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방방곡곡/인천광역시

인천 문학동 문학향교 박제순

by 구석구석 2015. 9. 21.
728x90

 

 오랫만에 가보는 문학(인천)향교

 

향교의 주요 건물로는 공자의 위패를 모시는 대성전,우리 나라와 중국성현의 위패를 모신 동,서 양무와 교육생들의 강당인 명륜당 그리고 유생들의 처소인 동,서 양재 등이 있다. 이 향교는15세기 중반에 중수되었다고 전하나 현재의 주요 건물은 조선후기의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20세기 중반에 실시된 몇 차례의 중수 때 삼문 등은 크게 보수 되었다.

 

 

'인천향교'는 성균관과 더불어 고려(말)와 조선의 대표적인 지방 교육기관이다. 인천향교가 언제 건립됐는지 정확한 연대를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1398년 태조 7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외삼문
외삼문 안쪽

지난 90년 10월 인천시 유형문화재 11호로 지정됐으며 매년 2월, 8월에 석전대제를 지낸다. 매월 초일과 보름에 문묘분향을 하고 있기도 하다.

 

명륜당

하늘을 향해 길게 솟은 붉은 기둥. '홍살문'은 '인천향교'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잡귀는 들어갈 수 없고 일반인들도 마음가짐을 깨끗하게 해야 통과할 수 있는 문이다. 홍살문 앞 '하마비' 역시 이 곳을 지나는 사람은 모두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하라는 뜻으로 세워진 비석이다. 홍살문이 액자라면 인천향교는 그림이다. 커다란 네모 테두리 안 쪽으로 '인천향교'의 작고 아담한 외삼문이 그려져 있다.

 

동재

홍살문을 지나 향교로 올라간다. 외삼문의 오른쪽 문으로 들어선다. '명륜당'은 16세에서 40세까지 학동들이 향학열을 불태운 곳이다. 양반은 물론 평민의 자제들까지 이 곳에서 글을 읽으며 신분상승을 꿈꾸었다. 명륜당 양 옆에 자리한 '동재', '서재'는 각각 양반 자제와 평민 자제가 기숙하던 방이다.

 

서재

조선시대 중기 사립학교인 '서원'이 생기기 전까지 향교는 교육, 제사, 주민교화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서원이 생기면서 기능은 제사의식으로 치우치게 됐다. 옛 성현들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은 명륜당 뒤 쪽에 있다.

 

대성전

 지금도 매년 음력 2월과 8월이면 이 곳에서 '석전대제'가 치러진다. 온고이지신. 학생들은 공자, 최치원, 정몽주와 같은 성현들의 학식을 동경하고 인품을 흠모하며 그들의 궤적을 좇아갔다.

 

인천향교에선 매년 음력 2월, 8월 '석전대제'를 지낸다. 이 때 공자와 함께 정몽주, 최치원 등 성현들의 학덕을 추모한다.

 

대성전

석전대제는 이처럼 공자를 모시는 사당인 문묘에서 지내는 큰 제사로 예법과 음악을 존중하는 국가의 의례이다. 문묘대제, 석전제(고기를 올리고 음악을 연주하는 의식)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 유교가 전래된 기록은 없지만 최초로 태학(유교 교육을 위한 국립중앙대학)을 설립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으로 석전도 고대 중국의 제사관례에 따라 행하였을 것으로 학계에선 추정한다.

 

석전대제는 영신례, 전폐례, 초헌례, 공악, 아헌례, 종헌례, 음복례, 철변두, 송신례, 망료의 순서로 이뤄진다. 의식을 치를 때 연주되는 음악은 문묘제례악이라 하는데, 기악과 성악, 춤을 총칭하는 대성아악으로 연주된다. 석전대제는 이처럼 음악이 연주되고 춤이 곁들여지는 종합예술적 성격을 띠고 있기도 하다. 조상들은 이 의식을 통해 나라에 충성하고 효도하는 마음을 길렀으며, 문화유산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다. 석전은 세계적으로도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큰 의식행사로, 국가는 석전대제를 중요무형문화재 85호로 지정해 보존하고 있다.

728x90

인천 문학향교 성년식

 

 

향교입구 비석군에 있는 친일반민족행위자 '박제순 영세불망비 단죄문'

한말 친일파 관료 박제순의 영세불망비는 그가 인천부사 겸 인천항감리로 재임하던 기간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891년 세워졌다. 그러나 박제순은 일제가 1905년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할 당시의 외부대신으로 이완용, 권중현과 함께 늑약에 찬성하고 서명한 '을사오적'중 한명이다. 그는 경술국치라 불리는 1910년 한일합병조약에도 서명해 '매국노'라는 지탄을 받았다. 또한 조선 총독의 자문 기관인 종추원의 고문을 지냈으며, 일제로부터 자작작위까지 받고, 사망할 때까지 매년 1,600원의 수당을 받았으며 부귀영화를 누렸다. 결국 그의 이러한 행위는 매국 행위로 분류되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2005년 박제순 선정비는 시민 단체 등의 문제 제기로 친일 잔재 청산 차원에서 철거되었다. 하지만 부끄러운 역사의 흔적을 애써 지우기보다는 우리 후손들에게 반면교사의 교훈을 주고자 2020년 다시 이 자리에 눕혀 놓았다.

2020. 3. 1 인천광역시장 미추홀구청장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