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번 국도 위에는 가리왕산의 여러 등산로 중 하나인 장구목이골의 들머리가 있다. 장구목이골은 하늘을 찌를 듯한 낙엽송 아래로 낮은 폭포와 작은 소가 이어지는 계곡이다. 마치 일부러 만들고 가꾼 정원처럼 아기자기해서 계곡 안쪽의 풍경만 보면 그야말로 ‘별유천지(別有天地)’다. 계곡은 시원함을 넘어 한기마저 느껴진다. 여름의 절정이 지나 계곡에서 물놀이를 할 수 없다는 게 아쉽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사실 장구목이골은 물이 어찌나 차가운지 한여름에도 몸을 담그기 어려웠으니 그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막동교와 장구목이골을 지나서 59번 국도를 따라 정선 쪽으로 더 가다 보면 오대천을 건너는 다리 ‘단임교’가 나온다. 단임교를 건너면 대한민국에서 한때 ‘마지막으로 남은 오지’라 불렸던,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오지 중의 오지’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은 마을 숙암리가 있다. ‘잘 숙(宿)’에 ‘바위 암(岩)’ 자를 쓴다. 평창과 정선을 오가던 길손이 이곳에 이르러 바위 위에서 자고 갔다고 해서 ‘잘 바위’란 이름을 얻었다.
단임교를 건너면 길은 T자로 갈라진다. 왼쪽은 단임골로 이어지고 오른쪽은 벗밭으로 가는 길이다. ‘두 곳 중에서 어디가 더 외졌느냐’는 질문에는 답하기 어렵다. 똑같이 깊은 오지이지만, 마을의 형태는 전혀 다르다. 단임골의 마을은 계곡을 끼고 띄엄띄엄 독가촌을 이루고 있고, 벗밭은 산의 구릉 위에 집들이 올라앉은 형국이다.
# 단임골에 살던 그는 어디로 갔을까
먼저 단임골로 간다. 가을이면 단풍으로 숲이 붉게 물든다고 해서 ‘단임(丹林)’이다. 오대천의 물길에 합류하는 단임골 초입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땅 이름’이 붙여진 곳이 있다. 물을 끼고 있는 계곡 건너편 바위에 붙여진 이름이 13자다. ‘안도리지돌이다래미한숨바우’. 지명의 뜻을 풀어보자. ‘(바위를) 안고 돈다’ 해서 안도리고, ‘(바위를) 지고 돈다’ 해서 지돌이다. 그러니 ‘안도리지돌이’란 주름치마 같은 가파른 바위를 붙잡아 안기도 하고 지기도 하며 물길을 건너갔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이어지는 ‘다래미’는 이곳 사투리로 다람쥐고, ‘한숨바우’는 말 그대로 한숨 쉬는 바위라는 뜻. 날랜 다람쥐마저 한숨을 쉴 정도라면 얼마나 위험천만한 길이었다는 뜻일까.
지금은 계곡 옆으로 포장도로가 놓여 있다. 바위를 안고 아슬아슬 걸어 드나들던 그 시절에다 대면 황공하다. 계곡을 따라 드문드문 들어선 집이 제법 많다. 조선 시대 호랑이가 자주 출몰했다는 기록이 여기저기 보이고,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이의 무덤인 호식총도 있었을 정도로 깊은 곳이었으니 대대로 이 땅을 지켜온 토박이는 드물고 대개 외지에서 들어온 이들이다. 도시에서의 삶을 버리고 이 깊은 곳까지 들어왔을 때는 사연 하나쯤이야 왜 없을까.
그중에서도 기억나는 게 지금은 떠나고 없는 귀순자 출신 리영광 씨다. 1967년 스물두 살의 나이에 철책을 넘어 탈북한 그의 탈북 동기는, 뜻밖에도 ‘세계 일주를 하려고’였다. 20년 전쯤 여름밤에 감자를 함께 구워 먹으며 그는 “열일곱에 가출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세계 일주를 한다며 압록강을 건너다 실패했다”고 했다. 그가 단임골로 들어온 건 서울 올림픽 이듬해인 1989년. 가진 것 하나 없이 달랑 20㎏짜리 쌀 한 포대만 짊어지고 들어온 그는 텃밭을 가꾸고 벌을 치고 살았다. 결혼까지 해서 살던 그는 5년쯤 후 단임골에서 사라졌다. 어디로 갔는지 아는 이가 없다.
그가 살았던 100년도 더 됐다는 화전민 집은 이제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그는 떠났지만 단임골에는 그때보다 더 많은 이가 들어와서 살고 있다. 그처럼 홀연히 떠나지 못한다 해도, 또 세상을 등지고 살 만큼의 용기가 없다 해도, 단임골을 찾아가 그들의 자유로운 삶을 기웃거리는 것쯤이야 언제든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 모험처럼 간다…거칠고 가파른 길
벗밭으로 가는 길은 가파르다. 깊은 산중의 해발 700m가 넘는 고지대에 집들이 띄엄띄엄 앉아 있다. 벗밭에는 구릉에다 배추며 고추, 콩 따위를 심어놓은 밭과 자그마한 사과 과수원이 있다. 전형적인 산촌마을의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이렇다 하게 볼 건 없지만 멀고 또 높은 벗밭의 마을에서는 세상에서 멀리 떠나 있다는 게 실감이 난다.
벗밭에서 내처 큰 고개를 하나 더 넘어가면 상원산 항골계곡의 최상류다. 원시림을 이루고 있는 항골계곡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궁금했는데, 여기 벗밭을 지나 가파르고 거친 길을 넘어가니 뜻밖에도 항골계곡의 최상류가 나왔다. 계곡 들머리에서는 멀고 먼 숲길 끝이지만, 반대편에서 산을 넘어 계곡 최상류까지 길이 이어져 있는 셈이다.
항골계곡 최상류에는 두 가구가 산다. 밭농사도 제법 크다. 계곡 주변으로는 군데군데 벌목한 자취가 흉하게 남아 있었다. 계곡이 워낙 깊어 그 끝에서는 신선이라도 나옴 직한 선경이 있을 것 같았는데, 기대와는 영 달랐다. 길이가 5.4㎞에 이르는 항골계곡의 3.4㎞ 구간에만 길을 놓기로 한 게 이해가 됐다. 항골계곡의 걷기 길은 계곡을 따라 3.4㎞를 이어지다가 갈미봉이나 상원산을 오르는 등산로와 이어지게 된다. 항골계곡은 가을이면 잎이 붉게 물드는 쪽동백나무가 유독 많고, 갈미봉이나 상원산도 가을 단풍이 좋다. 지금 서둘지 말고 항골계곡에 9월 말쯤 길이 다 놓이고 난 뒤 가을 단풍을 보러 가도 좋겠다.
점으로 찍어 소개하는 장소는 접근이 그다지 어렵지 않은 편이지만, 선으로 그은 코스 중에서는 난코스가 좀 있다. 특히 정선의 자개골 휴양지에서 봉산리를 거쳐 신기리로 이어지는 길은 절대 만만히 봐서는 안 되는 길이다. 이 구간은 일단, 승용차는 어렵다. 비포장길이 거칠기도 하지만, 나뭇가지들이 차체를 북북 긁기도 한다. SUV 차량에다 운전 실력과 남다른 모험심이 있다면 도전해볼 만한 길이다. 길이 좁고 외졌지만, 같은 이유로 사람들의 손을 덜 타서 주변의 경관은 빼어나다. 특히 거친 비포장 구간에서는 마주치는 차가 한 대도 없다. 그만큼 오롯이 혼자 주변의 자연을 독차지할 수 있다는 얘기다.
/ 문화일보 2021.8 박경일 전임기자
정선 가리왕산~숙암리~백석봉~나전리 (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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