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성리 가는 길은 지방도와 농로가 혼재되어 있어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몇 번을 물어 물어 망성리에 도착했으나 민애왕릉과 희강왕릉의 위치를 시원하게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망성리마을회관과 율동마을 사이의 능선에 위치하고 있다.
산으로 약 200m쯤 올라가니 고갯마루에 희강왕릉 250m, 민애왕릉 150m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민애왕릉 가는 길은 주위에 소나무가 심어져 있어 왕릉임을 실감케 한다. 이들 왕릉은 다른 왕릉과 달리 산 속에 있어 좀 특이하다. 통일신라 하대로 내려갈수록 왕릉이 산 속으로 들어간 것 같다.
거북이 모양의 민애왕릉
민애왕릉은 지금까지 본 왕릉과는 다른 모습이다. 원형봉토분에 3단의 둘레석이 있고 그 위에 1단의 상대석이 있다. 그리고 이들 둘레석을 받치는 육각형의 지주석이 있다. 중국의 국내성(집안)에 있는 장군총의 지주석 생각이 난다. 특이한 형태이다. 위에서 보니 발이 여러 개 달린 거북이 바다를 헤엄쳐가는 것 같다. 민애왕릉의 높이는 3.8m이고 지름은 12.6m이다.
민애왕릉은 1984년 수리를 하면서 일부가 발굴되었는데, 안에서 원화10년명(元和十年銘) 뼈단지(骨壺)가 발견되었다. 원화 10년이라면 815년으로 당시 신라왕은 헌덕왕이었다. 그렇다면 이 능의 주인공이 헌덕왕 앞의 소성왕이나 애장왕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원성왕(785~798) 이후 신라왕의 계승 관계가 하도 복잡해 쉽게 단언하긴 어렵다.
38대 원성왕
(785-798)
↓ ↓ ↘
인겸 의영 예영
↙ ↓ ↓ ↘ ↙ ↘
39대 소성왕, 41대 헌덕왕, 42대 흥덕왕, 충공 헌정 균정
↓ ↓ ↓ ↓
40대 애장왕 44대 민애왕 43대 희강왕 45대 신무왕
(838-839) (836-838) ↓
46대 문성왕
<삼국사기>에 따르면 민애왕은 김씨로 이름은 명(明)이다. 원성왕의 증손자로 대아찬을 지낸 충공(忠恭)의 아들이다. 상대등으로 있으면서 희강왕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 민애왕의 손에 죽은 희강왕 역시 원성왕의 증손자로 42대 흥덕왕이 죽은 후 후사가 없자 숙부인 균정과 왕권 경쟁을 벌여 왕이 되었다. 이러한 갈등을 통해 왕이 되었기 때문인지 이후 상당 기간 왕권투쟁이 계속된다.
당시 희강왕이 왕권을 차지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사람이 시중이었던 김명이었으며, 균정을 왕으로 밀었던 사람이 김우징과 김양이다. 왕권 경쟁에서 진 김우징 일파는 청해진으로 도망간다.
그러나 곧 김명이 상대등이 되어 실권을 장악하자 희강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이로 인해 민심이 기울었고, 기회를 엿보던 김우징 일파는 이듬해 윤 정월 서라벌로 들어가 왕권을 탈취하였다. 이렇게 해서 즉위한 사람이 신무왕이다. 왕권 다툼으로 인해 이들 희강왕, 민애왕, 신무왕은 아주 단명으로 끝났다.
희강왕릉
희강왕릉은 고갯마루에서 왼쪽 능선을 타고 250m를 가야 나온다. 능선을 따라 정상에 오른 후 그곳을 지나 약간 내려가면 바로 찾을 수 있다. 희강왕릉은 신라왕릉 중 규모가 가장 작은 편인데, 높이가 2.8m, 둘레가 14m이다. 보통 무덤들에 비해 규모가 조금 클 뿐 별다른 특징이 없다. 묘표석과 안내판이 없다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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