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시 문수면 무섬로 238-2 / 무섬마을 054-636-4700 moosum.koreaimg.com/pubwww/moosum/
문수면 수도리는 아름다운 자연과 고가(古家)가 그대로 보존된 전통마을이다. 수도리는 이름 그대로 내성천(乃城川)이 마을의 3면을 감싸안고 흐르고 있으며 그 가운데 섬(島)처럼 떠 있는 마을이다.
안동 화회마을을 연상시키는 이 마을은 휘감아도는 강을 따라 은백색 백사장이 펼쳐지며 맞은편에는 소나무, 사철나무 등이 숲을 이룬 나지막한 산들이 강을 감싸안고 이어진다. 또, 강위로는 견실한 다리가 놓여져 마을과 마을을 잇고 있다.
마을을 둥그렇게 물이 돌아 흐르는 이른바 '물돌이 마을'로 안동에 하회가, 예천에 회룡포가 있다면 경북 영주에는 무섬이 있다. 안동시 임동면 무실의 행정명칭이 '수곡(水谷)'이듯 무섬의 주소는 정확히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水島里)다.
무섬 마을은 회룡포와 같은 내성천 상류의 반남 박씨와 선성(예안) 김씨 집성촌으로 마을의 삼면을 휘감고 흐르는 물 가운데 섬처럼 떠 있다.
도처에 축제가 넘쳐나면서 이 외진 섬마을 사람들도 스스로 축제 하나를 조직해 냈는데, 그게 '무섬 외나무다리 축제'다.
마을 중간쯤의 강둑 아래 백사장과 건너편 뭍을 이은 추억의 외나무다리를 재현하여 사람들을 초대한 것이다. 나무를 덧대 만든 이 옛날식 외나무 다리는 폭 30㎝, 길이 150m.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다.
80년에 콘크리트 다리(수도교)가 생기기 이전까지 마을과 '바깥'을 이어준 것은 삼면을 돌아가며 놓은 외나무다리였다. 마을 사람들은 나무를 이어 다리를 놓았고, 이 다리를 건너 뭍의 논밭을 오가며 농사를 지었다.
장마가 지면 다리는 불어난 물에 휩쓸려 떠내려갔고,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다리를 다시 놓아야 했다 한다. '시집오는 새색시는 가마 타고 다리를 건너오고, 망자는 상여를 타고 그 물을 건너가는' 고단한 세월이 350년이었다.
폭 30㎝의 좁은 다리 위를 걷는 것은 쉽지 않다. 다리의 중간 중간에는 마주 오는 이를 피해갈 여분의 짧은 다리 '비껴다리'가 놓여 있다. 말하자면 일종의 갓길이나 비상대피소인 셈이다.
수량이 적어 백사장이 드넓어졌고 흐르는 물은 투명하게 맑았다. 고운 모래 위에 비치는 물살이 하늘거렸고 마을을 감아도는 강 건너 낮은 산의 소나무·사철나무 숲에 짙푸른 신록의 물결이 아름답다.
십리라 푸른 강물은 휘돌아가는데
밟고 간 자취는 바람이 밀어 가고
방울 소리만 아련히
끊질 듯 끊질 듯 고운 뫼아리 - 조지훈 '별리' 중에서
무섬마을 예안 김씨의 사위가 된 시인 조지훈이 이 처가마을을 무대로 한 시편을 남길 만한 풍광이다.
나지막한 산을 등지고 기와를 새로 얹은 고택들과 드문드문 깡총한 이엉의 초가가 들어선 마을, 널찍한 공터마다 줄지어 주목(朱木)이 심어져 있다. 일부러 낡은 목재나 부재로 지은 민속마을과는 달리, 말끔하게 보수된 마을의 고택들에서는 예전과 같은 고풍스런 느낌을 찾기는 어렵다.
수도리는 고택과 정자로 이루어진 전통마을로 옛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해우당(경
상북도 민속자료 제92호)과 만죽재(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3호)는 옛 선비들의 단아한 격식이 느껴지는
고택이다.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고택 '만죽재(경북 민속자료 제93호)'의 기록에 따르면 무섬 마을이 생긴 것은 1666년이다. 안동에서 반남 박씨 일가가 난을 피해 영주로 옮겨왔고, 16세손 박수가 무섬에 만죽재를 짓고 터를 잡은 이후 선성(예안) 김씨 일가가 박씨 문중과 혼인하면서 이곳에 뿌리를 내렸다. 따라서 따져보면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혈족인 셈이다.
만죽재는 옛 선비들의 단아한 격식이 느껴지는 고택이다. 안마당을 중심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ㅁ자형을 이루는데 대청을 중심으로 한 안채의 오른쪽에는 안방과 부엌이 왼쪽으로는 상방, 고방 문간방이 있다. 중문 왼쪽은 사랑채로 앞면은 낮은 기단 위에 둥근기둥을 세우고 밖으로 들어가며 뒷마루를 놓았다. 만죽재에서는 선비들의 일상 생활과 함께 영주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선비에 관련된 일화와 시간을 알아 볼 수 있다.
만죽재마을에는 만죽재 외에도 여러 채의 도 민속자료와 문화재 자료로 지정된 고가가 전한다. 콘크리트 다리 앞에 단아하게 서 있는 고택은 해우당(경북 민속자료 제92호). 고종 때 의금부 도사를 지낸 해우당 김낙풍이 건립한 집으로 'ㄷ'자 모양의 반가인데,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글씨라 한다.
해우당고택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한시를 읊던 선비의 목소리가 들릴듯한 분위기의 고택으로서 선비의 기개를 느낄 수 있다 . 고종16년(1879) 의금부 도사를 지낸 해우당 김낙풍(1825-1900)선생이 지은 고택으로 다양하고 조리있게 활용된 수장 공간의 모습고 넓은 대청 공간이 돋보이며, 여느 가옥들과 다리 안채와 사랑채가 직선형으로 배치된 점이 특이하다. 해우당 고택 손자방에는 자기 수양을 위해 어릴때부터 교육을 중시하였던 선비의 모습을 재현 하였다.
전통마을답게 무섬에는 기와를 얹은 고가 외에도 이른바 '까치구멍집'이라 불리는 초가도 여러 채 민속·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까치구멍집'이란 안방·사랑방·부엌·마루·봉당 등이 한 채에 딸려 있고, 앞뒤 양쪽으로 통하는 양통집의 속칭이다. '까치구멍'이란 추운 겨울에 실내서 취사할 때 환기구 역할을 하는, 초가의 지붕 양쪽에 뚫은 구멍으로 태백산 부근의 강원· 경북 지역 산간벽촌 초가의 특색이다.
까치구멍집 박천립 가옥(문화재자료 제364호)은 1923년경에 건립되었다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로 된 초가다. 이 집은 출입문이 있는 봉당을 중심으로 왼쪽에 사랑방, 오른쪽에 정지(부엌)가 있고 뒤쪽에는 마루를 중심으로 왼쪽에 윗방, 오른쪽에 안방이 있다.
해방 전만 해도 120여 가구가 넘는 부촌이었다지만 지금은 40여 명만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그것도 50대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65세가 넘는 고령의 노인들이라 한다. 무섬마을의 외나무다리는 300년이 넘게 이어온 고단한 과거의 삶과 마을 바깥에서 태어난 다음 세대의 삶과 그 미래를 잇는 일일지도 모른다.
또한 마을의 중앙에는 19세기 초반에 지어진 만운고택(민속자료 제118호)이 있다. 이 집을 지은 만운 김휘걸의 호를 따서 지은 집이며, 현재 김뢰진 가옥으로 등록되어 있으며 바로 시인 조지훈의 처갓집이다. 김휘걸의 차남인 김성규는 일찌기 한학을 수학한 후 서울중동중학교 본과에서 신학문을 배운 선비로서 일제 강점기에 아도서숙을 설립하여 문맹퇴치, 농촌계몽, 지역항일운동을 전개하다 1928년 8월 일경에 체포되어 금고 8월 옥고를 치렀다. 그후 199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으며 그의 장녀 김위남( 필명 김란희)은 조지훈과 결혼하여 신혼초에 자주 이 집에 머물렀으며, 조지훈은 시 '별리'를 통해 이곳 무섬마을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기도 했다.
/ 시니어매일(http://www.seniormaeil.com)
/ 오마이뉴스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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