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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전라북도

고창 23번국도 모양성 고창읍성

by 구석구석 2017.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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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원의 성곽순례

가는날이 장날이라 비를 조금씩 맞으며 성곽을 둘러 봅니다.

그 당시의 병사들은 비가 오면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에 있는 ‘고창읍성’은 서산 해미읍성, 순천 낙안읍성과 함께 조선 시대 3대 읍성으로 불린다. 아마도 조선 시대의 다른 읍성과 달리 잘 보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성곽이 주는 아름다움이 특별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고창읍성은 해미읍성과 낙안읍성이 평지에 조성된 것에 비해 낮은 언덕 위에 세워져 있어 처음 보는 이들을 웅장함으로 압도한다. 읍성은 아기자기하고 크지 않다는 편견을 없애기에 충분한 모습이다. 또 주 출입문인 북문 앞쪽으로 ‘고창문화의 전당’과 ‘한옥체험마을’, ‘군립미술박물관’, ‘판소리박물관’, ‘야외공연장’, ‘동리국악당’ 등이 자리 잡고 있어 고창읍성은 전통문화 중심지로서 역할도 하고 있다.

 

고창읍성이 만들어진 것은 1453년(단종 1)에 도민들이 축조했다는 설과 숙종 때 이항(李恒)이 주민과 함께 완성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두 가지 모두 전라도민들이 힘을 합쳐 왜침입을 막기 위해, 혹은 호남 내륙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 유비무환으로 쌓은 성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1965년 4월 1일 사적 제145호로 지정된 자연석 성곽인 성은 둘레가 1,684m, 높이 4~6m, 면적은 16만 5858㎡(혹은 18만 9764㎡)로 동서가 약간 긴 타원형 형태를 갖추고 있다. 

고창읍성은 일명 모양성(牟陽城)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는데 삼국시대 당시 이 지역이 모량부리(毛良夫里)로 불렸던 것에 유래한다고 전한다. 

고창읍성에는 동·서·북의 3개의 문이 있으며 이들 문과 같이 있는 3개의 옹성(壅城)을 비롯해 6개의 치성이 성을 둘러 축성되어 있다.

이와 함께 성 내부에는 2곳의 수구문(水口門)과 옥, 관청, 객사, 동헌 그리고 성황사 등이 있다. 또한, 북문 들어서자마자 왼편에는 성벽 위를 걷는 ‘답성놀이’의 시작을 알리는 푯말이 눈에 들어온다. 

답성놀이는 고창사람들의 민간무속과 관련된 전통놀이로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리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 바퀴 돌면 극락승천 한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음력 윤달이면 부녀자들의 답성 행렬이 장관을 이루며 펼쳐지는데 북문 앞 광장에 이를 기념하는 조각상도 세워져 있다. 아마도 이 같은 풍습은 돌을 모아 무기로 활용하기 위해 전해져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창읍성의 주 출입문은 북문으로 ‘공북루(拱北樓)’라고 한다. 공북루는 바로 앞 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옹성에 둘러싸여 있는데 돌로 만들어진 일반적인 성문과 달리 나무로 된 2층 누각형태의 문으로 만들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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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으로 들어서자마자 왼쪽의 성곽을 따라 언덕을 오르면 얼마 안가 동북치(東北雉)에 다다른다. 치는 성에 접근하는 적을 3방향에서 공격하기 위해 성벽이 사각형으로 돌출된 모습인데 이곳의 치는 좀 더 의미가 남다른 장소이다. 

3·1운동 당시 이곳이 독립만세의 터가 되었기 때문이다. 1919년 3월 21일 김승옥, 오동균, 김창규 등의 주도하에 고창청년회원, 고창보통학교 학생 200여 명이 이곳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동북치를 지나면 또 하나의 문인 동문 ‘등양루(登陽樓)’에 도착한다. 등양루도 공북루와 마찬가지로 옹성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공북루에서 오른쪽으로 올라가 만날 수 있는 서문 진서루(鎭西樓)도 같은 모습이다.

이렇게 고창읍성 한 바퀴를 돌면 3개의 성문과 6개의 치를 모두 보고 제자리인 북문으로 올 수 있는데 한 가지 주의할 점은 현재 성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은 오로지 북문뿐이다. 

다른 문들은 잠겨 있으며 성 바깥쪽을 보고 싶으면 처음부터 북문 바깥쪽으로 돌아야만 한다. 성 밖의 둘레길도 잘 조성되어 있어 성곽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는 바깥쪽도 추천한다.

북문 안, 즉 성 내부로 들어서면 왼편에 지금의 감옥인 옥(獄)이 눈에 들어온다. 2000년에 복원된 이 옥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두 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규모가 작다.

또한, 성 안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이 정무를 보던 동헌(東軒)이 있는데 건물터만 남아있던 것을 1987년 발굴 조사 후 1988년에 원 모습으로 복원했다. 동헌 바로 옆 수령이 기거하던 살림집인 ‘내아’도 동헌과 같은 시기에 복원됐다.

동헌 위쪽으로는 모양지관(牟陽之館)이란 현판이 걸린 ‘객사’가 자리 잡고 있는데 객사의 중앙은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그리고 나라에 경사와 궂은일이 있을 때 대궐을 향해 예를 올렸다. 객사 왼쪽과 오른쪽 방은 조정에서 파견된 관원들이 숙소로 사용하던 곳이다.

이 밖에도 북문 오른쪽 옆에는 향촌 사회의 자치적 기구라고 할 수 있는 ‘향청(鄕廳)’과 이방과 아전들이 소관 업무를 처리하던 청사인 ‘작청’, 그리고 조선 말기 대원군이 펼친 쇄국 정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척화비’가 있다. 한편 고창읍성은 평지가 아닌 산 위에 있지만, 성 둘레 모든 곳에 조명시설을 설치해 야경이 멋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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