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동 387-1 반월성
경주 시내에서 불국사나 외동 방면 시내버스를 타고 국립경주박물관 앞에서 하차한 후 시내쪽으로 되돌아 50m정도 걸어나오면 왼쪽 방향에 능선이 보이는데 이 곳이 바로 반월성이다. 경주 시내에서 7번 국도를 타고 불국사 방면(울산 방면)으로 2km 가량 가면 오른쪽 방향에 보인다.
서기 101년 파사왕 22년에 신라의 왕성으로 축성되어 신라가 망하는 서기 935년까지 궁궐이 있었던 곳이다. 지형이 초승달처럼 생겼다하여 '신월성(新月城)' 또는 '월성(城)'이라 불렸으며, 임금이 사는 성이라 하여 '재성(在城)'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시대부터 반월성(半月城)이라 불려 오늘에 이른다.
월성의 성은 돌과 흙을 섞어 싼 토석축성인데 길이가 1,841m이며, 성내 면적이 193,585제곱미터이다. 동에는 동궁인 임해전과 안압지와 연결되고 북으로는 첨성대가 있으며 남에는 남천의 시내가 하나의 방위선 역할도 하게 되어 있다. 기록에는 문으로 남문, 귀정문, 북문, 인화문, 현덕문, 무평문, 존례문과 임해문이 있었으며 누각으로 월상루, 망덕루, 명학루, 고루가, 전으로는 조원전, 숭례전, 평의전, 남당, 월정당, 우사록관, 좌사록관, 영각성이 있었으며 궁으로는 내성, 영명궁, 월지궁, 영창궁, 동궁, 내황전 등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월성지하에는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부터 통일신라시대의 토기, 기와, 건물초석 등이 깔려 있다.
성을 쌓기 전에는 호공(瓠公)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석탈해왕(昔脫解王)이 어렸을 때 꾀를 내어 이곳을 차지했다고 한다. 남해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석탈해왕을 사위로 삼았으며, 신라 제4대 왕이 되었다는 전설도 전한다. 그 후 파사왕(婆娑王) 22년(101)에 여기에 성을 쌓고 옮긴 다음부터 역대 왕이 이 월성에 살게 되었다.
인왕동 449-1 석빙고 보물 제66호
일종의 천연냉장고로, 신라 지증왕 6년(505년)에 얼음을 저장했다는 기록에 의해 신라 때의 빙고로 알아왔으나, 현재의 석빙고는 조선 영조 14년(1738년)에 축조한것으로 밝혀졌다. 이 빙고는 입구가 월성 안쪽으로 나 있으며, 계단을 통해 내부로 들어가면 성의 경사를 따라 안이 깊어지며, 내부는 길이 12.27m, 폭 5.76m, 높이 5.21m 규모로 모두 가공된 석재로 되어 있고, 굴은 다섯개의 아치형 기둥 사이에 장대석이 걸쳐 있다. 이 장대석을 친 위치 세 군데에 외부와 통하는 환기공이 뚫려 있다. 바닥 중앙에는 배수로가 있어 경사를 따라 성 밖으로 흘러나가게 되어있고, 외부는 장대석위에 흙을 덮어 환기공만이 노출되어 있다. 보물 제66호로 지정되어 있다.
교촌 한옥마을
신라시대 왕궁 터인 경주 반월성과 경주국립박물관 사이로 난 들판길을 따라 북쪽으로 2㎞쯤 내려가면 고풍스러운 기와집 10여 채가 나타난다. 교동 한옥마을이다. 3300㎡ 남짓한 광장을 중심으로 안쪽엔 조선 선조 때부터 1950년 무렵까지 12대에 걸쳐 360여 년간 만석꾼 재산을 유지했다는 경주 최부자의 종택(宗宅)이 나온다. 입구 쪽엔 ‘최부자 가정식’이란 플래카드 아래 한식집 ‘요석궁(瑤石宮)’이란 간판이 서 있다.
중요민속자료 제27호인 경주최씨고택과 중요무형문화재 제86-다호인 경주교동법주가 자리잡고 있는 교촌마을은 12대 동안 만석지기 재산을 지켰고 학문에도 힘써 9대에 걸쳐 진사(進士)를 배출한 경주 최부자의 얼이 서린 곳이다.
특히 최부자집에서 가훈처럼 내려온 원칙인 “벼슬은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말라,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매입하지 말라, 최씨 가문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이 곳에는 원효대사와의 사이에 설총을 낳은 신라 요석공주가 살던 요석궁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전해지며, 부근에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탄생설화가 서려 있는 계림과 내물왕릉, 경주향교, 김유신 장군이 살았던 재매정이 있다.
요석궁은 신라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가 거처하면서 원효대사와 사랑을 나눠 설총을 낳은 곳으로 전해진다. 그 터에 최부자가 집을 지어 살아온 인연으로 음식점 명칭으로 쓰고 있다. 최부자는 ‘사방 100리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이 360년이 넘도록 부(富)를 지킬 수 있었던 비결로 알려져 있다. 마지막 최부자 준(1884~1970)씨는 전 재산을 대구대(현재의 영남대) 설립 기금으로 내놓으면서 최부자 12대의 막을 내렸다.
준씨의 동생인 윤씨의 손자 며느리 김숙(62)씨는 “시댁이 대대로 누렸던 유일한 호강이 바둑과 함께 음식이었다”며 “까다로운 조리법을 전수 받느라 젊은 시절 내내 이을(몸살) 들며 살았다”고 말했다.
1인당 2만~10만원까지의 다섯 가지 메뉴 중 중간치(5만원·안압정식)를 주문해봤다. 신선로·떡갈비·전복·회·식혜 등 30여 가지 요리가 상을 가득 메웠다. 하지만 고급 한정식집이라면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요리에 약간 실망스러웠다.
낌새를 눈치챈 듯 김씨는 “우리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음식을 알고 싶으시다고요”라고 물은 뒤 식탁에 올라온 밑반찬 ‘멸장·집장·육장·돔장, 그리고 사인지·수란채·육포’를 가리켰다.
녹둣빛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김씨는 설명했다. “사인지도 배추 백김치와 비슷하게 보이지만 소금과 새우젓을 일절 안 써요. 배추에 직접 담근 멸치액젓과 생조기를 넣고 절인 뒤 새우 끓인 물로 담고, 분홍빛이 선명해질 때쯤 손수 만든 실고추로 태깔과 맛을 조절해요. 맛이 완성되기까지 10여 차례 단계별로 체크해요.”
실제로 ‘장’자 돌림의 밑반찬들도 조리법과 맛이 예사롭지 않았다. 예컨대 멸장의 경우 무를 썰어 하루 동안 절였다가 3일간 물기를 빼고 멸치·간장·물엿을 넣어 6~7시간 졸여 완성시킨다.
5년 전부터 요석궁의 경영을 맡고 있다는 최부자 16대손 최재용(29) 사장은 “우리 집안 손맛의 뿌리는 조선조 숙종 때 사옹원(대궐 안의 음식 장만을 관리하던 곳)의 참봉이었던 3대조 최국선 공”이라고 말했다.
최 사장은 “다른 요리들은 비용이 워낙 많이 들고 조리에 걸리는 시간과 보관 문제 때문에 어른들의 생일 등 집안 주요 행사 때만 맛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시집살이 넉 달째인 며느리 김혜옥(28)씨는 “이런 호된 (부엌)수업을 받아야 할 줄 알았다면 청혼에 진작 퇴짜를 놨을 것”이라고 말했다. / 중앙일보 이기원
최부자 집은 9대 동안 진사를 지내고 12대 동안 연이어 만석을 한 가문이다. 말이 가정식이지 웬만한 부잣집 잔치상에 버금간다.
기본 상차림인 반월정식의 경우, 물김치와 북어보푸라기, 밥식해, 가자미조림, 두부선, 표고찜, 홍어삼합, 밀쌈, 떡갈비 등이 한차례 나오고, 다시 마늘장아찌와 멸치볶음, 장떡, 콩잎장아찌, 무장아찌 등 20여 가지 찬이 한상 가득 오른다.
반월정식, 계림정식, 안압정식, 포석정식, 요석정식 / 예약 054)772-3347
교동 89-7 재매정 사적 제246호 / 1976년 1월 7일 지정 042-481-4650
신라의 김유신 장군 집에 있던 우물이다. 화강암을 벽돌처럼 쌓아 올려 만들었는데, 이 일대가 장군의 집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 김유신 장군이 오랜 기간을 전쟁터에서 보내고 돌아오다가 다시 전쟁터로 떠날 때, 자신의 집 앞을 지나면서 가족들을 보지도 않고 우물물을 떠오게 하여 말위에서 마시고는, “우리 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구나”하고 떠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1993년 발굴조사에서 재매정을 중심으로 사방 70m 지역을 발굴하였다. 우물의 깊이는 5.7m 이며, 가장 넓은 부분은 1.8m이고, 바닥의 지름이 1.2m로 벽돌같이 다듬은 돌로 만들었다. 우물 옆에 비각이 있고 비각안에 조선 고종 9년(1872)에 이만운이 쓴 비석이 있다.
인왕동 76번지에 위치한 국립경주박물관은 신라가 꽃피웠던 당시의 화려했던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역사의 메카로 불린다.
1910년 신라 고분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경주 지역의 모임에서부터 수집·전시되기 시작한 신라 유물은 1975년 국립경주박물관이 현재의 위치에 이전·개관하면서 본격적으로 신라 문명의 자태를 드러낸다.
신라 유물이 소장품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지만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 유물까지 총 21만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전시실은 크게 4개관으로 구성된다. 고고관은 크게 선사원삼국실, 고분실, 국은기념실로 구성되어 있다.
선사·원삼국실은 경주와 주변 지역의 선사시대부터 원삼국시대까지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미술공예실은 신라와 통일신라 시대의 불교 조각·금속공예품이 주를 이룬다.
신라금관
고분실에는 신라하면 떠 오르듯 황금과 관련된 장신구류와 금관관모, 목걸이, 굽은 옥 등과 천마총,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유물과 청동그릇, 유물그릇, 각종 모양의 토기가 진열되어 있다. 특히 천마총에서 출토된 계란(달걀)은 이색적이고 무덤 속에서 나온 토우와 토용 등을 통해 당시 신라인들의 사회상을 엿 볼 수 있어 주목된다.
국은 기념실은 고 국은 이양선 박사가 생전에 수집한 귀중한 문화재들 666점이 전시 진열 중인데 그 중 국보 제275호 말탄 무사 모양의 토기와 오리모양의 토기는 눈에 띈다. 기와 전돌 석제품 등 박물관 유물로는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귀중한 문화재로 다시 한 번 한 개인의 노고가 얼마나 대단한지 생각해 본다.
천마총에서 출토된 계란과 토우들/김환대
금관총·천마총 등 신라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는 제1별관과 안압지에서 출토된 유물 3만여 점 중 신라시대의 궁중 생활을 이해할 수 있는 유물을 중심으로 마련된 제2별관이 있다.
안압지관은 말 그대로 건물 자체가 모두 안압지 한 곳에서만 출토된 유물들로 진열 전시되어 있는데, 안압지의 역사와 의미 출토유물 들이 있어 안압지에 관한 모든 곳을 이 곳에서 다 알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압지관은 말 그대로 건물 자체가 모두 안압지 한 곳에서만 출토된 유물들로 진열 전시되어 있는데, 안압지의 역사와 의미 출토유물 들이 있어 안압지에 관한 모든 곳을 이 곳에서 다 알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층으로 구성되어 둘러 보는 것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각종 동물뼈와 놀이 기구인 주령구(복제품)는 당시 신라 왕실의 풍류는 알 수 있다.
현재는 에밀레종이라 불리는 성덕대왕신종과 고선산터 삼층석탑을 비롯해 경주 지역의 궁·절터에서 옮겨온 석조 유물들이 야외전시관을 가득 메우고 있다.
신라 역사와 불교조각을 한 눈에 감상 할 수 있는 미술관
삼화령애기부처
미술관은 2층 건물로 1층에는 로비부터 석탑에서 출토된 부재들이 진열 중이고 신라역사 자료와 불교조각실로 구성되어 있는데, 임신서기석, 남산신성비, 명활산성 작성비 등 신라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금석문과 이 건물을 지을 당시 발굴과정을 강화 유리로 밑 바닥을 깔아 재현해 놓았다.
당시 신라의 불교문화를 알 수 있듯이 각종 불상과 석조 조각이 전시 중인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곳은 삼화령 애기부처라 불리는 장창골 석조미륵삼존불이다. 미소가 아름답고 이 곳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불상이다.
황룡사의 대형망새
막새
2층은 황룡사실로 주로 사찰에서 출토된 유물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탑 속에서 나온 사리장엄구와 영묘사터에서 발견되었다는 웃는 얼굴무늬 수막새는 볼 만하다.
감은사지 사리장엄구와 황룡사 강당자리 북쪽에서 출토 되었다는 대형의 망새(치미)와 구층목탑 모형은 황룡사의 역사를 알려준다.
야외에도 많은 석조물들 있으나 그 중 설명문과 함께 우리에게는 너마나 잘 알려진 것은 당연 성덕대왕신종일 것이다. 에밀레종과 봉덕사종으로도 불리며 국보 제29호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큰 종으로 그 무게만 18.9톤이나 된다.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을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뒤를 이어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하였다.
성덕대왕신종의 비천상과 고덕사지 3층석탑
종의 맨 위에는 음통(音筒)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동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이 종에는 무엇보다 우수한 2쌍의 비천상이 볼 만 하며 몸통에 남아있는 1000여자의 명문을 통해 종의 내력을 알 수 있다. 현재 타종은 되지 않는다.
야외 마지막 끝 부분으로 돌아가면 구석에 국보 제38호로 고선사지 삼층석탑도 보아야 하는 문화재인데, 원효대사가 주지로 있었던 고선사의 옛 터에 있던 탑으로, 덕동댐 건설로 인해 절터가 물에 잠기게 되자 1975년에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세워 놓았다.
전시된 유물을 훑고 지나는 관람으로 박물관과 친숙해질 수 없었다면 한 번쯤 참여를 권한다. 매시 정각에 울리는 성덕대왕신종 녹음 종소리 또한 신라 천년을 담아내고 있는 박물관의 독특한 묘미라 할 수 있다.
。개관시간 : 3~10월 화~금 오전 9시~오후 6시, 토·일 오전 9시~오후 7시/ 11~2월 오전 9시~오후 5시(관람 마감 1시간 전까지 입장)
。휴관일 : 매주 월요일, 1월1일
。관람 요금 : 초·중·고생 무료, 19~24세 200원, 일반 400원
。전화번호 : 054-740-7518
。주요 소장품 : 신라총금관, 얼굴무늬수막새
。홈페이지 : gyeongju.museum.go.kr
자료 - 주간동아 511호별책부록 / ⓒ 2008 OhmyNews 김환대
홍도 (紅桃) 최계옥(崔桂玉) / 아악 대신 속악 발굴 후학 지도 전념 생 마감
경주 형제산 기슭 위치 2005년 아파트 공사중 행방묘연
"동도명기홍도지묘(東都名技紅桃之墓), 비석이 묻힌 곳을 찾아야 합니다." 정조 임금으로 부터 조선 제일의 명기라 칭송받았던 홍도(紅桃)에 대해 다시 관심이 부각되고 있다.
정조 이후 순조 22년에 걸쳐 30여년간 활동한 경주 명기 홍도 (紅桃) 최계옥(崔桂玉).
그는 우리 전통 음악인 아악(雅樂)보다 속악(俗樂)에 전념하며 살다간 사람이다. 1990년 처음 비문이 발견돼 그해 8월 처음으로 세상에 보도돼 민속자료연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으면서 이를 아는 전국의 예술인들이 경주를 찾아 홍도 무덤을 둘러보곤 했다.
정조의 장인인 국구 박준원의 소실이 돼 11년간 생활했고 정치의 정상에 있었던 남편이 죽은 다음 상례(喪禮)마치고 고향 경주로 내려온 홍도는 궁궐에서 배우고 익힌 실력으로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여 마침내 동도악부(東都樂府)의 사종(師宗)이 됐다.
당시 기생에 대한 사회의 관념은 천인이었으나 적어도 1930년까지는 지식층에게 격조높은 기쁨을 가져다 준 특수신분으로 활동했다. 홍도는 시(詩)와 서(書), 그리고 미모에 뛰어났고 가무 또한 출중해 나이 20세에 상의원에 선발돼 상궁이 되고 기생으로 전국에 이름을 날렸다.
세도정치하에서 농민의 동요가 극심한 시기에 살았으면서도 오진 우리 음악인 아악보다는 속악의 발굴 장려와 후학지도에 전념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최계옥은 본관이 경주로 세거가인 최동명과 세습관기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생몰연대가 분명하고 묘와 비문이 남아있는 점도 매우 큰 특징 중의 하나다. 경주군 향토사에는 현 법원 경주지청 부지에 교방사무소를 두고 현 감리교회 부지에는 관기양성소를 두어 운영했다고 돼 있는데 이곳은 조선시대 경주관아 안에 해당되는 곳이다.
최계옥이 죽은지 30년이 지난 철종 2년, 홍도 최계옥의 비문을 쓴 첨지중추부사 최남곤은 무과에 급제한 자이며 소리꾼 이상복 등 비문 걸립에 적극 참여했던 이들을 볼 때 교방은 물론, 경주관아를 비롯한 이 고장의 많은 이들이 홍도 최계옥을 따르고 덕을 추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2005년 경주시 도지동 코아루 아파트 시공을 빌미로 이모씨가 무연고 분묘 개장을 하면서 비석은 사라졌다. 당시 무연고분묘 개장을 허가해준 경주시와 월성동 담당 직원과 개장 시행자 이모씨, 당시 일을 했던 포크레인 기사 임모씨 등은 서로 모른다고만 할 뿐이다. 이에대해 "경주시는 홍도 최계옥을 발굴하는 일에 소홀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시인 최모씨는 말한다.
소리꾼 이상복(李尙福)이 비문을 짓고 전 검지(僉知)최남언이 388자 예서체로 정교하게 쓴 비문에는 '철종2년 경주의 풍류객 및 교방의 여러 악공과 기생들이 홍도(紅桃)를 정부의 사종(師宗)으로 여겨 그를 잊지않기 위해 약간의 재물을 보아 석돌을 세워 무덤을 표시한다. 나는 이 홍도의 실적을 써서 보내니 세상에 오래 전하도록 할 뿐이다. 명(銘)하기를 미인이 있어 동방에 으뜸이었으니 귀여운 얼굴 예술이 능하였도다. 동도(東都)의 형제산 선영아래 간좌(艮坐) 언덕에 장사지내다'라고 분명하게 쓰여있다. 뿐만 아니라 홍도(최계옥)에 관한 일대기가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조선의 명기로, 가장 뛰어나 예술인으로 살았던 홍도의 무덤은 경주시 도지동 형제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었다. 홍도 무덤 발견당시 묘의 둘레 10m, 높이 2m정도로 일반 묘보다 2배 내외로 컸으며 비의 높이 120㎝, 너비 50㎝, 두께 20㎝, 반으로 깨진것을 시멘트로 접착시켜 놓은상태, 글자도 몇 개 부서졌다. / 경북일보 진용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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