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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충청남도

논산 강경 옥녀봉

by 구석구석 2022.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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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이야말로 시간의 녹슨 흔적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이만큼 긴 시간 동안 쇠락하고 있는 곳이 또 있을까. 지금은 하굿둑이 물길을 막았지만, 금강이 내륙의 수로로 활용되던 때 강경은, 한때 ‘물류의 집산지’로 번성의 영광을 누렸다. 그때 강경은 원산과 함께 ‘조선의 2대 포구’로 꼽혔다. 물산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장이 열렸고, 그렇게 열린 강경장은 평양시장, 대구시장과 함께 ‘조선의 3대 시장’에 이름을 당당히 올렸다.

강경 젓갈시장
강경 젓갈전시장과 전망대

물류의 중심이었던 강경에 배후 농지의 수탈을 노린 일본인들이 몰려들었다. 일본인의 자본이 더해져 나날이 도시는 번성했다. 1904년 일본인이 세운 최초의 여관과 병원이 들어섰고, 1906년에는 군산∼강경 간 전화가 개통됐다. 1909년 재판소가 들어섰으며 1911년에는 대형 극장까지 들어섰다. 강경은 당당한 근대상업도시로 떠올랐다. 그 무렵 강경 인구가 지금의 세 배가 넘는 3만 명이었다. 유동인구까지 합친다면 10만 명을 헤아렸다는 기록도 있다. 강경이 가장 번성했던,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었다.

 

강경 대흥시장

지금 강경은, 젓갈 하나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쇠락한 소읍이다.

강경의 몰락은 1914년 대전∼강경 간 호남선 철로 부설로 시작됐다. 육로교통이 발달하면서 금강의 물길을 거슬러 올라오는 물류는 서서히 쇠퇴했다. 고속도로 건설로 물류의 중심이 부산과 인천이 되면서 강경의 쇠퇴 속도는 빨라졌다. 1930년대 어디쯤에서 강경의 시계는 멈췄다. 지금은 강경역사관으로 쓰이고 있는 옛 한일은행 강경지점과 노동조합사무실, 옛 남일당 한약방 건물, 북옥감리교회에 멈춰진 시간이 있다.

 

옛 한일은행인 강경역사관

논산시는 근대건축물을 관광에 활용하겠다며 근대역사문화 거리를 조성했다. 이런 노력에도 성과가 없자 이번에는 강경역사관 뒤편에다 일제강점기 양식으로 대여섯 동의 신축 건물을 지었다. ‘레트로’ 느낌의 레스토랑과 공연장 등을 들여 관광시설 겸 촬영세트장 등으로 활용하려 했던 것. 그러나 건물은 완공 후에도 쓰임새 없이 텅 비어있다.

 

강경의 멈춰진 시간은 손님 유치를 노린 번듯한 ‘가짜’나 진정성 없는 문화거리가 아니라, 좁은 골목의 녹슨 대문과 무너진 담벼락, 오래된 영화 포스터와 낡은 고물상 간판처럼 오래돼 허물어져 가는 것들에 있다. 그저 쇠락한 골목을 하릴없이 기웃거리는 게 강경을 보는 요령이란 얘기다.


# 교회와 절집, 그리고 서원

강경의 시간이 꼭 일본식 근대 건축물에만 새겨져 있는 건 아니다. 번성기에 근대 문물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강경에 들어온 교회와 성당에도 수많은 이야기가 바느질하듯 덧대어 있다.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귀국한 김대건 신부의 첫 사제관이자 성무 활동을 시작한 곳이 바로 여기 강경이었다. 이를 기념하는 김대건 신부 기념관이 강경성당 구내에 있다. 강경에는 또 우리나라 최초의 침례교 예배지가 있고,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옛 강경성결교회 전통 한옥 예배당도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

이뿐만 아니다. 시간의 태엽을 더 감으면 조선 예학의 거두로 일컬어지는 사계 김장생이 후학을 양성했던 죽림서원이 있고, 죽림서원 뒤 대숲 사잇길을 지나 금강이 한눈에 내려다보는 자리에는 정자 임리정이 있다. 임리정을 바라보는 자리에는 김장생 제자 우암 송시열이 스승을 기리고자 세운 팔괘정도 있다.

 

강경에서 옥녀봉도 빼놓을 수는 없다. 옥녀봉은 강경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해발 43m. ‘봉(峰)’이란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한 정도의 높이지만, 그래도 한때 ‘강경산’이라고 부르며 산 대접을 해줬단다. 옥녀봉 정상의 느티나무 옆에 서면 야트막한 동산 정도의 높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시야가 탁 터진다. 앞으로는 굽이치는 금강이, 뒤로는 강경읍의 경관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 문화일보 박경일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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