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산서원 입구길은 흙먼지 풀풀 날리는 비포장 흙길이어서 더욱 애착이 간다.
서애 류성룡 선생의 후손인 류시석 관리인이 서원 주변을 정리하고 있다 낯선 방문객을 맞아주었다. 대뜸 질문을 던진다. "어째서 하회마을 가는 길과 병산서원 가는 길이 이렇게도 다릅니까? 오히려 학문적 깊이가 배어있는 서원이 포장된 아스팔트 길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요?" 이 우문에 다음과 같은 현답이 돌아온다. "오히려 비포장 흙길이어서 방문객이 줄어드니 서원이 더 잘 보존되지 않을까요?"
병산서원은 고려 중기부터 안동 풍산에 있던 교육기관인 풍악서당(風岳書堂)에서 비롯되었다. 지방 유림의 자제들이 모여 공부하던 곳으로, 고려 말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왕의 행차가 풍산을 지날 무렵, 풍악서당의 유생들이 난리 중에서도 학문에 열중하는 것을 보고 왕이 크게 감동하여 많은 서책과 사패지(賜牌地)를 주어 유생들을 더욱 학문에 열중하도록 격려하였다.
200년이 지나면서 서당 가까이에 가호가 많이 들어서고 길이 생기며, 차츰 시끄러워지면서 유림들이 모여 서당을 옮길 곳을 물색하는 중에 서애 류성룡 선생께서 부친상을 당하시고 하회에 와 계실 때 그 일을 선생에게 문의하니, 서애 선생께서 병산이 가장 적당할 것이라고 권하게 되었고 유림들은 선생의 뜻에 따라 1575년(선조 8) 서당을 병산으로 옮기고 ‘병산서원’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병산서원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교 건축물로서 서애 류성룡(柳成龍, 1542~1607)선생과 그의 제자이며 셋째 아들 수암 류진(柳袗, 1582~1635) 공을 배향한 서원이다.
이곳은 서애 선생께서 31세 때인 1575년에 풍산 상리에 있던 풍악서당을 이곳으로 옮겨와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1607년 선생이 돌아가신 후 묘우(尊德祠)를 짓고 선생의 위판을 모셨으며, 매년 봄ㆍ가을 향사를 받들면서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그 후 철종 14년(1863)에 병산서원으로 사액 받았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사적 제 26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한국의 서원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된 서원이다.
만대루 뒷편에 있는 입교당에서 만대루와 풍경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옛 선비가 된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누각 건물인 만대루에서 바라보는 주변경관은 병산의 자연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으며, 유생들이 교육을 받던 강당인 입교당에서는 자연과 건축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어 자연 친화적이고 자연과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는 본보기가 되는 곳으로, 우리 민족의 절제된 마음과 자연을 지켜가고자 하는 민족성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선비의 절제된 마음을 담아 낸 인공적인 건축물과 하나되어 펼쳐 내는 장엄함은 어느 곳에서도 느낄 수 없는 한옥의 완숙미를 보여주고 있으며, 주사(廚舍) 앞에 달팽이 모양을 한 하늘 열린 통시(화장실)는 또 다른 볼거리로 재미를 준다.
서원 중심 강당으로‘立敎’는 『小學』 立敎편에서하늘로 부여받은 착한 본성에 따라 인간윤리를 닦아가는 가르침을 바르게 세운다는 것에서 인용한 것이다. 유생들이 배워야할 성현의 가르침인 오륜(五倫)을 바르게 세운다는 의미이며, 성현의 가르침을 받아 자기의 몸을 바로 세우고 나아가 선비로서의 사명을 바로 세우는 공부를 하였다.
만대루에서 내려와 서원을 벗어나자 달팽이 모양의 원형 흙벽담이 있다. 머슴들이 사용하던 뒷간이다.
서원밖 주사(廚舍) 앞에 있는 화장실이다. 진흙 돌담의 시작 부분이 끝 부분에 가리도록 둥글게 감아 세워 놓았는데, 그 모양새에서 이름을 따왔다. 출입문을 달아 놓지 않아도 안의 사람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배려한 구조이다. 지붕이 따로 없는 이 하늘 열린 '달팽이 뒷간'은 유생들의 뒷바라지를 하던 일꾼들이 사용하던 것이다. 400여년 전 서원건물과 함께 지어졌으며, 옛 기록에는 대나무로 벽을 둘렀다고도 전해진다. 병산서원의 부속건물에 포함되어 사적 제 260호(1978년)로 지정되었다. 2003년 보수 작업이 이루어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출처 : 사진 시니어매일 2019.5 김대한기자 / 글 병산서원 홈페이지]
유홍준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중에서
병산서원은 주변의 경관을 배경으로 하여 자리잡은 것이 아니라, 이 빼어난 강산의 경관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며 배치했다는 점에서 건축적, 원림적 사고의 탁월성을 보여준다.
병산서원이 낙동강 백사장과 병산을 마주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병산서원의 정원이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를 건축적으로 끌어들이는 건축적 장치를 해야 이 자연공간이 건축공간으로 전환되는 것인데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이 만대루이다.
만대루에 중심을 두는 건물배치는 건물의 레벨선정에서도 완연히 나타난다. 병산서원이 올라앉은 뒷산은 화산이다. 이 화산의 낮은 구릉을 타고 레벨이 올라간다. 하지만 단조로운 기하학적 수치의 증폭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공간운영을 자세히 따져보면, 사당은 위로 추켜올리듯 모셔 있는데, 만대루 누마루는 앞마당에서 볼 때는 위쪽으로, 그러나 강당에서 볼 때는 한참 내려보게 레벨이 잡힌 것이다. 사당은 상주 상용공간이 아니고 일종의 권위의 상징 공간이니 다소 과장된 모습을 취했지만 만대루는 정반대로 봄부터 가을까지 상용하는 공간이므로 그 기능을 최대한 살려낸 것이다.
만대루로 오르는 통나무계단은 그 자체가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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