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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인천·섬

강화 강화읍성 관청리 용흥궁 우리옥

by 구석구석 2008.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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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길, 조선의 길 따라 엣 시대로 거슬러 오르기

 

한강, 임진강, 예성강이 빚어놓은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이 강화(江華)라면 그 꽃의 중심부가 바로 강화읍이다. 고려시대 원나라와 전쟁을 치르는 39년간 개성을 대신한 임시 수도였으며, 그 도성이 있었던 곳이기에 강화 사람들의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데, 강화를 따로 ‘강도(江都)’라 부르는 것은 한때 일국의 수도요, 도성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게다가 ‘강화 도령’으로 불리는 조선 25대 임금 철종을 배출했으며, 왕위에 오르기 전 거처였던 용흥궁이 읍내에 있으니 그게 괜한 자부심만은 아닌 듯하다. 강화읍을 둘러싸고 있는 산성과 동서남북 네 개의 문, 고려궁지, 용흥궁 등을 볼 수 있는 읍내는 따라서 강화 걷기 여행의 첫 번째 코스이자 수도권 답사 코스 1번지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다.

 

강화향교

차에서 내리면 그때부터 걷기 여행이 시작된다. 일단 강화도 구석구석을 연결하는 지방 버스편과 돌아가는 버스 시간을 알아두고 터미널 구석에 있는 관광안내소에서 무료로 나눠주는 지도를 한 장 챙긴다. 관광안내도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작게 접히는 ‘강화길라잡이’ 지도가 더 상세하며 풍부한 사진과 내용을 담고 있어서 유익하다.

 

강화읍 동쪽 외곽에 있는 강화터미널을 나서자마자 나지막하게 솟아 있는 남산이 반긴다. 터미널 앞 큰 길을 건너다보면 시선을 잡아끄는 곳은 갈대 무성한 습지. 20~30년 사이, 새롭게 길이 나고 시내에 있던 터미널이 이곳으로 옮겨오는 큰 변화에도 불구하고 갈대밭은 변함없이 길손을 반긴다. 이곳은 해발 222.5m인 남산이나 고려시대 사람들이 ‘송악’이라 부른 북산(140m)을 사진에 담기에 알맞다.

 

갈대밭을 지나 허허벌판으로 난 길은 강화 남문로로 이어진다. 눈 밝은 이라면 이 길이 바로 강화 사람들이 자동차 다니는 번잡한 길을 피해 걸어서 버스터미널로 오가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단박에 알 수 있다. 갈대밭을 지날 때부터 읍내 쪽 건물 가운데서 시종 시선을 사로잡는 성곽 모양의 커다란 한옥이 바로 강화 토산품판매센터(38)다. 화문석 전문 매장이 모여 있으며, 2층에 강화문화원이 있다.

 

강화토산품센터

 

강화 토산품인 화문석 등을 계승·발전시킬 목적으로 1985년 7월 문을 열었다. 강화읍 남산리에 위치한다. 옛 성문을 재현한 웅장한 2층 건물로 넓은 주차장과 52개 점포가 있으며, 화문석 외에 인삼 제품, 강화 약쑥 및 가공품 등도 판매한다. 2층에는 강화문화원이 있다. 매월 2일과 7일(5일장) 강화 장날 새벽에는 강화 토산품센터 주차장에서 소비자와 생산자 간의 화문석 직거래 장이 선다. (032)934-6156

 

당당하게 ‘강도남문(江都南門)’(2)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안파루(晏波樓) 천장에는 봉황 두 마리가 화려한 단청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좌청룡, 우백호, 북현무, 남주작 등 동서남북을 지키는 사신(四神) 가운데 바로 남쪽의 수호신 ‘주작(朱雀)’을 의미하는 그림이다.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다른 세 개의 문루에서 사신도(四神圖)의 나머지 셋 청룡과 백호, 현무를 만나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건다면 걷기 여행이 한층 흥미를 더할 것이다.

 

남문을 중심으로 바깥에서 보면 왼쪽 산등성이로 성벽이 있으며, 등산로와 더불어 남산 꼭대기까지 이어진다. 오른쪽 성벽은 남문로가 나 있어 잠시 끊기는데, 100여m 가량 복원해 놓았다. 원래의 성벽은 견자산(30) 쪽으로 이어지지만 현재 48번 국도와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서면서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강화산성 네 개의 문이 가진 공통적인 특징은 문화재로서 동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강화 사람들의 생활공간과 직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어느 문이든 조선시대와 마찬가지로 길과 이어져 있어서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으며, 심지어 자전거나 오토바이가 손쉽게 지날 수 있도록 문턱에 철판까지 깔아놓은 걸 볼 수 있다. 서울로 치면 남대문이나 동대문으로 사람들이 드나든다는 이야기인데, 아스팔트 길 한복판에 섬처럼 떨어져 있어 외로운 서울의 문과 그렇지 않은 강화의 문은 좋은 비교가 된다.

 

일단 남문으로 들어서면 드디어 ‘강도(江都)’에 입성한 것이다. 자동차 두 대가 간신히 비껴갈 만한 남문 안길이 반긴다. 1969년 강화대교가 놓이고, 강화 읍내를 동서로 관통하는 48번 국도가 생기기 전까지는 바로 이 길이 서문까지 이어지는 ‘대로(大路)’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오래된 도시가 그렇듯이 남문 안길 주변은 새롭게 지은 건물 사이로 낡고 무너져가는 집들이 눈에 띄는 쇠락한 풍경으로 다가온다.

 

신문리 남문 안길에는 대장간(29)이며 김참판댁(3), 동진직물터(4), 목공소(31), 조양방직(7)이 있었으며, 100년 된 양조장(5)이라든가 60년 가까이 밥집을 하는 ‘우리옥’, 동진이발소(33), 솔터우물(6) 같은 곳이 바로 이 길가 골목에 숨어 있다. 현대식 건물로 지은 중앙시장 뒤편 공영주차장 일대에서는 옛 재래시장에서 볼 수 있는 허름한 ‘장옥(場屋)’ 몇 채(11)가 남아 있어 흥청거렸던 장터 풍경을 짐작케 한다. 남문 안길 골목으로 접어들면 그야말로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70~80년 전의 강화읍내로 되돌아간 듯한 풍경에 둘러싸인다. 또는 그보다 더 아득한 옛날로…….(괄호 안의 숫자로 표기한 위치는 별책부록 강화지도 참조)

 

남문 안길 답사 포인트는 ‘뒷골목 뒤지기’. 딱 사람 하나 지나 다닐 만한 골목길에는 이미 대도시에서는 사라진 지 오래인 시커먼 나무 전신주가 서 있고, 간혹 가슴 높이 정도의 오래된 돌담이 반긴다. 바로 그 일대가 강화읍내 사람들의 전통적인 주택가인 셈이다.

 

함석 담장으로 가려진 공장 건물은 벌써 오래전에 문을 닫은 듯, 마당에는 온통 잡초만 무성하다. 담장을 따라서 골목길이 이어지며, 사람 둘이 마주치면 어깨가 닿을 듯 그 좁은 길은 공장 건물 일부를 개조해서 술집으로 쓰고 있는 모퉁이를 돌아서면 이내 끝나고 만다. 그렇게 미로처럼 골목길이 이리저리 나 있는 중앙시장 A동(9) 주변으로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듯한 이층 목조 건물도 섞여 있어서 눈길을 끈다. 신문리 사거리에서 48번 국도 건너 북쪽으로는 관청리. 중앙시장 B동(10) 뒤편으로 복원 예정인 진무영(14), 강화 3.1독립만세기념비(15) 등이 고려궁지 올라가는 길 왼쪽에 나란히 있다.

 

강화 읍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

 

남문에서 강화군청을 지나 동문(19)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마루에서 오른쪽 갈림길이 견자산 올라가는 길. 고려 고종이 이 산 꼭대기에 올라가 원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아들을 그리워했다고 하여 볼 견(見)자, 아들 자(子)자를 써서 견자산(見子山)인데 강화산성이 바로 이 견자산을 지나 동문으로 내려섰다가 북산으로 이어진다. 원래 일제강점기에 신사가 있던 견자산 정상에는 한국전쟁 때 강화도 일대에서 숨진 호국 영령을 기리는 현충탑(30)을 세웠으며, 산책로와 주차장도 있어 손쉽게 둘러볼 수 있다.

 

 해발 60m 남짓한 견자산 꼭대기에서는 남산으로 이어지는 성벽과 강화읍내 전체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그러나 나뭇가지에 가려서 정작 사진 찍기에는 불편하다. 읍내 전경을 찍기 좋은 곳은 여기보다 조금 내려와서 갈지자로 길이 꺾이는 지점이다. 여기에서는 특히 성공회 강화성당(17)이라든가 동문을 중심으로 강화중학교와 북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성벽은 물론, 월곶 연미정으로 이어지는 길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지난 2003년에 복원된 동문의 문루는 한양 쪽을 향하고 있다고 하여 ‘망한루(望漢樓)’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동문을 거치는 길 역시 동네 사람들의 도보 통행로이자 강화중학교 학생들의 통학로가 된다. 여기에서는 남문 안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큰 길을 버리고 뒷골목으로 접어들어야 제대로 된 답사를 즐길 수 있다. 성공회 성당까지 이어지는 야트막한 언덕 길을 올라서면서 비교적 작은 돌로 쌓은 성벽을 볼 수 있다면 ‘한 건’ 하는 셈이다. 일반 주택의 담장이거나 축대로도 사용되고 있는 이 성벽은 여염집과 구분하기 위한 고려궁의 담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강화읍내에서 가장 높은 언덕을 송두리째 차지하고 있는 성공회 성당은 심지어 강화도령이 살았던 용흥궁(18)도 내려다보고 있다. 고려궁을 제외하고는 강화 제일의 명당자리인 셈이다. 성공회 성당은 특이하게도 태극 문양을 응용한 검은색 십자가 장식이 선명한 솟을 대문을 계단 위에 높게 세워두고 있다. 그 덕분에 일반 한옥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위엄과 격식을 갖추고 있으며, 답사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흔히 철종의 ‘잠저(暫邸)’로 불리는 용흥궁은 전혀 ‘궁(宮)’ 답지 않게 술집과 음식점으로 이어지는 비좁은 뒷골목에 숨어 있다. 왕위에 오르기 전 19세까지 살던 곳이기에 일반 주택과 구별해서 ‘궁’ 대접을 해줄 뿐이지 전통적인 조선 사대부의 집에 비해서 격이 좀 떨어지는 편이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북쪽 구석에 철종 잠저였음을 알리는 비석과 비각이 담장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가족이 모두 섬으로 유배되어서 농사 짓고 나무 하며 자유롭게 살던 떠꺼머리 총각, 강화 도령 ‘원범’이 갑작스럽게 왕위에 오른 것은 1849년. 후손 없이 죽은 헌종의 뒤를 이은 철종은 14년간 조선의 25대 왕으로 살다가 1863년 12월 33세의 나이에 병사하고 말았다. 아마 왕위에 오르지 않았더라면 강화 도령은 그렇게 젊은 나이에 죽지 않았을 터. 몸은 비록 한양의 구중궁궐에 있었지만 마음은 늘 자유롭게 뛰놀던 강화의 산천을 그리워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유배지에서 탄생된 운명의 대왕


강화읍 관청리에는 강화도령(철종)이 여려서 살았던 옛 집인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호 용흥궁(龍興宮)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조선조 25대 임금인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민간인 신분으로 살았던 집으로. 용흥궁은 원래 초가(草家)3간의 움집이었던 것을 1853년(철종 4) 강화유수 정기세가 기와집으로 확대 개축하였고, 1903년(광무 7년)에 청안군 이재순이 중건하고 보수를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대문 위쪽에는 용흥궁 현판이 걸려있다 

 

철종은 본명이 이원범(元範)으로 1831년(순조 31) 전계군과 부인 염씨의 셋째 아들로 서울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사도세자와 그 궁녀 사이의 소생인 은언군이다. 정조대왕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은 소년시절부터 할아버지 영조의 미움을 받아 제주에 유배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고, 아버지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도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원범이 11살이 되는 해에 죽었다.


이러한 집안의 어려움으로 원범은 종실(宗室)임에도 그 처지가 매우 어려워졌고. 급기야는 가족과 함께 강화에 정착, 농사꾼으로 곤궁하고 비천한 유배의 삶을 살았다.


원범이 18세이던 1849년, 순조의 비인 순원 왕후는 24대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조대비의 척족인 풍양 조씨 일파가 왕위 계승을 할까 염려 재빨리 손을 썼다. 김씨 척족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왕가법도를 무시하면서 헌종의 7촌뻘인 강화도령 원범을 지목 어린 나이에 돌연 왕위를 맡긴다.

 

초가를 복원한 내전 전경 


학문과는 거리가 먼 어린 농부 원범의 나이는 19세로 급히 명을 받아 봉영의식과 관례를 행한 뒤 1850년 6월 9일 인정문에서 즉위하게 되니, 그가 바로 조선조 25대(1850∼1863) 철종이었다.


철종이 즉위에 오르자 나이가 어리고 학문을 연마한 바 없다는 이유로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한다. 서둘러 친정 조카뻘인 김문근의 딸을 철종의 비로 책봉하니 이때부터 철종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희생물이 되어갔다.


철종은 자신의 뜻을 마음대로 펼 수 없는 불우한 왕이었다. 빈민 구제책이나 이재민 구휼에 남다른 열정을 보이기도 하지만, 짧은 학문과 얕은 경륜으로 또 철종 자신의 자격지심이 겹쳐 막강한 세도정권을 혁파할 개혁의 방도를 찾지 못한 채, 안동 김씨의 강고한 세도 앞에 그 뜻을 접어야 했다.

 

마당 한쪽에 있는 우물과 장독대 


자연히 국사를 등한히 하고 술과 여색에 빠지게 되자 몸이 급속도로 쇠약해져서 젊은 나이인 1863년 12월 8일 재위 14년 만에 3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혈육으로는 영혜옹주가 하나 있어 금릉위 박영효에게 출가시켰다. 철종은 죽은 뒤 경기도 고양의 희릉 오른 편에 예장되었는데 능호는 예능이다.
철종이 성장기를 보낸 용흥궁은 현재건물이 내전 1동, 외전 1동, "ㄱ"자형의 별전 1동, 철종의 잠저였음을 기록한 잠저구기비각(暫邸舊基碑閣) 1동이 서있다. 창호지도 떨어져 바람에 나풀거리고 어느 옛날에 단청했는지, 기둥이며 서까래가 썩어 가는 집 건물 마당 안으로는 마른 우물이 옛 자태를 잃어버렸고, 늙은 호박처럼 흐늘어진 고목 등걸 사이로 새로운 가지와 잎만이 돋아날 뿐이다.

 

뒤 곁에 있는 철종의 잠저구기비각 


용흥궁은 엄밀히 따지면 생가는 아니다. 건물자체가 웅장하고 화려하다거나 문화재로서의 높은 가치나 그의 자취를 느껴볼 변변한 유물도 없다. 오히려 이곳에서는 곤궁하게 살던 철종의 처지를 헤아려 보며, 시간의 축적 속에 묻어 나오는 역사의 의미를 짚어볼 수 있다.

서울의 몇몇 유력 가문으로 권력의 핵심이 옮겨 가 있던 것이 세도정치의 권력구조였다. 곤궁하기 그지없던 "강화도령"을 불러 들여 왕으로 삼은 당시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의 권력을 재삼 되새겨볼 뿐이다.

 [한지호 / 자동차여행가]

 

 

700여 년 만에 드러난 고려 궁궐의 자취

   

강화에서 2008년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교동연륙교 공사의 시작과 더불어 용흥궁 공원과 주차장이 생긴 일이다. 옛 심도직물 공장 터에 들어선 이 널찍한 주차장 덕분에 뒷골목에 숨어 있던 용흥궁 뒤쪽이 훤하게 드러났으며, 언덕 위 성공회 성당이 자태를 더욱 뽐낼 수 있게 되었다. 용흥궁 주차장 입구에 있는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가 함락되자 남문루에 화약을 쌓아놓고 자폭한 ‘선원 김상용 순절비’(16), 바로 길 건너편에는 강화 3.1독립만세기념비(15)가 강화 사람들의 의로운 기개와 험난했던 발자취를 짐작케 한다. 순절비각 바로 뒤에는 심도직물 공장 부지임을 알리는 낡은 굴뚝과 기념비가 눈길을 끈다.

 

승평문

고려궁지(23)까지 이어지는 길은 남문에서 서문으로 이어지는 길과 더불어 강화읍의 옛길로 꼽힌다. 고려궁 아래쪽 일대는 궁궐 부속 건물이 가득 들어서 있던 곳이지만 지금은 강화초등학교와 도서관과 상점, 주택 등이 들어서 있다. 고려궁은 이 길 끝 ‘송악산’ 자락에 있었으나 가 보면 정작 있어야 할 고려궁은 없고, 넓은 터에 조선시대의 강화 유수부 동헌과 이방청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옛 고려시대의 궁궐은 그저 이름으로나 짐작해왔는데, 최근 외규장각 뒤쪽에서 벌인 발굴 작업 결과 고려 궁궐의 유구가 나오는 일대 사건이 벌어졌다.

 

사실 그 동안 수많은 사람이 고려궁지를 다녀갔지만 정작 고려시대의 흔적은 높다란 계단 위에 서 있는 문의 편액 ‘승평문’ 뿐이었다. 개성 송악산 기슭에 지은 고려의 궁궐, 만월대가 여섯 개의 문을 거쳐 정궁에 이르렀으며, 승평문은 바로 두 번째 문에 해당한다. 몽골의 침입을 피해서 강화로 천도한 고려 사람들은 강화읍 북쪽에 있는 북산을 개성에 있는 것과 똑같은 송악산이라 명명했으며, 궁궐 역시 만월대와 비슷한 구조로 축조했을 터. 그 동안 몇 차례에 걸친 발굴 작업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번 고려궁지에서 성과를 거둔 발굴 작업은 700여 년 전 찬란했던 고려 궁궐의 일부나마 햇빛을 보게 만들었으니 천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승평문을 나서 계단을 내려서면 벚나무 길(36)이 강화산성 북문(25)으로 이어지며 나그네의 걸음을 재촉한다. 북문은 강화산성의 나머지 세 개 문과는 달리 원래 문루가 없는 암문(暗門)이었다. 그러던 것을 정조 7년(1783년)에 문루를 세우고 ‘진송루(鎭松樓)’라는 편액을 달았다. 현재의 문루는 박정희 정권 시절 전적지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1977년에 복원한 것. 따라서 진송루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느 문과는 달리 아치형의 홍예가 아니라 암문 원래의 사각형 구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현무가 지키고 있어야 할 천장은 목재가 아니라 보통의 암문처럼 장대석으로 마감해 놓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자체가 1783년 당시의 복원인지는 확실치 않다.

 

멀리 북녘 땅과 송해면 신당리 들녘이 보이는 북문을 나서 3~4분이면 오읍약수터(27)에 이른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대남방송이 쩡쩡 울리던 이곳은 이제 적접 지역이라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한가롭기 그지없다. 약수터 바로 옆에 있는 양봉 농가나 산책 삼아서 물을 받으러 온 이들이 가볍게 맨손 체조로 몸을 푸는 풍경은 여느 도시의 체육공원이나 마찬가지다. 물맛 좋기로 소문난 오읍약수터 길은 고려궁지에서 북문에 이르는 길과 마찬가지로 4월이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터널을 이룬다. 

 

 

연무당 옛터가 일러주는 역사의 교훈

 

북문 주차장에서는 강화향교(26)로 질러서 내려가는 샛길이 있다. 이 길을 잘 찾아 내려가야만 올라왔던 아스팔트길을 되짚어 내려가서 읍내를 통하지 않고도 서문(13)으로 내려설 수 있다. 서문으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길은 주차장 화장실 뒤쪽으로 있다. 정부시설물로 이어지는 아스팔트길 아래쪽으로 내려서면 걷기 편한 소나무 숲길로 이어진다.

 

강화의 서쪽을 지키는 서문은 ‘첨화루(瞻華樓)’라는 문루를 얹고 있으며, 천장에는 소나무와 더불어 호랑이 한 마리가 도사리고 앉은 그림이 눈길을 끈다. 사신도 중에서 우백호에 해당하는 것이니 제대로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서문 안길과 더불어 강화 사람들이 예나 다름없이 드나드는 서문은 강화산성 네 개의 문 가운데 가장 화려한 야경을 자랑한다.

 

 

서문 바로 옆으로는 남문과 마찬가지로 큰길이 지나면서 성벽이 끊어졌고, 연무당 옛터(12)가 건너편 길가에 있다. 복원된 석수문(34)을 포함한 성벽은 이 연무당 옛터 서쪽을 감싸고 남산으로 이어지다가 말았다. 강화군에서는 둘레 7.122km에 이르는 강화산성을 복원할 계획을 세우고 이미 2007년에 지표조사까지 마쳤다. 현재 남산 꼭대기에 있는 남장대 터와 봉수대 터를 발굴 중이고, 북산에 있는 북장대 역시 발굴해 복원한다는 계획이다.

 

연무당 옛터는 조선시대 군사들의 무술훈련장인 연무당 건물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비석을 세워놓았다. 그러나 사실 이곳 연무당은 1875년 일본이 운양호 사건을 일으킨 후 그 이듬해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한 장소이니 그들의 소위 ‘포함외교’로 말미암아 불평등조약이 맺어진 치욕적인 역사의 현장인 셈이다. 어쨌거나 연무당은 없어졌지만 역사의 교훈은 옛터와 더불어 그 자리에 뚜렷이 남아 후세 사람들을 일깨우고 있다. 1977년 강화전적지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세워진 비문은 노산 이은상, 글씨는 서예가 일중 김충현의 작품이다.

[월간산]

 

강화읍성코스 8.7km, 4시간
강화터미널~남문~현충탑~동문~용흥궁~김상용순절비~성공회 강화성당~고려궁지~북문~강화향교~서문~연무당 옛터~석수문~중앙시장~풍물시장~강화인삼센터~강화터미널

 

강화터미널-남문 935m, 14분
남문~토산품센터(강화문화원)~수협사거리~강화군청~현충탑 650m, 10분
현충탑~동문 600m, 10분
동문~용흥궁 400m, 6분
용흥궁~김상용순절비~성공회 강화성당 300m, 5분
성공회 강화성당~고려궁지, 600m, 10분
고려궁지~북문 680m, 11분
북문~강화향교~서문~연무당 옛터~석수문, 2km, 30분
석수문~신문사거리~중앙시장~풍물시장 1.7km 26분
풍물시장~알미골삼거리~강화수삼센터~750m, 11

 

 

50년 전통의 백반집 - 우리옥 

 

어느 지역이나 비슷하지만 군청 가까운 곳에는 오랜 전통의 점심밥 집이 있다. 강화읍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그 집이 바로 ‘우리옥’(032-932-2427)이다. 1953년 봄에 개점한 집이니 만 50년을 넘겼다. 예절 바른 지금의 업주 방영순(52)씨가 고모로부터 물려받은 업소다. 시장 골목 안에 납짝 주저앉은 집이지만, 50년 세월 강화를 거쳐 간 많은 인사들이 이 집 신세를 졌겠다.

 

한식백반(4,000원)이 단연 인기인데, 콩비지가 올라오고, 순무로 담근 순무김치가 필수적으로 따라 나온다. 허준의 동의보감에도 나오는 강화의 특산품 강화순무는 오장에 이로우며 종기를 치료하고 눈을 밝게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 밝혀진 바로는 칼슘과 비타민C가 많이 함유되어 높은 영양의 건강식품으로 입증되고 있다. 강화순무와 유사한 식물들이 전국의 몇몇 지역에서 재배는 되고 있으나 강화산처럼 맛이 독특하고 시원하며 좋은 향을 지닌 순무는 없다고 한다. 강화순무요리 중 특별한 별미로는 강화산 밴댕이젓이나 새우젓으로 담은 순무김치가 일품이다.

 

대구찌개(5,000원), 빙어찌개(10,000원)도 차려 낸다. 워낙 유명한 집인데도 비슷한 옥호를 건 집이 생겨나서 손님들이 엉뚱한 집을 찾아가기도 한다고 했다. ‘우리옥’으로 상표등록을 해놓았다. 정확한 위치는 군청 건너편 중앙시장 A동 뒷편 골목 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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