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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인천·섬

교동도 창후리 교동읍성 화개사 교동향교 대룡시장

by 구석구석 2007.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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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성 바다관문으로 ‘평양보다 더 짜임새 있는 곳’ 교동도

고려 때부터 왕족 전용 유배지…왜구 침탈 극심

 

강화도와 교동도간에 건설된 연륙교

강화도 창후리에서 교동도의 월선포 간․직선 항로는 느린 배로 건너도 20분 거리다. 하지만 항해 시간은 물때에 따라 차이가 크다. 간조 때는 평소의 두 배가 넘는 50분이 걸린다. 오늘 오후 배는 간조 물때에 걸렸다. 썰물은 두 섬 사이의 바다를 개울처럼 얕게 만들어 직항로를 끊어 놓는다. 바로 앞에 목적지를 두고도 여객선은 길게 돌아간다. 강화 본섬 해안을 따라 남하하던 여객선이 석모도 섬돌모루 부근에서 급히 뱃머리를 돌려 북진한다. 

 

교동도는 민간인 출입 통제선(민통선) 안의 섬이다. 휴전선을 기점으로 남북이 각각 2킬로미터씩 뒤로 물러난 남방 한계선과 북방 한계선 안의 지역이 비무장 지대다. 민통선은 비무장 지대 남방 한계선에서 다시 남쪽으로 5~20킬로미터 사이에 그려져 있다. 민통선은 1954년 2월, 미 육군 8군 사령관이 직권으로 그어놓은 선이다. 미국 군인이 한국 땅에 임의로 그어놓은 선에 불과하지만 한국인들에게 민통선은 법보다 무서운 강제력을 가진다. 전쟁이 끝나지 않은 전장(戰場)에서 무력은 법보다 우위에 있다.

 

교동은 북의 황해도 연백과 강화도를 사이에 두고 드넓다. 연백과는 불과 5킬로미터 거리. <택리지>에서 "깊고 넓으며 한없이 크다"고 한 곳이 바로 교동과 강화 일대다.

 

지금은 면단위 행정 관청이 있는 한적한 섬이 되었지만 오랜 세월 교동은 군사적 요충지였다. 조선 시대에는 교동에 경기, 황해, 충청의 수군을 관할하는 해군 사령부, 삼도통어영까지 있었다. 교동과 강화는 오랜 세월 고려의 도읍지인 송도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관문 역할을 했다. 왕성의 관문이었던 교동은 강화와 함께 서남해의 어느 섬보다 왜구의 극심한 노략질에 시달려야 했다. 남부지방에서 올라오는 상선과 세곡선의 길목이었던 때문이다. 

 

1360년 왜구는 강화에서 백성들 300여명을 살해하고 쌀 4만여 석을 약탈해 갔고 1371년에는 고려의 병선 40여척을 불태우는 등 끊임없이 약탈과 살륙을 자행했다. 왜구의 침략에도 기울어 가던 고려의 조정은 무능했다. 정규군이 맞섰지만 제대로 전투 한 번 치러보지 못하고 전멸 되거나 도주하기 일쑤였다. '교동군지'에 따르면 심지어 왜구들이 교동도에 장기간 주둔하며 주민들의 토지를 강탈해 소작을 주고 소작료를 받아가기까지 했다 한다. 고려 왕성을 코앞에 두고 왜구들이 섬을 직접 통치한 것이다.

 

전남 해남 지역이 선비들의 유배지였다면, 교동도는 왕족의 유배지였다. 정쟁에서 밀려난 선비들이 한양에서 먼 곳으로 보내진 반면, 왕족은 동정을 살펴야 하니 가까우면서도 완전 격리된 곳으로 보내졌다. 교동도가 적임지였던 것. 최충헌에 의해 쫓겨난 고려 21대 왕 희종을 시작으로 조선시대의 안평대군, 임해군, 능창대군, 연산군 등 11명의 왕족이 유배됐었다. 교동도는 ‘강화도령’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먼 친척이 모함으로 피살되자 두려움에 젖어 이곳에 피신해 있었기에 ‘철종 잠저소’라는 곳도 있다.

 

 

 

교동은 연산군의 유배지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아니더라도 유독 많은 왕족들의 유배지이기도 했다. 교동이 왕족 전용 유배지가 된 것은 늘 대규모 군대가 주둔해 있고 송도나 한양과 가까운 섬이었기 때문이다. 특급 유형수들을 감시하기에 교동만한 곳이 없었을 것이다. 

 

1221년 고려 무신정권 하에서 21대 왕 희종이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발각되어 교동으로 유배되었다. 조선 시대 들어서는 세종의 아들이자 수양대군의 동생인 안평대군이 그의 아들 우직과 함께 교동으로 유배되었다가 살해됐다. 광해군의 형이었던 임해군 또한 진도로 유배되었다가 교동으로 이배된 뒤 죽임을 당했다. 

 

광해군 7년에는 인조의 동생인 능창대군이 교동으로 유배된 뒤 불태워져 죽었다. 그 외에도 광해군의 왕비였던 유씨와 왕족이었던 은언군, 익평군, 영선군 등이 교동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유배 온 조부 은언군을 따라왔던 철종도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교동도에 살았다.

 

하지만 이 땅 어느 곳처럼 교동 또한 역사 유적은 거의 자취가 없다. 과거 관청이 있었던 읍내리에는 교동읍성 성문 한 곳의 홍예문만이 간신히 남아 있다. 이 읍내리에 조선 10대 왕 연산군의 유배지가 있었다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 없다. 연산군이 교동으로 유배된 것은 중종 반정이 있던 1506년 9월이었다. 연산군은 교동에서 3개월 남짓 유배 생활을 하다 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한겨레신문 강제윤 시인]


 

영욕 지켜본 400살 ‘우주목’ 물푸레나무엔 어떤 신령이…

 

면 소재지에서 작은 언덕을 넘어가면 고구리 마을이다. 마을은 교동의 너른 들에 물을 대는 저수지가 있다. 교동은 강화에서 논이 가장 많은 면이다. 가구당 평균 경작 면적이 2만여 평에 이른다.

 

고구리 저수지를 지나 마을 숲으로 들어선 것은 물푸레나무를 만나기 위해서다. 어디선가 천년목이라는 소문을 들었던 터였다. 확인해보니 물푸레나무는 400년 수령의 보호수다. 천년목이 아니어도 물푸레나무는 신령스런 숲의 주인이다. 이 땅에서는 물푸레나무가 당산나무로 모셔지는 경우가 드물지만 북유럽 신화의 이그라드실 물푸레나무는 '하늘과 땅, 지구의 중심까지 삼계를 이어주는 우주목'이다. 북유럽 신화에서는 주신인 오딘까지도 물푸레나무에게 지혜를 얻어가곤 한다.

 

불과 백 년을 살기 어려운 인간에게도 세월의 경륜이 쌓이면 지혜가 생기고 혜안이 열리는데 하물며 수 천 년을 사는 나무들에게 어찌 신령이 깃들지 않을 까닭이 있겠는가. 유럽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는 우주목 신화가 널려 있다. 중국의 <산해경>에도 우주목이 등장한다.



70년대행 타임머신에서 내려 ' 화개사'로 향한다. 고려 말의 문신 목은 이색이 독서를 했다는 절이다. 사찰로 오르는 구불구불한 오솔길이 무슨 복선처럼 화개사에 대한 기대를 부풀린다. 10여 분쯤 올랐을까.


 
 눈 앞에 드러난 절의 모습이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사찰의 문은 나무와 창호지가 아닌 유리와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져 있다. 고려 때 창건 뒤 1840년, 1967년 화재가 있었다지만, 복원할 때 문화적 외양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모습이다. 역사적 유의미는 전설이 아니라 원형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화개산(교동면 고구리) 정상에 위치한 교동봉수대는 고려시대부터 사용하였다 한다. 봉수는 외침을 받거나 나라에 위급한 사태가 발생했을 때 봉화를 올려 연락하는 통신시설로서, 이 곳 봉수는 남으로 덕산(현 덕정산)에, 동으로는 하점면 봉천산 봉청대와 연결되던 곳이다. 현재 봉수대 터는 장방형의 석출단으로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데, 높이가 2.5cm, 가로 8m, 세로 6m의 규모이다.

 

 

선정의 유일한 증거는 선정비를 세우지 않는 것

 

읍내리 교동 향교로 가는 길목에 비석들이 군집해 있다. 조선 시대, 교동을 다스리던 통치자들을 기리는 비석들이다. 안내판은 이 비석들을 "조선 시대 선정을 펼친 교동 지역의 목민관인 수군절도사 겸 도호부사 방어사 등의 영세불망비, 선정비인데 교동 각지에 흩어져 있던 것을 한 자리에 모아 둔 것"이라고 설명한다. 아직도 선정비가 선정을 베푼 자들을 기리는 비석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선정을 베푼 관리들이 저리도 많은데 어찌 백성들의 삶은 온통 고통뿐이었을까.

 

많은 비석들이 수령들이 떠나기도 전에 서둘러 세워졌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지금은 거의 소실되고 없지만 예전에는 교동 전 지역에 비석거리가 있었다고 한다. 가소롭게도 교동의 통치자들 대부분이 '자신의 손'으로 선정비나 영세불망비를 남긴 것이다. 선정비는 실상 통치자들이 자신의 악정을 은폐하는 수단으로 이용한 경우가 많다. 선정비를 세우지 않은 것만이 유일한 선정의 증거다. 하지만 못된 전통은 현대에 와서 새롭게 부활하고 있다. 어느 고을을 가나 군수, 시장 이름의 비석 하나 없는 곳이 없다.

[한겨레신문 강제윤 시인]

 

 

공자 초상화 최초로 봉안된 ‘교동 향교’엔 태극기만 나부껴

 

 

교동향교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28호(1995.3.1 지정)

 

고려 충렬왕 때 안유(안향, 1243∼1306)선생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공자상을 들여와 이 향교에 봉안하였다고 전하며, 이후 각 고을에 향교가 생겼다고 한다. 조선 영조 17년(1741) 지부 조호신이 화개산 북록에 있던 것을 남쪽 기슭으로 옮겼다.

 

향교 안에는 공자의 신주와 우리나라의 유현들의 위패를 모시는 대성전에는 중국의 5성과 신라, 고려, 조선시대의 유현을 배향하고 있다. 유생들이 배움을 익히고 닦는 명륜당과 동ㆍ서재, 제수용품을 보관하는 제기고, 내ㆍ외삼문이 있다.

 

향교 대성전 건물 서쪽에는 성전 약수가 있다. 약수터 물이든 샘물이든 땡볕에 바가지로 땀을 쏟은 나그네에게는 모두가 감로수고 약수다. 안내판에는 '위장병 환자가 마시면 단기간에 완쾌된다고 전해진다'는 안내판이 서 있다.

[한겨레신문 강제윤 시인]

 

 

읍내리에 위치한 교동읍성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3호(1995.3.2 지정)

 

조선 인조 7년(1629) 교동에 경기수영이 설치될 때 세웠으며 둘레는 430m, 높이는 약 6m이며 동, 남, 북 세곳에 성문을 설치하였다. 각 문에는 문루를 세웠는데 동문은 통삼루, 남문은 유량루 그리고 북문은 공북루라 하였다.

 

 영조 29년(1753) 통어사 백동원이 성곽과 여장을 고쳐 쌓았고, 고종 21년(1884)에 통어사 백낙륜이 남문을 중수하였다고 전하나 동문과 북문은 어느 때 없어졌는지 알 수 없으며, 남문인 유량루는 1921년 폭풍우로 무너져 홍예(무지개 모양)문만 남아있다.

 

교동읍성 앞에 서서 광야를 바라본다. 가을바람을 타고 하늘거리는 해바라기들.

 

 [자료 - 인천일보 김진국 / 주간동아 양영훈]

 

 

그 골목에 서면 시계도 더디게 간다 / 1960년대 풍경을 간직한 대룡리

 

“열세살 되던 해에 6·25 사변이 터져 온 가족이 배를 타고 교동도로 왔지. 대룡리 골목에 사람들이 나와 거적을 깔고 장사를 했는데 나와 아버지는 골목 모퉁이에서 닭을 팔았어. 건물이라고는 딱 두 채가 있었는데 이 정육점 건물이랑 저기 있는 ‘개소주집’이 그거야. 전쟁 끝나고 장사해서 돈 번 사람들이 하나 둘 상가 건물을 올리기 시작했는데, 1960년쯤 지금의 모양이 갖춰졌어. 그 뒤에는 간판만 계속 바뀌었지. 참, ‘박통’ 때 새마을운동 한다고 초가 지붕을 미처 뜯어내지도 않고 그 위에 슬레이트를 얹었어. 그래서 지붕 끝에는 아직도 저렇게 지푸라기가 삐죽 나와있다고.” (‘교동 정육점’ 사장 최덕권씨)

 

“전쟁 나고 황해도 사람들이 아주 많이 내려왔어. 지금은 대룡리 인구가 400명 정도 돼. 엄청 많지? 황해도 연백 평야를 건너다보고 싶은 실향민이나 망둥어 잡으려는 낚시꾼이 가끔 찾아오지. 인천 개발된다고 ‘꾼’들이 난리를 떨 때도 대룡리 사람들은 관심이 없었지. 뭔가 변하거나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별로 없어. 그냥 우리끼리 이렇게 사는 게 속 편해. 자, (화투) 패 돌려봐.”(1960~74년 교동면 대룡리 이장을 지낸 한기걸씨)

 

강화도 창후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15분 걸려 닿은 교동도 ‘대룡 시장 거리’에서 만난 할아버지들이 마을 설명을 이어갔다.

 

강화도에는 참 볼 것 많고 놀 것도 많다. 그래서인지 굳이 교동도까지 배 타고 찾아가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군(軍)에서 2000년까지 외부인 출입을 통제한 것이 대룡리의 ‘시계’를 더디게 했다. 그런데 그 덕에 때를 덜 탔고, 그만큼 옛 정취가 아직 골목 구석구석에 남아있다. 분명 2007년 사람들이 북적북적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 터전인데, 수십 년 전 삶의 모습을 일부러 되살려 놓은 것 같다.

 

교동도 최대의 번화가인 대룡시장 골목은 500m 남짓. 빠른 걸음으로 냅다 걸으면 10분만에 끝에서 끝까지 종주 가능하다. 매끈한 새 간판 하나 없는 시장 골목에는 미장원이 제일 많다. 2만원짜리 ‘뽀글이 파마’가 전문이지만 커다랗게 ‘매직 파마’ ‘최신유행 섀기 커트’라고 써 붙인 곳도 서너 군데 있다. 장사가 될까 싶어 들여다보니, 미장원마다 머리를 말고 있는 아주머니 두세 명씩은 다 있다. 미장원이 교동도 아주머니들의 사랑방인 셈.

 

창문에 커다란 ‘미키 마우스’ 스티커를 붙여놓은 분식집, 허름해서 더 정이 가는 통닭집, 그리고 없는 것 빼고 다 파는 잡화점. 잡화점 진열대는 요란한 원색 잡동사니 천국이다. ‘몸뻬’ 바지, 빗자루, 때수건, 빨래 집게, 숟가락, 고무장갑, 줄자, 파마용 롤, 탁구채, ‘최신 입수 타파웨어’…. 사고 싶은 건 없다. 그런데 알록달록 한데 엉킨 모양이 사진 촬영용으론 귀엽다.

 

대룡시장 골목의 첫 인상은 ‘이게 뭐야, 별 것 없네’. 진짜 특별한 것, 유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을지 모른다. 그런데 누추해 보이는 시장 거리를 걷다 보면 어린 시절 ‘골목의 추억’이 어느새 그림자처럼 달라붙는다. 팔목을 돌리는 ‘필살기’로 딱지를 휩쓸어가고, 물구나무서기도 서슴지 않으며 고무줄을 넘던 친구들은 어디서 무얼 할까. 추억에 잠겨 골목을 걷다가 손발이 시리면 ‘드르륵’ 소리를 내며 문을 열어야 하는, 작은 다방에 들어가 ‘계란 띄운 쌍화차’를 마셔도 좋다.(단, 쌍화차 가격은 5000원으로 도시 가격 못지 않다.)

 

시장 끝자락에는 ‘광무 10년(1906년)’ 문을 열어 지난해 개교 100년을 맞은 교동 초등학교가 있다. 전교생 100명. 운동장을 둘러보니 철봉과 칠이 바랜 시소가 정겹다. ‘반공소년 이승복’과 ‘효자 정재수’의 동상 옆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도 빠질 리 없다.

 

TIP. 대룡리에서 예쁜 사진 찍기

‘증명 사진’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시간여행’ 느낌을 최대한 살려 마치 30~40년 전 과거로 훌쩍 뛰어넘은 듯한 사진이 예쁘다. 골목길은 좁고 길다. 꼬불꼬불한 길의 모양새를 담으려면 최대한 멀리서 망원렌즈를 이용해 찍는다. 광각렌즈를 써서 배경을 살리는 것도 방법이다. 가게 중에는 ‘교동 이발관’이나 잡화를 산처럼 쌓아놓은 가게 등이 사진 배경으로 제격이다.

 

창후리 선착장(032-933-4268)~교동도를 오가는 배가 일출에서 일몰까지(동절기 오전 7시30분~오후 5시) 20~45분 간격으로 있다. 평소에는 15분 거리지만 썰물 때는 배가 돌아가기 때문에 약 50분이 걸린다. 썰물 시간과 겹치면 마지막 배 시간이 당겨지므로 교동도로 출발할 때 돌아오는 배편을 미리 확인하자. 차를 갖고 탈 수 있다. 가격은 차 1대(운전자 포함) 1만4000원, 성인 1인당 1500원. 교동도 월선포에 내린 후 큰길을 따라 4~5㎞ 정도 가다 오른쪽으로 교동중·고등학교와 교동 파출소를 지나면 차가 들어갈 수 없는 막다른 길이 나온다. 여기서부터가 대룡시장 골목이다.  

[조선일보 김신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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