만들어 제를 올리는 겁니다. 저희 수졸당에는 수백 년간 집안 종부의 손을 거쳐 내려온 건진국수의 조리 방식이 아직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반죽하는 방법부터 육수를 우려내는 법, 재료나 모양 등 대대로 전해져 온 전통방식 그대로 국수를 만들고 있지요.”
수졸당의 윤은숙 종부는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매년 제사를 올리기 위해 전통방식 그대로 건진국수를 만든다. 기본 재료부터 반죽, 음식을 담는 방식까지 작은 것 하나하나에도 정성을 다해 온 마음을 담아낸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분식’과는 결 자체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건진국수는 예부터 안동 지역의 양반가에서는 혼례나 생일, 또는 여름철 귀한 손님이 방문하면 내어주던 고급 음식이었다고 한다.
따뜻한 국물에 면을 말아주는 일반적인 안동국시와는 다르게, 건진 국수는 차가운 육수에 면이 자작하게 잠기도록 해서 내어주는 것이 특징이다. 육수를 우려내는 방법도 종가마다 다소 차이가 있으나,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낙동강에서 잡은 은어로 육수를 만든다고 한다. 혹은 소고기 양지머리나 꿩, 닭 등을 이용하기도 한다.
건진국수의 면발은 밀과 콩가루를 7 : 3 비율로 섞어 반죽한 뒤 매우 가늘게 칼로 썰어 내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하면 콩 특유의 구수한 맛이 살아난다.
콩가루가 들어간 만큼 면발의 탄력이 떨어지지만, 끊어질 듯 말 듯 한 부드러운 면발이 독특하면서도 매력적이다. 그렇게 썬 가는 면발에 다시 콩가루를 묻혀 끓은 물에 삶은 뒤 면을 건져 찬물에 헹군다.
여기에 소고기와 애호박, 계란 등 꾸미(경상도식 고명의 일종)와 참깨를 듬뿍 얹은 뒤, 면이 살짝만 잠기도록 자작하게 육수를 부으면 안동의 전통 국수인 건진국수가 완성된다. 사람에 따라선 국물이 약간은 밍밍할 수도 있지만, 굉장히 깔끔한 편이라 여름철 시원하게 먹기에 좋다. 흔히 평양냉면의 맛을 떠올리면 알 수 있다.
수백 년을 이어져 온 전통, 수졸당 ‘유두차사’
17세기에 지어져 지금껏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수졸당은 조선 시대의 성리학자인 퇴계 이황의 손자 동암 이영도(1559~1637) 후손들의 종갓집이다. 아직까지 고집스레 옛 전통을 꿋꿋하게 이어오고 있는 몇 안 되는 고택 중 하나로, 집의 이름은 이영도의 맏아들인 수졸당 이기(1591~1654)의 호에서 따왔다. 또는 이영도의 호를 따서 ‘동암종택’으로도 불린다. 사실, 수졸당과 동암종택은 엄연히 다른 건물이다. 하지만 수졸당이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면서, 편의상 두 건물을 함께 수졸당이라고 칭한다고. 고택 뒷산에는 퇴계 이황의 묘소가 있기도 하다.
이영도는 이황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을 정도로 총명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안동에서 의병을 모집해 왜군과 싸웠으며, 전쟁 중 군량미를 조달하기도 했다. 수졸당은 원래 현 위치에서 100m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안동댐 건설로 인해 1975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수졸당 오른편에는 후손들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재사(*제사를 지내기 위해 묘소나 사당 인근에 지은 건축물)가 있다.
비가 추적거리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수졸당에는 간만에 많은 사람이 모였다. 유두차사를 지내기 위한 문중의 어른들부터 그들의 자손, 그리고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전통 제사를 참관하기 위한 외부인들까지 방문하면서 모처럼 성대한 집안 행사가 되었다고. 수졸당에서는 지난해부터 유두차사를 일반 사람들에게 조금씩 공개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문중의 어른이 아니면, 남·여 불문하고 후손들조차 재사 안으로 발을 들일 수도 없었던 점을 고려하면, 외부인들이 재사 안쪽까지 들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 꽤 파격적인 행보다.
“가만히 뒤집어 생각해보니 전통이나 가풍 같은 것보다 더 중요한게 사람의 마음이고 정성이더라고요. 오랫동안 전통을 꿋꿋이 지켜왔다고 생각했지만, 어느새 관습만 남고 사람의 정이 사라지고 있는것 같아서 아쉬운 생각이 듭니다. 제사가 끝나고 다 같이 모여 열심히 준비한 음식을 나눠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전통을 나누는 것’, 이것이 바로 명절의 본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수졸당의 15대 종손 이재영 씨의 말이다. ‘전통을 고스란히 옛 모습으로 지키느냐, 세월이 바뀌었으니까 그에 맞춰 변화해야 하느냐?’의 갈림길에서 수졸당의 후손들은 ‘전통을 나누는 것’을 택했다. 더욱 많은 사람에게 전통을 알리고, 젊은 사람들이 이러한 전통 의식에 참여하고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그 토대를 마련해 주는 것도 지금의 어른들이 해야 할 몫이라는 판단에서다.
“수졸당은 대대로 전통을 지켜나가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요즘 세상에 어찌 형식만 가지고 되겠습니다. 되돌아보니, 형식에만 얽매이다가 어느새 본질이 흐려지는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는 집안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 또한 수백년을 이어온 전통을 이어가는 방법이지 않을까요? 가문의 전통을 넘어, 사라져가는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지켜나가는 데에도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사가 끝난 뒤 문중의 한 어른과 나눈 대화는 많은 생각이 들게 했다.
국수 한 그릇에 담긴 마음은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그렇게 다가왔다.
출처 : 여행스케치(http://www.ktsketch.co.kr)
400년 된 숙소에서의 하룻밤 수졸당 고택 체험
수졸당에서는 400년 전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고택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숙박 체험을 운영 중이다. 건물은 낡고 불편하지만, 그 속에 숨어있는 400년의 숨결을 오롯이 느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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