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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상남도

밀양 무안면-고라리 중산리 사명대사

by 구석구석 2009.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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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라리 399번지 경남기념물116호 사명대사생가

09:00~18:00 / 매주 월요일 및 1월 1일, 설, 추석휴무

 

이 곳은 임진왜란 때 의승장이었던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생가터이다. 현재 사당인 숙청사와 사명대사가 태어나서 자란곳인 육영당, 사명대사가 거처하던 사랑채인 사명당 등이 남아있다. 1992년에 경상남도 기념물 제116호로 지정되었다. 사명대사는 어린 시절을 여기서 보냈으며 많은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또한 사명당이 이따금씩 고향으로 돌아올때 쉬었다는 바위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어, 그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고 그의 생을 음미해 볼 수 있는 곳이다. 마을 뒷산 서쪽 기슭에 사명대사의 조모와 부모의 묘소가 있다.

사명대사는 중종 39년(1544년)에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풍천 임씨 집안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명당이라는 이 곳에서 조부때부터 살았다. 증조부 임효곤은 문과에 급제하여 장악원정이 되어 대구 수령으로 있다가 밀양에서 살았는데, 사명당의 조부는 괴과에 급제하여 강계부사를 지낸 유학 종원이다. 13세때인 명종 11년(1556년) 유촌 황여헌선생으로부터 글을 배우다 "세속 학문은 천하고 비루하여 시끄러운 세상 인연에 얽매여 있으니 어찌 번뇌 없는 학문을 배우는 것과 같을 것인가?" 하고 그 해 가을 황악산 직지사로 가서 신묵화상에게 머리를 깍고 선문에 들어가게 되었다. 금강산에 들어가 수도하던 중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승병을 모아 의병장으로서 활약하였다. 1593년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선조는 그의 공을 크게 인정하여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의 벼슬을 내렸으며 일본과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그 뒤, 병을 얻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광해군 2년(1610) 설법을 마치고 세상을 떴다. 저서로 『사명당대사집』7권과 『분충서난록』1권 등이 있다.

 

중산리 산 1028-1 대법사 055-356-0322

밀양 시내에서 부곡온천으로 가는 길목인 무안면 무안리 입구 오른쪽에서 영취산 자락으로 난 도로를 따라 한참을 올라야 한다. 땀흘리는 표충비로부터는 8km 떨어져 있다.  

 경남 밀양 일대는 사명대사의 영험한 전설이 구석구석 밴 곳이다. 땀 흘리는 표충비, 사명대사 생가 유적지 등 사명대사와 관련된 거의 대부분이 대법사가 위치한 무안면 일대에 남아 있다. 땀 흘리는 표충비에서 8km 정도 떨어진 영취산 대법사에는 사명대사가 50대에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땅에 꽂아 놓은 것이 자라나 잎을 피웠다는(직접 심었다는 설도 있음) 아름드리 모과나무 한그루가 대법사 경내 보광전 앞 마당에 서 있다. 높이가 2m20cm, 굵기는 3m20cm로 나무 밑둥이 어른 두 사람이 양팔을 벌려야 마주 잡을 정도로 우람하다.

 이 사찰은 신라시대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된 후 900년이 지난 어느날 부터 사명대사가 10여년간 머물렀던 곳이기도 한데, 열반 후 그 영정을 모신 곳이라 해서 조정에서 표충사(表忠詞)라는 이름을 하사하며 표충비를 세우고 사당을 세웠다가 후에 영정이 단장면의 현 표충사로 모셔지는 바람에 원래의 이름을 뺏기고 말았다. 초창 당시 학 3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해서 백하암(白霞庵)이라는 사명으로 불리던 이 사찰은 사명대사의 위상 덕에 오랜 세월 국가의 관심 속에서 중건을 거듭해 왔느나 국난의 영향과 조선조의 억불숭유 정책 등으로 인해 폐사되었다가 1968년 현 조실 지혜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시작된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통해 오늘날의 사격을 갖게 되었다.

 

사명대사의 정신이 깃든 이 대법사에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 한편이 전해지니 바로 모과나무에 관한 실화이다. 해발 6백m 고지에 자리하고 있는 대법사의 중창불사가 한창이던 더운 여름 , 사명대사의 지팡이 나무라고 알려진 모과나무가 대웅전을 지으려는 자리 바로 앞을 가로막고 있어 모과나무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다. 나무 옮기는 것을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으나 스님은 1주일간 기도까지 드려가며 공사일정을 잡았다. 그런데 인부들이 일하러 오기로 한 그날 새벽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요사채에서 잠을 자던 지혜스님은 갑자기 산천이 울리는 듯한 소리에 눈을 떴다. 밖으로 나가 보니 적막하기만 한 산중에 갑자기 바람이 부는가 했더니 이내 잠잠해져 다시 방으로 들어왔는데 이번에는 호랑이가 포효하는 듯한 음성이 밖에서 들려왔다. "내가 4백년을 지켰는데 네 마음대로 하려느냐. 나는 절대 안간다." 지혜스님은 등골이 싸늘해졌다. 목소리는 분명 모과나무쪽에서 들려왔다. 후닥닥 밖으로 나가보았더니 8월 한여름철인데 모과나무에서 아주 차가운 바람이 씨익--불어왔다. 이토록 기이한 일을 겪게 된 스님은 새벽 6시 공사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나무 옮기는 일을 취소시켰다. 바로 무더위가 극성을 부리던 1993년 8월 10일의 일이었다.


이 같은 이야기를 그냥 무시해버리기에는 현재의 대법사 구조가 참으로 이상하다. 대웅전이 있어야 할 자리에 선방이 들어섰고 모과나무는 그대로 놔둔 채 주전각인 대웅보전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수십억원을 들여 대규모 불사를 하면서 본존불을 모시는 주전각을 경내중심에서 뚝 떨어진 곳에다 짓는, 전통사찰 건축양식에서 보면 크게 어긋나는 불사를 한 대법사의 이야기는 사명대사의 원력이 작용했다는 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궁색하다. 사명대사의 혼을 잇고 있는 경남 밀양 대법사는 현재 조계종 원로회의 수석부회장을 맡고 있는 지혜스님에 의해 불자들이 본분을 깨닫게 하는 청정수행도량으로 거듭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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