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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충청북도

보은 서원리 상현서원 서원계곡 선병국가옥

by 구석구석 2011.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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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현서원은 원래 지방유림에서 이 지역 출신인 기인명현 김정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하면서부터 시작 그후 참봉 인황이 서� 건립을 추진하던 중에 성제원 현감이 부임하여 1555년 삼년산성 안에 서원을 건립하고 추진하던중 1610년 사액되면서 상현서원으로 바뀌었다.

 

 

1672년에 현 위치로 이전되었으나 1871년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 현재 건물은 1949년에 다시 지은 후 1986년 해체 복원한 것으로 정면 3칸,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의 목조와가이다.

 

 

사우앞에는 내문인 일각문이 있고 일각문 앞에는 묘정비와 이를 보호하기위해 비각이 있으며 비각안에는 1949년 김명구가 쓴 상현서원중수기기문판이 걸려 있다.

 

 

 

정이품송의 정부인으로 알려진 천연기념물 353호 서원리소나무

서원리 소나무는 높이 15미터이며 지상 70센티미터에서 두개로 갈라지고 갈라진 줄기의 밑둘레는 3.3미터와 2.9미터로 수관폭은 동서가 24미터 남북이 23미터로 평균 23.5미터이다. 가지밑의 높이는 4.5미터이며 수령은 600년으로 추측하고 있다. 서원계곡 길가의 경작지 가장자리에 자라고 있으며 앞에 내가 흐르고 앞산에는 희귀수종인 망개나무가 드문드문 보인다.

 천연기념물인 망개나무, 속리산과 화양동으로 이어지는 계곡에 군락을 형성하고 있다.

 

서낭나무로 살아남은 나무의 하나로 법주사 입구의 정이품송과 내외지간이라고 하기도 하며 정이품송이 곧추 자란데 비하여 두개로 갈라졌기 때문에 암소나무라고 하며 정이품송과 내외지간이라고 하여 정부인소나무라고 불리기도 한다.

 

 

서원리 소나무는 주변에 이름난 유적지도 없고 속리산의 외지에 있어 찾는 이가 많지 않아 모르는 사람도 많지만, 그 아름다운 풍채를 본 사람이면 소나무의 웅장함과 장대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너무나 길게 쭈∼욱 뻗어나가서일까? 아니면 병에 걸려서일까? 그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서원리 소나무도 남편과 같이 지지대에 의지하고 있다.

 

서원리 소나무 주변에는 몇 무더기의 이름 모를 돌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는 서원리 소나무에 간절한 소망을 비는 사람들이 정성껏 쌓아 만든 것으로 보인다. 서원리 소나무는 비록 남편인 정이품송과 600여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몸은 떨어져 있었지만 지금까지 잘 견뎌온 것처럼 앞으로도 병에 걸리지 않고 자연재해도 잘 버텨내서 간절한 소망을 비는 사람들 곁에 오래오래 남아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서원리의 서원계곡

아름다운 산수와 어울려 한폭의 산수화를 방불케하며 여름 피서지로 각광을 받고 있어 속리산 국립공원내 제2의 화양계곡이라 부를 정도이다.

 

 

계곡의 상류에 위치한 삼가저수지에서는 낚시도 즐길 수 있어 여름 휴가철인기 피서지로 알려져 있다.

다만 계곡주변에 숲이 적다는 것이 흠이다.

 

 

한국전쟁때 폐허가 된 토골사 터가 있고 절터 앞뒤로 수백년생의 참나무들이 있다. 정상은 평평하며 넓은 보은평야가 내려다 보이고 구병산과 속리산사이의 서원계곡과 계곡 진입로 주변에 있는 속리산 정이품송을 닮은 큰 소나무(서원리소나무)를 살펴볼만하다.

 

 

 

 지원이 게임보러 갔다가 들렀던 서원계곡

 

 

 

충북알프스 시발점 산꾼들의 캠프 청솔가든

구병산에서 속리산, 관음봉, 상학봉으로 이어지는 43.9km 능선 상의 산군이 충북알프스로 불린다. 보은군에서는 1999년 이 능선 상의 산들을 하나로 묶어 ‘충북알프스’로 지정, 특허청에 업무표장등록을 했다. 자손만대로 이어질 이 이름을 창안한 사람은 당시의 보은군 정중환(鄭重煥) 부군수였다. 10년 전의 일인데, 구병산 자락에 살고 있는 많은 분들이 지금 이 분의 공덕을 칭송하고 있다.

 

종주의 시발점으로 삼고 있는 장안면 서원리에는 종주팀들이 캠프로 이용할 수 있는 ‘청솔가든(043-544-2525)’이 있다. 황토 숙박시설 5동에는 장작불로 온돌을 덮히는데 60명이 동시에 이용할 수 있는 규모. 주인 신국범(53)씨는 종주팀들에게는 각별한 배려를 하는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군청이나 한번씩 다녀간 많은 산꾼들로부터 격려를 받기도 한다고 했다.

 

100명이 함께 이용할 수 있는 식탁에 넉넉한 주차공간이 확보되어 있다. 한우 1인분(180g) 23,000원, 더덕백숙 30,000원. 흑염소(시세)를 마리당으로 주문하고 단합대회를 하는 단체가 많다고 했다.

 

99칸의 중요민속자료 134호 선병국가옥

 

아직까지 과거의 모습을 고이 간직한 채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어 국가의 도움을 받아 웅장한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1984년 1월 중요민속자료 제 134호로 지정.

 

 솟을대문의 밖과 안모습

보은에서 속리산 방향으로 12km 떨어진 하천가에 위치한 이 집은 1만 여 평의 대지에 안채, 사랑채, 사당(祠堂) 등 6동의 주건물(主建物)과 나머지 부속건물(附屬建物)이 있는 아흔 아홉 칸의 집이다. 하지만, 곳간까지 포함하면 134칸이라고 알려져 있다. 집은 고종 9년(1903년) 10월에 착공해서 일제의 갖은 억압 속에서도 무려 20여년이 지난 1919년에서 1921년 사이에 완공되었다고 전해진다.

 

담장주변과 아래왼쪽은 가옥배치도 오른쪽은 입구의 안내간판

 

원래 보은 선씨家는 전남 고흥에 살던 보성선씨(寶城宣氏)였는데, 전국을 돌면서 집터를 찾다가 이곳이 연꽃이 물에 뜬 형상인 연화정수형(蓮花淨水形)이어서 자손이 왕성하고 장수를 기원할 수 있다하여 정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 오고 있다.

솟을대문 반대편에 있는 밖으로연결된 문과 안채

특히, 이 집은 전통적 건축기법에서 벗어나서 건물의 칸이나 높이 등을 크게 하는 경향으로 변화를 보이던 시기의 대표적인 건물로 손꼽힌다. 집터는 속리산에서 흘러내리는 삼가천의 큰 개울 중간에 삼각주를 이룬 배의 형국같은 섬으로 명당자리로 알려져 있다.

 

 

 장체험장과 장독으로 왼쪽사진은 도별로 설명이 붙은 정리된 항아리

 

지금도 선씨家 거주, 일부는 고시준비생들의 공부방으로
사람이 살고 있는 몇 안되는 유적지의 하나인 충북 보은의 선병국 가옥에는 아직도 선씨 가문의 후손들이 자리를 잡고 살아가고 있다.

넓은 부지로 인해 관리가 어려워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고, 고택답게 주변의 소나무에는 담쟁이 덩굴이 타고 올라 소나무 전체를 휘감고 있다. 비록 지금은 후손들 일부만 살고 있지만 예전에는 정말 가문 전체가 같이 살아도 충분히 남을 만한 규모의 가옥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 이곳에는 선병국씨 내외와 아들 내외가 살고 있으며, 조용하고 한적한 외곽에 위치하고 있는 탓인지 집 한켠에는 고시생들의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어 그 곳이 숙소이자 공부방이라는 것을 금세 눈치 챌 수 있다. 선병국 가옥을 견학하면서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현재 집안에 살림살이가 있어 내부공개를 하지 않아 내부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당대 제일의 목수들을 뽑아 이상형으로 집을 지었다고 하는데 개화의 물결을 배경으로 새로운 한옥의 완성을 시도한 점에서 학술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집이다. 현재 사랑채는 찻집이다.
얼마 전 이 집의 씨간장을 부어 만든 덧간장 1ℓ가 ‘350년 묵은 간장’이라 하여 한국골동식품예술전에 초대되었다가, 한 대기업 회장집에 무려 500만원에 팔려나가 세간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043-540-3395)

 

 'H'자 모양을 하고 있는 사랑채

 

 

선병국 가옥과 인접한 곳에는 선병우, 선병묵가옥이 위치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지금은 식당으로 사용을 하고 있는 선병우 고가 앞에 씌여진 안내 간판의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1940년대에 지은 집으로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중문 등을 고루 갖춘 전통적인 건물배치를 하고 있다.
각 채가 독립하고 있는 남부지방의 가옥배치와 유사하며, 간살을 넓게 잡고 있는 점이 특색이다. 당시대의 변화된 양식 기법을 보여주는 건축물이라고 하겠다. 이웃하고 있는 국가지정 중요 민속자료 제134호인 선병국의 가옥과, 충청북도 문화재 자료 제4호인 선병묵고가와 함께 건축양식과 수법이 동일하다.

 

 

 

 

보은의 삼산중에 하나인 금적산은 속리산은 아버지, 구병산은 어머니, 금적산은 아들산이다.

보은과 삼승면 서원리에 남북으로 삼태기 모양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해발 652미터이며 이산에는 전 국민이 3일간 먹을 수 있는 보배가 묻혀있다고 하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금적산에서 구병산과 속리산의 능선을 볼 수 있으며 산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었는데 옥천군 청산의 박달라산에서 연락을 받아 북쪽의 용산점 봉수대로 전하는 봉수였는데 조선시대에 없어진 것으로 알려졌으며 산정상은 조망을 즐기며 쉬어가기 그만인 곳으로 동쪽으로는 속리산의 주봉인 천황봉과 구병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서쪽으로는 웅장한 대청호반과 장계국민관광지 북쪽으로는 보은군의 넓은 평야지대가 발 아래로 내려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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