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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기한강유역

김포 8경과 둘러볼만한 곳

by 구석구석 2009.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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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8경

걸포의 우거진 소나무 숲 / 감암포(운양포)의 잔잔한 가을강물 / 영사정의 보름달 / 가현산 낙조 / 바람에 휘날리는 독도의 갈대꽃 / 감바위에 집을 찾아 돌아오는 배돛 / 홍도평의 기러기떼 / 은은한 세상을 만드는 봉릉사의 종소리

 

1. 걸포의 송림(傑浦의 松林)

걸포송림을 논하기 전에 우선 그 부락의 유래를 살펴보면 걸포동은 고려 때부터 한강변에 이루어진 마을로 추측되며 김포의 학교 교육 발상지로 처음 향교가 설치되었고 또한 포구 때문에 각종 문화와 문물이 교역되었으므로 경제활동의 출입구 역할을 했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걸포동의 전래 지명은 연봉선생 유고문집에 의하면 약 400년 전 증걸포생이라는 제목으로 볼 때 옛 걸포가 현재의 걸포로 개명되었다는 설과, 약 600년 전에는 한강이 이 부락 앞을 뚫고 지났으니 포구가 있다고 하여 걸포(傑浦)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향토사학자들은 전자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또한 김포팔경에 있는 걸포송림은 옛부터 한강물이 굽이쳐 흐르고 포구로 사람의 왕래가 많아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으며 산림이 울창하여 금릉팔형승경에도 걸포송림이라 하였고 옛 시에도 걸포 송림을 주제로 한 시가 많은데 그 중 한 수를 소개하겠다.

 

“십리걸포(十里傑浦)에 장림(長林)이 빽빽 사양(斜陽)에 부는 바람, 버들가지 누릇누릇, 가벼운 연기, 성긴 비, 깨끗이 개인 뒤에 때마침 꾀꼬리 울어대어 듣기 좋구나.” 이것만 보아도 얼마나 걸포송림(傑浦松林)의 풍치(楓致)가 아름다웠는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걸포송림은 비록 나즈막한 야산이지만 한강 제방이 없던 시절 산 능선에는 거송이 빽빽하였고 홍도평의 갈대꽃과 나무재 식물이 무성하여 절경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깝게도 일제 말엽에 일본군의 전시자재로 강벌당하였으며, 또한 8.15 해방 후 무계획한 남벌로 옛 모습이 많이 훼손된 것이 안타까우나, 그나마 노송이 건재하고 있는 것이 무척 다행스럽다.

 

아직은 고증이 안된 상태이지만 성혈이 있는 지석묘의 흔적들이 여기저기에 감지되기도 하고 거래라는 고유어를 간직한 걸포동은 그 지명만큼이나 유구한 역사를 가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옛 선조들은 김포팔경에 아마 걸포송림을 생각했는지 모르며 얼마나 풍치가 아름다웠는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된다. 김포신문 2005.10 김포문화원 사무국장 유영근

 

지금의 걸포는 한강변으로 제방이 있어 예전의 모습은 찾기 힘들다.

 

2006년 김포의 역사와 미래가 담긴 문화공원을 주제로 걸포동에 조성된 걸포중앙공원(☎ 031-980-2974)은 15만㎡가 넘는 넓은 규모에 소나무와 조팝나무 등 7만 그루의 나무가 식재된 도심 속 가족공원이다.


분수대와 파고라가 설치된 통일염원마당은 이미 아이들의 여름철 피서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분수대 앞에 설치된 파고라는 김포시의 주요 문화행사가 열릴 때마다 공연장으로 탈바꿈해 공원을 찾은 시민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정화의 샘과 중앙잔디광장은 공원을 찾은 시민들에게 몸과 마음에 청량감을 더해주고 실개천과 벽천으로 흘러가는 연못은 아이들의 풀장이 되어준다.

 

공원에 설치된 축구장에는 인조잔디가 깔려 사계절 안전하게 축구를 즐길 수 있고, 농구장과 배구, 배드민턴, 족구, 다목적 풋살경기장에서는 남녀노소 누구나 운동을 즐길 수 있다. 이밖에도 공원 남쪽에 설치된 어린이 교통공원에서는 아이들이 직접 체험을 통해 교통의식을 심어줄 수 있어 유치원생과 초등학생들의 산교육장이 되고 있다.


공원 입구에 마련된 국궁장에서는 전통문화인 활쏘기와 전통문화를, 공원 중앙에 마련된 X-게임장에서는 인라인스케이트, 스케이트보드 등 청소년들이 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

 

 

 


 

2. 운양포의 잔잔한 가을 강물(雲陽浦 秋沈)  

 

운양포가 있어 운양동로 불리고 있는 이 마을은 한강 제방과 48번국도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한강밀물시 봉성산 앞, 누산리 벌판, 운양벌판 그리고 현 고창초등학교 앞 부분까지 밀려들어 수정같이 맑은 잔잔한 강물이 발갛게 반짝이는 운치가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고 한다.

 

운양포는 지금의 제촌과 대촌부락에 위치한 운양산 바로 아랫마을(절말)에 있었던 나루터로 서울 마포나루와 파주 법곶리를 왕래하던 어선이 잠시 정박하는 소규모 기항지로 사용되었던 것이나 지금은 존재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70세이상의 어른들은 아직도 운양나루 또는 운양포라고 부르는 것을 조사를 통하여 알 수 있었다.

 

용화사에서 은은하게 들려오는 목탁소리를 들으며 우주와 한없는 대화를 통한 인간의 고뇌와 번뇌를 잊고 운양산 정상에서 바라본 운양벌판의 가을정경은 저녁노을에 반사되어 너울거리는 황금물결과 따뜻한 남쪽 하늘로 가기 위하여 힘찬 날개짓하는 기러기떼의 조화를 보며 우리선인들은 운양포 추심을 김포팔경의 하나로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운양호 맑고 넉넉한 물줄기가 끝없이 길을 따르는데 / 한줄기 비라도 뿌린 뒤 자욱한 물안개 피어오르는 산과 / 넓고 푸른 강물이 호수와 어울려 그림과 같도다.’

 

이러하듯이 잔잔한 강물이 달빛에 넘실거리고 수묵화 같이 둘러싸인 주위의 경관과 짜임새 있는 정경(봉성산, 운양산, 가현산), 그리고 자연의 오묘한 조화를 보며 예술은 자연을 모방한다는 명언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도 된다. 이것은 바로 우리 선조들의 문화예술 감각과 상상력을 짐작해볼 수 있는 것이며 선조들은 자욱한 물안개 소리에 도취되어 세상만사를 잠시 잊고 지냈는지도 모르겠다.

 

말끔히 확장 단장된 48번국도 누산 벌판을 달리며 도로가 생기기 전과 한강제방이 축조되기 전 이곳 넓은 평야 좌우로 맑은 강물이 펼쳐져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낭만적인 정경이 그려진다. 넓은 호수를 연상하게 하는 운양포가 황금 벌판으로 변할 것을 미리 예견하고 운치 그윽한 운양포의 잔잔한 가을 강물을 시로 표현하며 후손에게 전해 주려고 했던 선인들의 사려 깊은 심정도 헤아려 질 것 같다.

 

이제는 추억 속 풍경으로만 남아 있는 운양포의 추심, 그 추억을 살리는 사진 한 장, 그림 한 장 없다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 소중한 문화유산의 보존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김포신문2005.11 김포문화원 사무국장 유영근

 

운양동 산 831 용화사 031-984-3234 

올림픽도로를 타고 가다 행주인터체인지에서 제방도로를 타거나, 강변북로와 자유로를 타고 가다가 김포대교를 건너 제방도로로 진입한다. 이후 서쪽으로 한강을 따라 천변을 계속 달리면 운양삼거리에 이르게 되는데, 이때 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서 용화사로 진입하게 된다.

 

 

운양산(雲陽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직할사암이다. ‘운양추파(雲陽秋波)’ 용화사가 자리한 운양동은 예로부터 가을빛 하늘에 물든 한강의 파도치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김포 8경의 하나로 꼽히는 이곳은 한강하류에 접해 있어 천연기념물 제250호인 재두루미를 비롯해 큰기러기, 황오리, 고니 등 멸종위기 철새들을 관찰할 수 있는 철새도래지다.

이곳은 최근까지 군사시설 보호를 명목으로 생태환경이 비교적 잘 보전되어 왔던 것도 사실이다. 용화사는 한강하구 변에 남아 있는 유일한 전통사찰로 역사적이나 문화적으로도 보존가치가 높은 사찰이다. 현재 김포시 향토유적 제7호로 지정되어 있는 미륵불은 절의 창건과 함께 600여년의 세월을 함께 했으며,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남아 있다.

“1405년(태종 5)의 어느 날 신사(信士) 정도명이 강화도로부터 세곡선을 한강으로 수송하고 있을 때 미륵불이 갑자기 바다 가운데에서 나타나 밝은 빛을 뿜어내자 이것을 본 정도명은 기쁨을 누르지 못하고 곧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절을 짓고 그 미륵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이러한 유서 깊은 사찰 용화사도 최근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개발압력이 가중되고 있는 상태이다. 이에 용화사에서는 현재 사찰주변 자연경관을 생태학습장으로 시민들에게 개방하고 있으며, 향후 각종 환경관련 문화행사 등을 계획하고 있다.

 

3. 영사정의 보름달(永思亭望月)

 

영사정은 영사정마을(고촌면 신곡7리)에 위치한 조그마한 정자로서 행정구역상 법정리가 아닌 신곡리에 속한 자연촌의 부락이다.

 

영사정은 22대 정조 임금이 장릉으로 참배하러 가던 중 개화리에 당도해 저 멀리 경치 좋은 묘가 누구의 것인가를 물어 신하가 남원 윤은의 묘라 아뢰니 정조 임금은 주위의 경관과 경치가 아름다워 영원히 생각나겠다하며 영사정이라 사호하여 그후부터 영사정이라 불리게 되었다. 헌종 8년(1842)에 집필된 김포군 읍지는 물론 그 이후의 읍지들도 영사정으로 표기되어 있다.

 

위와 같이 정조 임금이 지어줄 만큼 경관이 뛰어났던 영사정은 한강을 바라보며 자연 발생적으로 생긴 조그마한 섬(신곡 양수정 뒤)인 백마도를 앞에 두고 각종 철새들과 텃새들, 그리고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흔하게 볼 수 있었던 한강의 민물고기들인 잉어, 메기, 웅어, 숭어 각종 조개들의 안식처이기에 충분하였다. 옛 선조들이 뉘엿뉘엿 지는 해를 뒤로하고 꽉 찬 보름달과 멀리 보이는 한양을 바라보며 시원한 물소리에 세상만사 잠시 잊고 풍류를 만끽하였으리라는 짐작이 갈 만 하다. 좀 더 생각을 깊게 해 보면 형편이 나은 선조들은 아마 조그마한 돛단배를 타고 각종 철새와 텃새, 그리고 풍악을 벗삼아 보기에도 운치가 있는 보름달을 시제로 시 한 수 적어 보는 풍류를 즐겼으리라는 추측과 그 시대의 선비 정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선인들은 이곳의 짜임새 있는 정경과 운치를 보고 팔경으로 택한 것 그 자체는 문화예술적 감각과 상상력이 뛰어남을 알 수 있으며 지금은 현대 문명의 편리함 때문에 문화유산은 간 곳이 없고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신곡 양수장과 고양시를 연결하는 김포대교가 앞을 가로막고 있다. 또한 심한 오존층으로 인하여 서울의 북한산을 배경으로 한 해맑은 영사정의 꽉 찬 보름달은 이제는 추억 속의 풍경으로 남아 있는 것이고, 지금은 영사정터라는 돌비문만 남아 있다. 김포신문 2005.11 김포문화원 사무국장 유영근
 

 

 4. 가현산 낙조  

 양촌면과 검단면(95. 3. 1 인천광역시 편입)간 경계에 위치한 가현산은 해발 215m로 김포시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이며, 옛 이름은 산의 형세가 코끼리 모양 같다고 하여 상두산이라 불려 왔고, 그 후에는 개연산 또는 칡이 번성하여 갈현산이라 불리기도 했다.

 

또한 산세가 거엄하고 수목이 울창하여 그 속에 사는 각종 금수의 우는 소리가 유명할 뿐 아니라, 산 정상에서 본 김포반도의 경관이 수려해서 가현산(歌絃山)이라고 칭하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 다른 설로는 중국과 고려가 물물교환 무역을 할 때 안동포 개펄에 자생하고 있는 약쑥을 교역품으로 했는데 지금의 가현산(상두산) 근처에 있는 주막에서 가무를 즐겼다고 한 전설로 인해 가현산(歌鉉山)으로 개명하였다는 설도 전해지기도 한다.

 

각종자료를 정리하다 보면 가현산을 주제로 하는 시가 자주 발견되곤 하여 무더운 삼복더위에 아랑곳없이 가현산을 올라가 봤다. 인천시로 편입된 아쉬움을 안고 검단 사거리에서 강화쪽으로 4Km 정도 시원스레 달려 해병2사단 입구(검산동 좌동) 300m 못 미친 지점에 묘각사를 가르치는 이정표가 보였다. 오르막 비포장도로를 2Km 정도 가면 깨끗하게 단장된 절이 인상적이고 약수를 뜨기 위하여 분주하게 움직이는 동네 주민들이 꽤나 있었다.

 

장마 끝이라 주의의 시계가 평소보다 2∼3배 트이는 것이 다행스럽게 생각하며 흘리는 땀 방울에 시원한 가현산 약수 한 사발 단숨에 들이켜 더위를 식히고 동서남북 둘러보니 녹색 융단처럼 펼쳐진 김포반도 및 서해의 정경은 과연 장관 중에 장관이었다.

 

왜 우리의 선조들은 김포팔경에 가현산의 지는 노을을 택하여 후세에게 전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점은 잠깐이기에 충분하였고 지는 석양에 반사되어 붉게 굽이치는 서해를 바라보면서, 웅장한 꿈을 품기에 충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또한 숭엄하고 웅장한 자연물의 아름다움과 조화로운 운치를 보면 누구나 김포반도를 가깝게 접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가현산 정상에서 솔솔 부는 강바람을 얼굴에 느끼며 그 옛날 갈매기의 애련한 울음소리를 뒤로 한 채 붉게 물드는 황포돗대와 어울려지는 가을의 정경과 운치를 보고 시 한수 안 읊어보는 선비가 어디에 있겠는가, 김포반도의 옛 풍경을 상상 해 보고 가현산을 주제로 한 옛 선인들의 시를 음미하여 중얼거리기도 하였다.

 

가현낙조(歌鉉落照)
歌鉉山에 해 떨어지니 樵歌마저 사라지고 峴山景致 쓸쓸해지네 / 놓인소떼 좁은길로 나려오며 숲속의 새 깃드니 저녁연기만 뭉게뭉게 오르네 / 메뿌리엔 흰구름 뻗치고 山골은 깊고 조용하구나 / 물에뜬 배돛 저녁노을에 물결따라 돌아가네 / 當年에 景公의 어리석음을 비웃었거니 萬古에 歎息 한들 어이하리

 

가현산 낙조(歌鉉山 落照)
믓 가마귀 울음 멎고 저녁 연기 자욱한데 / 한 덩이 홍륜(紅輪)이 바다위에 딩군다 / 산 아래 외딴 마을 경색이 끝없이 펼치는데 / 소랑 염소랑 가는 곳에 목동의 노래 흐른다,

 

이처럼 가현산의 아름다운 노을과 경관을 보며 선조들이 읊은 시의 대부분은 김포반도 및 서해를 주제로 한 것이고 또한 가을걷이하는 농부의 심정을 헤아리고 있었다. 가현산의 석양을 바라보면서 가을 추수를 위해 들판에 나가 있는 서방님이 얼마나 힘이 드실까? 언제쯤 돌아오실까? 하는 기다림과 매캐한 연기에도 아랑곳없이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저녁밥을 짓는 부부의 정, 불을 지피면서 오손도손 이야기하는 모녀의 정.

 

그리고 가을걷이에 지친 농부가 심신을 달래며 한 짐의 소꼴을 지게에 지고 “이랴, 이랴” 소 모는 애틋한 농부의 심정을 헤아리는 선조들의 풍성한 마음과 가현산의 넉넉함, 포근함에 안기려는 인간의 본능을 감지하고 김포의 명소를 후세에 남기고자 했던 선인들의 깊은 뜻이 다시 한번 감동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아직까지 뛰어난 경관을 자랑하며 원형 가깝게 보전된 가현산 정상에서 내려오는 발걸음은 웬일인지 무겁게만 느껴졌다.

 

수백년 동안 묵묵히 김포 반도를 지켜준 김포의 명산 중에 명산이 지역 할거주의, 지역 이기주의로 인천의 명소로 탈바꿈한 허전함 때문일 것이다. 김포신문 2005 김포문화원 사무국장 유영근



 

5. 바람에 휘날리는 독도의 갈대꽃

 

 

6. 감바위에 집을 찾아 돌아오는 배돛

 감정동 굿우물에 중봉(重峰)선생을 제향한 우저서원(牛渚書院)이 있고, 이 동네 좌측 벌판을 동쪽으로 흘러 나진(예전의 나진나루터)을 지나서 한강 본류에 이르는 지류가 있다.
이 지류가 한강과 합류하는 강기슭에는 조그마한 비뿌리가 있고, 강안에는 약 7∼8평쯤 되는 넓은 바위가 강심(江心)을 향해 있어서 마치 인공적으로 만든 잔교와 같다. 그것은 나룻배나 어선의 이착에 매우 편리하게 이용되었다. 운양동 감암포 (甘岩浦)에 있는 이 바위를 ‘감바위’, 이 나루터를 ‘감바위 나루터’라 부른다.

 

7. 홍도평에 내려앉는 기러기떼(鴻島坪 落雁)

홍도평은 장릉산의 맑은 공기를 들이쉬면서 한강을 바라본 기름진 넓은 평야를 지칭하는 것으로 그 많은 지명 가운데 우리 생활에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익숙한 지명이 바로 홍도평이 아닌가 싶다.
홍도평은 행정구역상 걸포4리(신향교, 오념) 앞에 있는 넓은 평야로서 한강 제방에 축조되기 전에는 한강물이 걸포리 부근까지 밀려왔고 썰물 때에는 한강 가운데 있는 독도(김포팔경 독도편 참조)와 연결된 넓은 갯벌이 드러나면서 그 갯벌 위에서 자생하는 나무재 식물 윗부분이 붉은색을 띄고 넓은 갯벌 전체가 붉게 보인다고 하여 붉은 홍(紅)자를 따서 紅島라 하였고, 넓은 평야가 생기자 넓은 평(坪)자를 붙여 紅鳥坪이라 하였다.

 

개간사업으로 나무재 식물이 없어지면서 본격적인 벼농사가 시작되었고 주로 벼와 보리를 주식으로 하는 기러기가 몰려들어 허기진 배를 벼이삭으로 채우기 위해 紅島坪에 떼지어 내려앉는 것을 보고 기러기 홍(鴻)자로 바꾸어 지금까지 鴻島坪으로 불려지고 있다. 이런 연유인지 홍도평이라는 단어는 아무리 자주 들어도 정감 있게 들려지고 있는 김포의 향토 용어 중 1순위가 아닌가 싶다.

 

지금은 영농의 기계화와 복합 영농으로 가을 추수가 끝난 다음 바로 비닐하우스가 만들어져 먹이 부족으로 기러기 숫자가 부쩍 감소한 아쉬움도 있지만 아직도 수묵화 같은 홍도평 벌판을 잊지 못하고 가끔씩 찾아드는 기러기떼의 조화를 보고 있노라면 선조들께서 선택한 홍도평의 낙안은 그야말로 팔경 중에 팔경으로 생각해도 과장된 표현이 아닌 성 싶다.

 

우리 선조들이 꾸미고 지켜온 아름다운 내고장 홍도평. 과거 조상의 발자취가 물씬 풍기는 정감 어린 홍도평이라는 지명. 그 넓은 평야에서 양질의 쌀을 생산하여 김포를 전국에 알리고 있는 우리의 홍도평, 생각할수록 우리에게 없어져서는 안될 홍도평의 정서이기에 자꾸만 불안이 밀려온다. 벼 베고 가는 논길에서 지게를 진 농부의 모습이 그립게만 느껴진다. 김포신문 2005 김포문화원 사무국장 유영근

재두루미는 머리와 목은 흰색이고 앞목 아랫부분 3분의 2는 청회색인 대형 두루미로 시베리아·몽골·중국(북동부) 등지에서 번식하고 한국·일본·중국(남동부)에서 겨울을 난다.1945년 이전까지는 1000마리 정도의 무리가 각지에서 겨울을 났지만 최근에는 불과 20∼30마리의 무리도 보기 어렵다.1968년에 천연기념물 제203호로 지정됐다.

 

 

이기섭 환경생태연구소장은 천연기념물 203호로 지정된 재두루미의 경우 몇 년 내에 월동지 자체가 파괴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홍도평은 재두루미의 가장 중요한 먹이처로 60~70%의 먹이를 이곳 논에 의존하고 있지만 이 지역에 국도 우회노선과 경전철, 고속화도로 등 각종 개발이 예정돼 있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한강하구의 허파구실을 하고 있는 논의 반이 이미 상실된 상태고 계속적인 축소가 불가피해 향후 10년 이내 물새의 50%이상 격감이 예상된다”며 “철새 먹이주기의 지속적인 시행, 습지 복원 조성, 농지에 대한 관리협약제 도입 등 적절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제시했다. 미래신문 

 

http://cafe.daum.net/861220/6aQw/5

 

야생조류보호협회중앙회(이사장 윤순영)는 2006년 12월 “각종 개발과 매립 등으로 한강하구에 마지막 남은 홍도평야의 재두루미가 멸종될 위기에 처해 있다”며 “하지만 국내 최대 재두리미 서식처인 이곳에는 어떤 보존 대책도 취해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미 김포시 우회도로가 홍도평야를 두 쪽으로 나누며 가로질렀고 평야 내부에는 작은 농로 포장도로를 중심으로 매립과 소규모 공장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김포에서는 70년대 한강하구 하성면 후평리 일대 재두루미 2천여 마리가 도래했지만 1980년대 한강개발과 간척사업으로 갯벌이 사라지면서 월동지를 잃고 일본 가고시마 이즈미로 자리를 옮기면서 한강에서는 재두루미를 찾아 볼 수 없었다.

1992년 재두루미 7마리가 김포시 북변동 소재 홍도평야에서 발견기 시작해 2006년 현재 80여 마리로 증가하여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다행히 한강 하구 습지는 양쪽에 군사적 목적으로 철책선이 둘러 있어 새들은 최소한의 안식처를 제공받고 있다.

 

 

8. 은은한 세상을 만드는 금정사(봉릉사)의 종소리

 

금정사는  경기도 김포시 풍무리 장릉산(章陵山)에 있는 사찰이다. 장릉의 수호사찰로 알려져 있는 절이지만 확실한 역사를 알 수 있는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절의 창건은 신라 진흥왕(540∼576) 때 창건되어 창건 당시에 고상사라 불리웠다고 전해지나, 구전일 뿐이다.

 

금정사가 지금의 이름으로 불려지게 된것은 1974년 무렵으로, 절의 전신은 창건년대를 알 수 없는 옛 절을 고쳐 지어 1632년(인조 10) 봉릉사(奉陵寺)라고 이름붙인데서 비롯된다. 금정사의 전신인 봉릉사는 인조의 생부 원종의 능침인 장릉과 관련된 것으로, 1632년(인조 10)에 인조가 부친 원종의 묘와 인헌왕후의 능을 양주에서 김포 장릉산으로 이장한 뒤, 인근에 있던 고상사를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지어 봉릉사라 사액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1632년 김포현은 김포군으로 승격되었으며, 당시 장릉을 보호하는 사찰로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절은 능을 관리하는 능침사찰과는 큰 관련이 없이 절 나름대로의 운영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절의 연혁은 전해지지 않으며, 그 뒤 퇴락된 절을 1920년에 유영송스님이 건물을 중수하면서 절의 면모를 새롭게 갖추게 되었다.

 

 

이후 절은 계속 중수되어, 1937년에 성화스님이 가람을 또 한번 중수하였으나, 1950년의  6·25전쟁으로 가람이 전부 소실되었다. 이에 가람이 폐허가 되고 대웅전이 무너진것을 슬퍼하던 고근스님이 1973년에 다시 중수하여 현재 가람의 기틀을 잡게 되었다.

 

이후 1974년 비구니 정념스님이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키면서 현재의 절이름으로 개명하였으며, 산이름 역시 장릉산에서 금정산으로 바꾸었다. 또 스님은 1981년 대웅전을 새로 짓고, 가람의 축대는 물론 요사 증축 등 현재 가람의 기틀을 이룬 대대적인 중수를 시작하여, 비구니 수행도량으로 기틀을 확립하였다. 또한 1995년 9월 15일에 중앙승가대학 신축 이전 기공식 때 당시 금정사 소유로 있던 사찰 부지 5만여평을 중앙승가대학에 기증하여 승가대의 터줏대감으로써 또한 장릉의 수호사찰로서 그 몫을 다하고 있다.

 

현재의 금정사는 1991년에 정념스님의 뒤를 이어 명훈스님이 상주하시며, 비구니 수행 도량으로서 수많은 운수납자들이 기거하며, 수행하고 있으며, 지역주민들의 참선수행은 물론 금강경 독송을 통해 주민들과 함께 하는 도심 속 수행처로서 그 역할을 하고 있다.

http://blog.naver.com/venuslv/10010017272

 

하늘우물은 금정사(金井寺) 대웅전 밑 검은암반에서 솟아올라온다. 이 샘물은 가뭄때에도 양이 줄지않고 일정하게 솟아오른다고 한다. 대웅전 밑에 있던 이 하늘우물은 김포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장릉산을 산책하면서 이 물을 마시기 위해 금정사를 찾아오곤 한다.

 

대웅전 바로 밑이라는 위치가 물을 마시러 오는 사람들에게는 관계가 없겠지만 수행하는 스님들에게는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단다. 그래서 지금은 이 우물을 뚜겅을 만들어 덮어놓았다. 대신에 물을 마시러 온 주민들에게 물을 편하게 마실수 있고 수행하는 스님들에게도 방해가 되지 않도록 금정사(金井寺) 출입구쪽으로 물길을 옮겨놓았다. 불자가 아니더라도 금정사를 찾았을 때 이 하늘우물로 스님이 직접 우려주신 연잎차의 은은한 향을 덤으로 마실 수 있다면 퍼도퍼도 마르지 않고 깊이도 혜량할 수 없는 부처님의 범천을 마시는 것이 아닐까? 미래신문 20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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