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양동(雲陽洞)
본래 김포군 석한면의 지역으로서, 운양산 아래가 되므로 운양굴 또는 운양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폐합에 따라 청수동, 천현리, 발산리를 병합, 운양리라 해서 군내면(김포읍)에 편입됐다.
감바위, 베락바위, 벌말, 알맷산, 떡논, 형제바위, 천현(泉峴, 샘재), 청수동(淸水洞, 청수골), 재촌(齋村), 대촌(大村), 발산(鉢山, 바리미) 등의 옛 지명들이 내려오고 있다. 샘재는 천현마을 뒷산에 모담산이 있는데 그 산 중턱에 천연샘물이 흘러 그리 불리게 됐다.
토기ㆍ철제무기 등 대거 출토…가장 오래된 금제 귀걸이도
한강신도시 택지개발지구 내 유적에 대한 구제발굴조사에서 3세기 무렵 마한 세력의 분묘 군이 대량 발굴돼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한강문화재연구원(원장 신숙정)은 16일 김포시 운양동 발굴 조사 현장에서 원삼국~삼국시대의 분묘(주구토광묘) 18기 외 청동기시대 주거지 3기, 시대미상 석곽3기, 조선시대 분묘 2기 등 총 26기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무덤과 함께 토기류와 철기류, 장신구 등 유물도 출토됐는데, 특히 철검 등 철제무기류가 많았다. 3호 주구부목관묘에서는 철검1점, 철모 4점, 철착 1점, 철촉 1점과 수정 및 유리구슬 100여점 등이 출토됐다. 연구원은 지난 2008년 10월에 실시한 시굴조사에서 삼국시대 주구토광묘 5기 등이 확인되어 발굴조사를 실시하게 되었으며 발굴조사는 2009년 4월부터 시작해 현재 유구 조사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렸다.
▲ 주구부목관묘 유물 출토 상태 / 한강문화재연구원.
원삼국에서 삼국시대 사이의 분묘는 3세기 초반에서 후반대의 것으로, 무덤 주변을 방형 혹은 원형의 도랑이 감싸고 있다. 이 주구묘는 주로 충청ㆍ호남 지역에서 확인됐던 마한의 묘 형태로, 최근 양촌면 학운리와 인천 동양동 등지에서도 발굴된 적이 있다.
연구원측은 "길이 120cm의 철검(鐵劍)과 수정옥(水晶玉) 등으로 볼 때 이 유적의 주구묘는 당시 낙랑 등 주변 지역과의 교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지배계층의 무덤인 것으로 추정된다"며 "특히 철검 등 철제무기류가 많았으며 금제 장신구는 현재까지 국내에서 유사한 사례를 찾을 수 없는 가장 이른 시기의 금제품"이라고 설명했다. 미래신문 2009.9 황인문기자
운양동 한옥마을 박씨네추어탕
운양동 한옥마을은 정부의 ‘경기도 외국인 선진마을’정책에 따라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외국인 관광코스로 개발하기 위해 1983년 운양6통에 28채로 조성됐다. 순수전통한옥 양식으로 지어진 것도 있었고 양옥의 기법을 살린 한옥도 있었는데 이후 몇 년간 KBS 등 방송사에서 추석이나 설날 때 촬영하면서 명소로 소개되기도 했다.
이 한옥마을에 1994년 ‘박씨네추어탕’ 간판을 걸고 추어탕을 팔기 시작한 박일성(朴一聲·53)씨 부부는 장모님의 추어탕 끓이는 비결 덕분에 맛있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손님이 날로 늘어 5년 후쯤엔 매상이 만만치 않은 건실한 업소로 키웠다.
하지만 위기가 닥쳤다. 식당에 원인 모를 큰불이 난 것. 건물이 전소되면서 가족들은 한때 절망했으나 실의를 딛고 다시 식당건물을 지었고 몇 년 후 박 대표는 그간 모은 재산을 털고 은행빚을 얻어 2001년부터 2년간 1000여 평의 대지에 100평, 40평 한옥 두 채와 한 켠에 50평 규모 살림집을 포함, 한옥 세 채를 지었다. 김포시의 최고 명물이자 대한민국에서 가장 훌륭한 추어탕집을 짓기 위한 ‘모험’이었다.
장모님과 아내 곽희숙씨가 결사 반대했지만 박씨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박씨네추어탕이 박일성 개인의 음식점이 아니라 전국에서 찾아올 수 있는 한옥마을 內 김포의 명물로 만들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욕심이랄 수도 있었지만 그 욕심은 돈을 벌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돈이라면 그동안 번 것으로 충분했으며 작은 가게에서 여태 하던 대로만 해도 노후까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박씨는 거의 10년 간 멀리서도 꾸준히 가게를 찾아준 고마운 고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편안하게 좋은 장소에서 음식을 드시게 하고 싶었다. 이 한옥이 100년, 200년을 넘어 김포의 명소로 영원히 남아주길 바랐다.
운양동 314-2 심응사당 향토유적 제4호
조선전기의 무신인 양호공 심응선생을 제향하는 사우이다. 세조6년(1460) 무과에 급제하여 왕실 금위로 발탁되었으며 세조13년(1467)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절도사 허종의 휘하에 배속되어 난을 평정하는 큰 공을 세워 적기공신으로 책록되고 풍산부원군에 봉해졌다.
공이 사망한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양호이며 묘소는 운양동에 있다. 사당은 조선말기에 건립된 목조 건물로서 홑처마에 맞배지붕 건물이다. 축조 당시부터 지금까지 개축(改築)의 흔적이 없으며 규모는 정면 3.9m, 측면 3.3m로서 1986년 3월 3일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되었다.
운양동 831번지 용화사 전통사찰 제64호
제방도로를 타고 강화방면으로 가다가 누산리 평야가 시작되는 지점의 좌측, 운양산에 자리잡고 있는 전통사찰로 한강이 내려다보이고 그 너머로 일산 신도시 일대가 한눈에 조망되는 아름다운 곳이다.
절의 창건연대는 대략 1405년(태종5)으로, 뱃사공인 정도명이 조공을 배에 가득 싣고 오다가 간조로 인하여 운양산 앞에 배를 대게 되었는데 그날 밤, 부처가 꿈에 나타나 대어놓은 배 밑쪽에 석불이 있으니 잘 모시라하여 이를 모시고 자신도 삭발수도하게 되었다는 창건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비교적 높은 석축 위에 동서로 50m, 남북으로 30m에 이르는 대지 위에 용화전이 자리하고 있으며 용화전 서쪽에는 약간 앞쪽으로 범종각이 자리하고, 용화전 앞의 마당 한가운데 화강암으로 만든 5층탑이 있으며, 그 좌우에 8각 석등이 하나씩 세워져 있다.
용화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의 단층 목조건물로서 팔작지붕으로 된 기와집이다. 주간포는 각 2개씩 배치되어 있고 창호는 4분합의 띠살문이다. 5층석탑은 높이 약 5m에 달하며, 회백색 화강암 재질로써 옥개받침은 5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용화전의 상단에 모셔져 있는 석불은 용화사의 창건설화에 나오는 미륵석불로 조선초기 불상양식을 지니고 있으며, 2004년 8월 김포시 향토유적 제7호로 지정되었다.
운양포의 잔잔한 가을강물(雲陽浦 秋沈)
운양포가 있어 운양동로 불리고 있는 이 마을은 한강 제방과 48번국도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한강밀물시 봉성산 앞, 누산리 벌판, 운양벌판 그리고 현 고창초등학교 앞 부분까지 밀려들어 수정같이 맑은 잔잔한 강물이 발갛게 반짝이는 운치가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고 한다.
운양포는 지금의 제촌과 대촌부락에 위치한 운양산 바로 아랫마을(절말)에 있었던 나루터로 서울 마포나루와 파주 법곶리를 왕래하던 어선이 잠시 정박하는 소규모 기항지로 사용되었던 것이나 지금은 존재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70세이상의 어른들은 아직도 운양나루 또는 운양포라고 부르는 것을 조사를 통하여 알 수 있었다.
용화사에서 은은하게 들려오는 목탁소리를 들으며 우주와 한없는 대화를 통한 인간의 고뇌와 번뇌를 잊고 운양산 정상에서 바라본 운양벌판의 가을정경은 저녁노을에 반사되어 너울거리는 황금물결과 따뜻한 남쪽 하늘로 가기 위하여 힘찬 날개짓하는 기러기떼의 조화를 보며 우리선인들은 운양포 추심을 김포팔경의 하나로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말끔히 확장 단장된 48번국도 누산 벌판을 달리며 도로가 생기기 전과 한강제방이 축조되기 전 이곳 넓은 평야 좌우로 맑은 강물이 펼쳐져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낭만적인 정경이 그려진다. 넓은 호수를 연상하게 하는 운양포가 황금 벌판으로 변할 것을 미리 예견하고 운치 그윽한 운양포의 잔잔한 가을 강물을 시로 표현하며 후손에게 전해 주려고 했던 선인들의 사려 깊은 심정도 헤아려 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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