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과 예천 경계를 이루는 학가산은 ‘신선이 학을 타고 노니는 산세’, ‘소백산에서 날아온 학을 사람이 타고 노니는 형국’, ‘수레를 타고 날아가는 학과 같다’, ‘학이 날개를 활짝 펼친 모습’ 등등 이 산을 두고 옛 선인들은 나름대로 보는 방향에 따라 각기 다른 느낌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학가산을 가운데 두고 예전에는 지방마다 부르는 이름도 달랐다 한다. 안동에서는 울퉁불퉁 보인다고 문둥이봉, 영주에서는 부드럽고 평평하게 보인다고 선비봉, 예천에서는 산세가 수려하게 보인다고 해서 인물봉이라 불렀다 한다.
학가산에는 삼봉과 삼대가 있다. 삼봉은 학가산 정상으로 치는 국사봉, 국사봉 동쪽의 유선봉과 삼모봉을 이른다. 삼대는 삼모봉 동쪽 능선에 있는 학서대와 난가대, 그리고 지형도 상의 정상인 872m봉 북릉 초입에 있는 어풍대를 일컫는다. 이 이름들은 안동지역에서 평생 벼슬길을 거부하고 학가산을 벗 삼아 살았다는 송암 권호문(權好文·1532-1587) 선생이 지은 것이라 전해진다.
학가산에는 8방에 9암자가 있었다는 설도 전해진다. 이를 뒷받침 하듯 광흥사, 애련사, 석탑사 등이 현존하며, 산자락 곳곳에는 ‘절터’로 지목되는 곳이 사방에 널려 있다.
학가산은 겉으로 보기에는 육산으로 보인다. 그러나 산속으로 파고들면 바위지대인 삼봉삼대를 비롯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상사바위, 신선바위, 형제바위 등 기암과 절벽들이 산행의 즐거움을 배가시켜 준다. 또한 산중에는 특히 바위들과 어우러진 소나무가 많아 산의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것도 특징이다. 여기에다 산을 중심으로 사방에 자리한 옛 성터들이 옛날 이곳이 전략요충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흠이라면 동릉 일원을 점거한 통신매체들의 송신소 건물들과 송신철탑들 정도다. 산 북동쪽에는 송신소와 연결되는 도로가 나 있지만, 이 도로는 산 남서쪽에 개설된 임도와 함께 산악자전거 코스로도 활용되고 있다.
학가산은 정상이 두 곳이다. 국토지리정보원 발행 지형도 상에는 예천과 안동 경계선 상에 있으면서 예천 방면에서만 보이는 872m봉이 정상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봉우리를 예천에서는 일명 ‘예천 정상’이라 부른다. 그러나 최근에 나온 국토지리정보원 발행 1대5,000 지형도에는 안동 방면에서만 보이기 때문에 ‘안동 정상’으로 불려온 국사봉이 예천 정상보다 약 2m 더 높은 874m로 되어 있다. 따라서 국사봉을 학가산 정상으로 보면 된다.
아무튼 예천 정상인 872m봉과 안동 정상인 874m봉인 국사봉 두 곳에는 각각 정상비석이 세워져 있다. 두 비석에는 모두 정상 높이를 똑같이 ‘882m’로 새겨놓았다.
/월간산 466호 2008.8
학가산 산자락 사방 8~9부 능선에는 산성터가 3~4곳 있다. 석축 규모가 가장 옛 모습대로 남아 있는 곳은 814m봉 남동쪽 바위지대다. 이곳은 일명 ‘천주마을 뒷산성터’라고 부르는 동학가산성이다. 이외에 예천 정상 남서릉(상사바위 능선)의 서학가산성과 872m봉 북릉, 그리고 삼모봉 북서릉에 성곽 일부가 남아 있다.
안동의 옛 기록서인 영가지에 의하면 ‘학가산에는 두 개의 산성이 있다’라는 기록이 전해진다. 두 산성이란 학가산 8~9부 능선 상의 성과 당재 서쪽 분지인 산성리 일원을 일컫는다. 이 산성은 누가, 언제, 무엇을 위하여 쌓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고려 말 공민왕의 안동 몽진과 관계가 있다는 설뿐이다. 이 성은 최대한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옛 석성이지만, 흙과 돌을 함께 사용한 부분도 있다.
성곽 상·하단부에는 무수한 기와조각과 옹기 파편들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에는 기와지붕을 한 건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성터에서 북동쪽 신전리에도 성문터가 있었다는 말은 있으나 확인되지 않고 있다.
/ 월간산 466호 2008.8
북절골~삼모봉 북서릉~삼모봉~유선봉~국사봉
예전에는 신전2리 북절골(마을)에서 문박골(계곡)을 타고 711.2m봉 안부에 오른 다음 정상으로 오르는 코스(월간山 92년 6월호에 소개)가 있었다. 그런데 문박골 진입로 일원에 사과과수원이 넓게 자리 잡으면서 등산로가 폐쇄됐다. 그래서 요즘은 과수원을 비껴가는 길이 이용되는데, 땀 흘려 지은 과수농사를 망치지 않도록 등산인들은 유의해야 할 것이다.
신전2리 북절골 입구 삼거리에서 오르막 농로를 따라 12분 가량 올라가면 느티나무 거목과 경로당이 나오고, 경로당 오른쪽 농로를 따라 노송지대를 지나면 10여 호 농가들이 있는 북절골 마을로 들어선다. 마을길을 빠져나와 과수원길을 4~5분 오르면 마지막 전봇대에 닿고, 약 100m 더 오르면 삼거리가 나온다. 과수원 안으로 난 길은 711.2m봉 방면 문박골로 이어지지만, 지금은 폐쇄됐다.
삼거리에서 왼쪽 길로 2~3분 오르면 콘크리트포장 길이 끝나고, 왼쪽 숲속으로 난 계곡길로 3~4분 들어가면 T자형 삼거리에 닿는다. 오른쪽 길로 들어서서 ㅏ자형 삼거리가 나오면 오른쪽으로 30m 올라 묘 3기가 있는 삼모봉 북서릉으로 들어선다.
20분 오르면 쌍묘가 나오고, 곧 나타나는 노송군락을 지나 10분 거리 경주김씨 묘, 그리고 10분 거리 의성김씨 묘를 지나 7~8분 더 오르면 철쭉 군락 아래 바윗길로 들어선다. 오를 수록 물푸레나무와 상수리나무 숲으로 변하는 능선길로 5~6분 오르면 폭 20m에 높이 15m 가량 되는 경사진 바위에 닿는다.
산길은 경사진 바위 가운데로 작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틈바구니로 이어진다. 바위를 다 오르면 다시 숲길이다. 5분 가량 오르면 석축 일부가 남아 있는 성터에 닿는다. 산 남쪽 동학가산성과 비슷한 규모로 석축들이 남아 있다.
성터를 뒤로하고 3분 거리 묘 2기를 지나면 기와조각과 토기조각들이 흩어져 있는 토성 흔적 위로 들어선다. 거의 일직선으로 북쪽 사면으로 이어지는 토성 사면 길로 5분 오르면 삼모봉 북릉과 만나는 사거리에 닿는다. 직진하면 송신소 방면이다.
오른쪽 뚜렷한 능선길로 6분 오르면 삼거리에 닿고, 삼거리에서 왼쪽 20m 위 능선 위가 문수지맥과 만나는 삼모봉이다. 삼모는 긴 창끝 같은 바위가 세 개라는 뜻이다. 과연 삼모봉 꼭대기에는 창 같은 뾰족한 바위 세 개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거북바위를 지나 바위 꼭대기에 오르면 올라온 방면인 북절골 일원이 샅샅이 조망된다.
삼모봉에서 다시 삼거리로 내려와 문수지맥 길로 약 30m 가면 유선봉 아래 안부에 닿는다. 왼쪽 내리막길은 신전골과 신선바위 방면이다. 안부에서 5m 밧줄이 걸린 벽을 오르면 유선봉 꼭대기를 오른다. 유선봉 꼭대기는 분재와 같은 노송들이 기암과 어우러져 한 폭 그림 속에 갇힌 기분이다.
유선봉 오른쪽 우회길로 30m 가면 유선봉 꼭대기에서 내려오는 길과 만나고, 이어 약 2분 더 가면 국사봉 아래(←삼모봉 0.3km, 당재 2.5km→ 푯말)에 닿는다. 이곳에서 왼쪽 길로 10m 오른 곳에서 10m 철계단을 오르면 국사봉 정상이다.
신전2리 북절골 버스정류소를 출발하여 경로당~북절골 마을~과수원 길 끝머리~삼모봉 북서릉~삼모봉~유선봉을 경유해 정상으로 향하는 산행거리는 약 3km로, 2시간30분 안팎이 소요된다.
/ 월간산 466호
북절골~삼모봉 북동릉~삼모봉~국사봉
삼모봉 북서릉으로 오르는 과수원 길로 올라가면 마지막 전신주가 있다. 이 전신주 전에 애자 달린 와이어 버팀줄이 있는 전신주가 있다. 이 전신주 왼쪽 계류를 건너 20m 거리 큰 호두나무를 지나 10m 더 가면 오른쪽 사과나무 과수원 왼쪽 끝머리에 닿는다. 이곳 왼쪽 숲속 사면길이 삼모봉 북동릉으로 가는 길이다.
묘 2기를 지나 7~8분 오르면 삼모봉 북동릉(큰 묘 1기)으로 이어진다. 이후 6~7분 오르면 버섯채취움막(작은 비닐집)에 닿고, 15분 가면 묵묘가 있는 안부에로 들어선다. 이어 가파른 능선길을 20분 가량 오르면 길 오른쪽 20m 전방으로 널찍한 집터가 보인다. 집터 샘터 뒤에는 길이 20m에 폭 10m 가량 되는 큰 바위 두 개가 겹쳐 보인다. 이 두 바위 사이에 석굴이 있다.
석굴에서 다시 능선으로 나와 50m 전방의 천정바위를 지나 10분 오르면 30m 슬랩바위 아래에 닿는다. 바위 오른쪽 가파른 길로 올라 삼모봉 동릉 상의 송신탑을 보며 철쭉 군락 사이로 15분 가량 오르면 북서릉과 만나는 사거리에 닿는다. 이후 삼모봉에 오른 다음 국사봉으로 향한다.
신전2리 북절골 정류소를 출발하여 경로당~북절골 마을~과수원길~마지막 전신주 전 전신주~삼모봉 북동릉을 경유해 국사봉에 오르는 산행거리는 약 3km로, 2시간30분 안팎이 소요된다.
/ 월간산 466호
신전골~난가대~삼모봉~국사봉
신전1리 보건진료소 앞 버스 회차장에서 서쪽 50m에 있는 삼거리(←국사봉, ↓옹천, 석탑사→ 푯말)에서 축사를 지나는 과수원 길로 4~5분 들어가면 사과창고 삼거리에 닿는다. 여기서 직진, 과수원길을 따라 6~7분 올라가면 과수원 출입구 삼거리(등산로→·스테인리스스틸 푯말)다. 삼거리에서 오른쪽 오르막을 따라 8~9분 오르면 컨테이너박스에 닿는다. 이곳에서 왼쪽 길로 10분 가량 오르면 학가산송신소로 이어지는 도로와 만나는 문수지맥 위 삼거리(↓메밀단지 푯말)인 무시골재에 닿는다.
등산로는 무시골재에서 오른쪽 문수지맥 정수리로 이어지는 도로와 겹친다. 도로를 따라 7~8분 오르면 제1주차장(정상 1.5km→ 푯말)이 나오고, 50m 더 가면 도로는 문수지맥을 벗어나 오른쪽 사면으로 이어진다. 10분 거리인 제2주차장을 지나 15분 더 오르면 능선 위에 자리한 제3주차장에 닿는다. 50m 거리인 제4주차장을 지나면 남쪽으로 꺾여 정면으로 삼모봉 동릉을 차지한 송신탑들이 마주 보인다.
7~8분 오르면 한국통신 안내석 삼거리(←난가대, 국사봉→ 푯말)에 이른다. 왼쪽 도로로 7~8분 가면 문수지맥 상에 산불감시초소가 있고, 오른쪽에 노송 한 그루와 버스보다 큰 돌출된 바위가 있다. 이 바위가 난가대(爛柯臺)다. ‘난가’는 바둑이나 음악 등에 심취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는 뜻이다. 직역하면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어떤 취미에 깊이 빠져든다는 뜻이다.
난가대에 오르면 북서로 소백산과 영주시가 보이고, 북동으로는 백두대간 옥돌봉으로 이어지는 문수지맥이 태백산과 함께 펼쳐진다. 남동으로는 안동시가 막힘없이 조망된다. 남쪽 아래로는 천주 마을과 복지봉이 내려다보인다. 난가대 서쪽 공터에는 사각정자가 있다. 정자에서 문수지맥 위로 난 길은 70m 거리에서 끝난다. 따라서 다시 한국통신 안내석 삼거리로 되돌아나와야 한다.
한국통신 안내석에서 도로를 따라 3~4분 가면 삼거리(←학서대 푯말)다. 삼거리에서 왼쪽 오르막으로 2분 거리에 이르면 학서대(鶴棲臺)가 있다. 높이 20m에 폭 15m 가량 되는 암봉으로, 벽 대부분이 짙푸른 돌단풍으로 뒤덮여 있다. 분재와 같은 노송들이 자라는 바위 꼭대기가 학들이 살았다는 곳이다. 바위 왼쪽은 안동KBS 송신소 출입문이 굳게 닫혀 있다. 바위 접근은 불가능하고 밑에서 구경만 하고 되돌아나와야 한다.
다시 삼거리로 나와 직진하는 길을 따르면 바위벽 아래 샘터(식수로 불가능)가 있다. 이어 4분 가면 길은 왼쪽으로 굽돌아 오른다. 이 길로 40m 오르면 T자형 삼거리다. 삼거리에서 오른쪽(서쪽) 길은 안동MBC 송신소 방면이다. 이 방면 길은 송신소 정문 앞을 지나 삼모봉 북릉과 연결된다.
T자형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50m 오르면 전신주 삼거리다. 직진하면 학서대 서쪽 안동KBS 송신소 방면이다. 안동KBS 송신소 자리는 지형도 상의 814m봉이다. 전신주 앞에서 오른쪽 철도침목 계단길로 20m 오르면 814m봉 서쪽 아래 사거리 안부(←신선바위 1.4km, ↓난가대·학서대 0.8km, 국사봉 0.5km→ 푯말)에 닿는다. 안부에서 남쪽 계곡 방면은 애련사와 당재로 이어진다.
안부에서 오른쪽 문수지맥을 타면 곧이어 안동MBC 송신소 펜스 왼쪽으로 들어선다. 이어 송신소 남쪽 사면 길로 2분 오르면 바위에 설치된 밧줄 난간을 지나 3m 철계단을 올라 유선봉과 삼모봉 사이 바위 안부로 들어선다. 삼모봉은 오른쪽으로 1분 거리. 왼쪽 유선봉을 넘거나 안부를 넘어간 우회 길을 따라 국사봉으로 향한다.
신전1리 보건진료소를 출발하여 신전골~무시골재~한국통신 안내석 갈림길에서 난가대를 다녀 온 후~학서대~KBS 송신소와 MBC 송신소 사이 사거리~유선봉과 삼모봉 사이 안부를 경유해 국사봉에 오르는 산행거리는 약 5.5km로, 2시간30분 안팎이 소요된다.
불교문화가 융성할 때에는 안동에는 150여 개의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 가장 많은 절집이 깃든 곳이 학가산이다. 그리고 광흥사는 그 산의 중심에 있는 절이다. 이 절집이 깃든 곳은 산의 남쪽으로 주위의 지형이 학의 머리와 날개 모양인데 학이 공중으로 솟아오르려는 순간처럼 날개를 펴고 있는 모양에 해당하므로 ‘넓게 일어난다’는 뜻에서 '광흥사'란 이름을 얻었다.
광흥사는 의상이 치악산 구룡사를 세운 직후인 669년(문무왕 9)에 창건한 절이다. 그 뒤 수차례 중수·중창하여 대찰이 되었으나 종교 탄압과 관리 소홀로 일제 말기에는 거의 폐사 상태에 이르렀다. 게다가 이 절집에는 무려 세 번에 걸쳐 화마가 스쳐갔다. 1946년의 큰불로는 대웅전이, 1954년과 1962년에도 화재로 극락전·학서루 등이 무너졌다. 지금 남은 전각은 응진전 등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새로 세운 것이다.
광흥사를 찾는 이를 맨 먼저 반기는 건 길 옆에 외따로 선 일주문과 그 주변의 400살도 더 먹은 은행나무다. 이 나무는 500살 가까이 될 것으로 추정되는 길안면 용계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175호)와 견줄 만하다. 은행나무는 가끔 부는 바람에 점점이 노랗게 익은 잎을 날리고 있었다.
절집은 초라하다. 불사로 새로 세운 대웅전이 날아갈 듯, 방문객을 맞지만 주변의 조경도 보잘것없고 세심한 관리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것도 그렇다. 주변엔 풀만이 무성하다. 대웅전을 지나 응진전으로 드는 길목 오른쪽에 이태 전에는 빨갛게 감을 매달고 서 있던 감나무는 고사한 듯 가지만이 앙상하다. 그 아래 패인 도랑 너머로는 명부전이 건너다보인다.
대중들이 얼마나 드는 도량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해질녘의 절집 풍경은 쓸쓸했다. 유일하게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응진전 앞뜰에 안내판 하나 없이 서 있는 조그만 돌 구조물 하나, 1993년 세웠다는 진신사리를 봉안한 삼층석탑이 장난감처럼 보인다. 뜰에 듬성듬성 난 잡풀들과 함께 고인 것은 적요다. 저녁 공양 시간인가, 잿빛 승복을 입은 중년의 보살 한 분이 밥상을 들고 뜰을 지나갔다.
광흥사 응진전은 1647년(인조 25)에 지은 당우로 통일신라 이래 전승되어 온 나한신앙의 기도 도량으로 유명하다. 나한은 아라한(阿羅漢)의 준말로 인간과 천인들의 소원을 속히 성취시켜 준다 하여 일찍이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주로 16나한과 5백 나한이 신앙되었으며 이들 나한을 모셔놓은 당우를 나한전이라고 한다.
나한전 중 16 나한상을 모신 당우를 응진전(應眞殿)이라 하는데 응진은 ‘진리에 상응하는 이’라는 뜻이다. 나한에 대한 의례를 행하는 불교의식이 나한재(羅漢齋)인데 이는 왕실과 민간에서 행해졌다. 대승불교의 전통이 강한 우리나라에서는 나한을 ‘소승의 성자’라 하여 폄하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민간에서는 나한에 대한 믿음이 크게 성행하였다.
광흥사에 남아 있던 고려시대 불경인 <취지금니묘법연화경>(청색 종이에 금색 글씨로 쓴 법화경, 보물 제314호)과 <백지묵서묘법연화경>(하얀 닥종이에 먹으로 쓴 법화경, 보물 제315호) 등 중요 문화재들은 국립 경주박물관으로 옮겨갔다.
이처럼 쇠락한 절집 광흥사가 한 해 전부터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이 절에서 현존하는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1378)>보다 발간 연대가 앞서는 고려시대 금속활자본이 나왔다는 주장 때문이다. <한겨레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이 곡절의 연원은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9년 9월 광흥사 경내에 강도가 들어 응진전에 봉안한 석가삼존불상, 아난·가섭존자상, 16나한 중 14위 등 모두 39위가 완전 파손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이때 이 문화재털이범들이 토불을 깬 뒤 복장유물을 털었는데 여기에서 나온 불경이 직지심체요절보다 50년이나 앞서는 금속활자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치권과 불교계가 비상한 관심 속에 이 책의 행방을 추적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는 금속활자의 역사를 새로 쓰는 세계적인 발견이기 때문이다. 직지심체요절은 1377년(고려 우왕3년) 청주의 흥덕사에서 간행한 금속 활자본인데 내용은 백운화상이 역대 불조선사들의 주요 말씀을 초록한 것이다. 이는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1450)보다 73년이 앞서는 세계적인 유물로, 상하 두 권 가운데 지금 전하는 것은 하권 1책뿐이다. 이 책은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으며 2001년에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됐다.
광흥사가 내 흥미를 끄는 점은 이 절집에서 여러 경전들이 간행되었다는 점이다. 1999년에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된 <불설대부모은중경>은 1562년(명종 17) 이 절집에서 다른 경전과 함께 간행한 것이다.
주로 산에 세워졌던 사찰은 판각용 목재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등 목판 인쇄술 발달에 필요한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고려의 인쇄술도 초기에는 주로 사찰들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 조선 중후기에는 대중들의 요구에 따라 지방사찰에서 경전을 간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당시의 신앙 양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불경 외에도 고승들의 사상과 시를 담은 문집도 많았다.
불교 출판은 매우 장려되어 상업 목적의 출판이 아니었을 뿐, 유행이라고 할만큼의 다양한 책이 간행되었다. 광흥사에서 경전이 간행되었다는 것은 이 절집이 안동 지방에서는 대중의 요구에 부응할 만한 대찰이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한편, 광흥사는 광해군 5년(1613) 11명의 안동부 선비들이 모여 가진 계 모임을 기념한 그림, 임계계회도의 무대이기도 하다. 모임의 이름이 '임계계회'인 것은 임자(1560년)년과 계축(1561년)년에 태어난 사람들이 모여서이다. 이 계회는 무려 400여 년, 13대에 걸쳐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 모임은 한 후손이 KBS-TV의 <진품명품>이란 프로그램에 이 그림의 가치 감정을 의뢰함으로써 일반에 알려졌다. ‘계’는 ‘타자와의 조화로운 삶을 중시하고 교유를 통한 인격의 성숙을 꾀한 선인들이 참여한 갖가지 사회적 모임을 아우를 수 있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신분사회의 질곡을 온몸으로 감당하며 살아온 이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은 400여 년 연면히 이어져 온 ‘우월 계급의 성찬’이나 강고한 ‘기득권의 연대’로 여겨질 수도 있지 않을까. 더구나 계회에 참여한 10개 문중(안동 권씨, 영해 박씨, 경주 최씨, 일직 손씨, 진주 하씨, 예안 이씨, 순흥 안씨, 순천 김씨, 한양 조씨, 김해 허씨)이 내로라하는 지역 명문가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말이다.
절집 오른편 언덕, 학가산 등성이에 자리한 애련사로 가는 고갯길 어귀에서 석양의 절집 풍경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해우소 뒤편으로 난 산길은 우리 지역의 지인들이 즐겨 찾는 길이다.
해마다 가을이면 우리는 광흥사를 한 바퀴 돌아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 천주마을을 거쳐 애련사로 오르곤 했다. 발밑에 깔려 바스락대는 낙엽 소리가 가끔 침묵 속의 정적을 더해주는 그 산길이 주는 기억은 애틋하다.
애련사. 절 위 봉우리는 814m봉 남서릉
애련사(愛蓮寺)는 조선조 때 세조가 다녀간 적이 있다는 설이 있을 뿐이다. 정확한 창건연대와 창건자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절이름은 선암사, 애련사, 예련사 등으로 불리었고, 고승 학조대사(등곡)가 이곳에서 득도하여 애련암으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다는 설은 전해진다.
학조대사는 세조의 명에 따라 해인사 대장경 50벌을 인경하였고, 판전 40간을 다시 지어 오늘날 해인사를 있게 한 학승으로, 말년에 이곳에 다시 돌아와 입적하였다 한다. 학조등곡화상 부도탑은 속리산 법주사 복천암에 있다.
애련사는 신라시대부터 학가산 일원에 위치한 8방9암자 중 한 곳으로 보고 있다. 풍산읍 소산 마을 출신으로 병자호란 때 척화파의 거두였던 청음 김상헌 선생이 1641년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기 직전 4년 동안 이곳에서 은둔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조계종 직할사찰로, 극락전과 요사채 두 칸이 전부지만, 새벽 동틀 무렵 안동시 위로 떠오르는 일출 풍광이 일품인 곳이다.
석탑사~북릉~예천 정상~국사봉
석탑리 방단형 석탑 왼쪽에 느티나무 거목이 있다. 느티나무 오른쪽 길은 석탑사로 가는 길이다. 이 길 10m 거리에 있는 군청색 푯말(등산로) 아래 계곡을 건너면 지계곡으로 들어서는 농로가 있다. 농로를 따라 35분 올라가면 414m봉 서쪽 안부에 닿는다.
872m봉(예천 정상)에서 뻗어내려온 이 능선은 안동군 북후면 산성리와 예천군 보문면 우래리 경계를 이룬다. 왼쪽 능선길로 8~9분 오르면 414m봉이다. 여기서 산길은 오른쪽으로 꺾여 346m봉~434.8m봉~575m봉을 약 2시간 거리에 이르면 708m봉 삼거리에 닿는다. 왼쪽(동쪽) 갈림길은 석탑리 감나무골 방면이다.
708m봉에서 2~3분 내려서면 사거리 안부로, 오른쪽(자연휴양림쪽) 작은몽은골 방면 길은 계속 이어지지만, 왼쪽(동쪽)의 흐릿한 문박골~북절골 방면 길은 중간에서 길흔적이 사라진다.
10분 가량 더 오르면 정면으로 학가산 정상부가 마주보이는 711.2m봉(삼각점 안동 311)에 닿고, 5~6분 거리에서 묵묘를 지나면서부터 능선은 가팔라지다가 15분 더 오르면 옛 성터가 나타난다. 성터 주변에는 기와조각들이 흩어져 있다.
성터에서 4~5분 더 오르면 길 오른쪽에 어풍대 반석바위에 닿는다. 학가산 삼대 중 한 곳으로, 바람을 거느린다는 뜻을 가진 이 대는 안동팔경 제5경 학가귀운에 ‘몰려오는 바람과 구름을 맞이한다’는 기록으로도 전해진다. 과연 어풍대에 오르면 북서쪽 아래로 조망되는 몽은골에서 불어닥치는 골바람으로 온 몸을 적신 땀줄기가 금방 잦아든다. 방금 올라온 석탑사 방면 긴 능선도 시원하게 조망된다.
어풍대에서 3~4분 오르면 예천 정상(872m봉)에 닿는다. 오른쪽(남서쪽)의 뚜렷한 능선길은 상사바위 방면이다. 직진해 3~4분 가면 산림청 무선중계시설물(컨테이너 박스)이 있고, 30m 내려서면 당재 갈림길 안부(↑국사봉, ↓상사바위, 당재→ 푯말)에 닿는다.
오른쪽 밧줄이 걸린 암릉길이나 밧줄 왼쪽 우회길로 4~5분 가면 두 길은 다시 만나고, 1분 더 가면 안부 삼거리(↓당재, 능인굴 · 애련암→ 푯말)로 들어선다. 삼거리에서 직진해 약 30m 가면 또 나오는 삼거리(↓당재 2.5km, 삼모봉 0.3km↑ 푯말)에서 오른쪽 바윗길로 10m 오른 다음, 10m 높이 철계단을 오르면 국사봉 정상이다.
국사봉
옛 선인들은 국사봉을 ‘날아가는 학의 머리’ 또는 ‘학 위에 올라탄 신선’으로 보았다 한다. 국사봉은 학가산의 7개 봉 중 해발 874m로 최고봉이다. 동쪽 학가산성, 서쪽 학가산성, 북쪽 학가산성 중앙에 위치하여 장군의 지휘장소였다는 설도 있다.
정상의 우묵 패인 바위는 난공불락의 자연보채 역할을 하였으며, 나라(임금)에 제사를 올렸던 곳이라 한다. 영가지 산천조에는 국사봉의 아름다운 조망에 대한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이곳에서 북으로 영주, 동으로 안동, 남으로 낙동강, 서쪽으로 예천 등이 보인다는 내용이다.
국사봉 남서쪽 30m 절벽 아래에 있는 천연동굴 능인굴은 신라시대 능인대사가 수행하던 불교성지로도 알려져 있다. 학가산 사랑이 지극하였던 송암 권호문 선생은 이 봉우리를 별에 닿는다는 뜻인 적성봉이라 고쳐 부르기도 했다.
예전에는 국사봉에 오르려면 아찔한 바위벽을 위험천만하게 세미클라이밍으로 올랐었지만 2005년 경북도민 체전 때 성화채화지가 되면서 철계단이 놓여 안전하게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석탑사를 출발하여 북릉~708m봉~산성터~어풍대~예천 정상~당재 갈림길~애련암 갈림길을 경유해 국사봉 정상에 오르는 산행거리는 약 6.5km로, 4시간30분 안팎이 소요된다.
/ 월간산 466호 2008.8
북후면 석탑리 534번지 석탑사 054-859-5472
석탑사는 학가산 북쪽 기슭 평지에 자리잡고 있다. 학가산 북쪽 연화봉 아래에 석탑사가 자리하고 있는데, 연꽃모양으로 생긴 봉우리가 절을 감싸고 있다. 이곳으로부터 북쪽으로 200리 떨어진 곳에 부석사의 승려들이 돌을 들고와 탑을 쌓았다는 석탑이 있기도 하다. 안동에서 영주로 가다보면 면소재지인 옹천(瓮泉)은 북서쪽에 병풍같이 두른 높은 산으로 둘러쌓여 있는데, 마을 모습이 마치 단지와 같고, 마을에 물맛이 좋기로 유명한 샘이 있다하여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여기서 지방도로 영주시 장수면 조제리로 가는 길이 있다.
이 길은 북후면 두산리, 월천리, 신전리, 석탑리를 이어주며 갈미봉과 조운산, 학가산을 휘감아 돌아서 자연경관이 빼어나다. 석탑사는 웅천으로부터 10여km 떨어져 있는 자연부락 구억들의 평지에 자리하고 있는데, 절 입구로 들어가면 자연석탑이 보이고 오랜된 고목가 서 있다. 석탑사 옆으로는 학가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차고 깨끗한 물이 항상 흐르는 계곡이 있다. 학이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는 모습을 닮은 안동의 명산 학가산(鶴駕山) 북쪽 기슭 연화봉(蓮花峰) 아래에 둥지를 틀고 있는 석탑사(石塔寺).
북후면 석탑리1032 영봉사 054-855-1755
영봉사는 경북 봉화군에서 발원하는 내성천을 경계로 하여 영주시 문수면 조제리와 예천군 보문면 우래동, 그리고 안동시 북후면 석탑리의 세 끝이 만나는 지점인 학가산 북쪽 문필봉에 위치해 있다. 학가산은 해발 882m로 그다지 높은 산은 아니지만 예천군 보문면과 안동시 북후면의 접경 지역 깊숙한 곳에 위치한 덕에 아직까지도 사람들의 발길이 드문 편이라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청정지역이다.
학가산 북쪽 기슭자리에 터를 잡은 영봉사는 큰길에서도 골짜기로 들어가 다시 산길로 올라가야 하는데, 거의 영주시 문수면 경계까지 간 다음, 고개 정상쯤에서 왼쪽으로 난 작은 도로로 들어가야 한다. 영봉사(永鳳寺)는 학의 모양을 하고 있는 학가산(鶴駕山) 북쪽 기슭 문필봉에 자리한 절이다. 이곳은 학의 날개 부분에 해당하는 자리로 학가산 깊은 골짜기 속에 들어 앉아 있어 청정하기 그지없다. 첩첩산중이라 보통의 불심으로는 찾기 힘든 이곳에 부처님의 집을 짓고 불공을 올리며 수도정진 하려는 도반(道伴)들의 인연은 어느 절집의 도반들보다 소중했을 것이다.
도를 닦아 깨달음을 얻기까지, 또는 깨달음의 경지에 들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가꿔가는 삶이 결코 혼자서 만들어가기 보다 가까운 친구의 힘도 필요함을 알게 해 준다. 첩첩산중에 다닥다닥 붙어 지은 절집은 6.25사변 때 공비 토벌로 질러 버린 화염에 타 들어 가던 천년의 전설을 법당과 불상들이 그 아픔을 토해 내고 사그라져 더욱 안타깝다. 그 틈새로 새로움을 피우려 기와불사에 쓰일 기와에 담긴 이름들이 원(願)을 꽃 피운다. 발걸음을 옮겨 축대위에 올라서면 곧 천길 아래고, 쳐다보면 빼곡하게 들어 찬 숲 틈에 하늘이라 길도 멀고 험하여 포시라운 이는 가까이 오기 꺼려지는 이곳에 드문드문 동네 늙은 할머니들이 드리는 치성(致誠)이 더욱 반갑다.
옛날 살아서 지금의 학가산(鶴駕山) 영봉사(詠鳳寺)가 자리한 곳으로 날아와 처음 안착했다는 의상대사가 만든 종이학도 이곳이 타락한 인간의 욕망을 씻을만한 원(願)을 세울 수 있다 믿었을까. 울력으로 불공을 드리는 스님들의 모습을 뒤로하고 내려오는 길은 타락한 몸뚱아리에서 그나마 빠져나간 욕심으로 발길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해준다. 아직 버리지 못한 욕심에 온갖 원(願)으로 쌓여진 천근만근인 마음이 볼품없는 한 점의 먼지 같은 어리석음으로 남으니 전설의 학들이 보기에 측은하기는 매 한가지다. 영봉사(永鳳寺)에 처음 내려앉은 의상대사가 날린 그 종이학이 다시 살아 전설의 이야기를 만들어 부처님의 땅에 또다시 광명의 빛이 비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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