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휴천면 엄천강변의 마을…유배 온 세종의 왕자 발자취 따라 동네 한바퀴 '역사산책'
[주말&여행] 경남 함양 휴천면 엄천강변의 마을…유배 온 세종의 왕자 발자취 따라 동네 한바퀴 '
저 강에 섬이 있었다 섬은 등 굽은 작은 새우처럼 생겨서 새우섬이라 불렸다 섬은 굽어 흐르던 강물이 어느 날 두 줄기로 갈라져 생겨났다고 했다 어느 날 생겨났던 섬은 또 어 수도권을 제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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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복위 연루 '한남군' 엄천강 새우섬 유배
한남마을 입구 충혼비·정자 나박정 등 남아
1459년 세상 떠난이후 마을 제사때 혼 위로
함양군수 김종직 차밭 조성 공물 걱정 덜어
동호마을에 조성터 표지석 세우고 뜻 기려
저 강에 섬이 있었다. 섬은 등 굽은 작은 새우처럼 생겨서 새우섬이라 불렸다. 섬은, 굽어 흐르던 강물이 어느 날 두 줄기로 갈라져 생겨났다고 했다. 어느 날 생겨났던 섬은 또 어느 날 큰 비에 지워졌다. 강변에 호박돌이 널려 있는 곳이 옛날 섬이 있던 자리라는데, 보는 곳 마다 호박돌이고 또 눈이 부셔서 찾지를 못하겠다.
그 섬에 세종의 아들이자 조선의 왕자, 한남군(漢南君) 이어(李)가 살았다.
◆ 한남마을
저 강은 엄천강이다. 지리산 뱀사골, 칠선골, 한신골 등 북쪽 계곡의 여러 물줄기가 모여 이룬 강이다. 임천이라고도 부른다. 지리산에서 발원하는 물줄기 중 가장 수량이 풍부하고 급류가 많아 한여름 래프팅으로 이름난 강이다. 엄천강이 제법 수량을 불려서 강폭이 넓어지고 흐름이 완만해진 곳에 한남마을이 있다.
한남군의 군호(君號)가 그대로 동명인 곳, 이 마을 앞에 새우섬이 있었다고 한다. 강변의 솔숲으로 총총 나아간다. 수백 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소나무 숲이다. 숲속에 금줄을 두른 돌탑이 떠내려 온 섬처럼 오롯하다.
동제를 지내던 곳인데 면내에서는 유일하게 남아있다고 한다. 강을 바라보고 선 운동기구들이 묘하게 평화로워 나도 운동기구처럼 강을 본다. 새우섬은 어디에 있었을까.
한남군은 세종의 후궁 혜빈양씨(惠嬪楊氏) 소생의 왕자다. 혜빈양씨는 단종의 유모였고, 1452년 단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 보필하며 내명부의 중심이 되었던 인물이다. 1453년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이 정권을 장악하고, 1455년 단종이 폐위되었다.
세조가 등극한 바로 그날 혜빈양씨와 금성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 영풍군(永豊君) 이전(李) 그리고 한남군은 역모를 꾀하였다는 죄로 유배 길에 올랐다. 혜빈양씨는 겨우 몇 개월 뒤인 12월에 유배지에서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금성대군은 1457년에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고 영풍군 역시 같은 해 처형되었다고 한다. 한남군은 금산과 아산을 거쳐 이곳 함양 엄천강의 새우섬에 유배되어 고립되었다. 그 때가 세조 2년인 1456년이다.
실록에 따르면 새우섬 한남군의 거처는 가시울타리로 둘러싸 외인과 통하지 못하게 했고 건장하고 부지런하며 조심성 있는 사람을 골라 유배지 네 모퉁이를 나누어 지키게 했으며 우물은 담 안에 파서 자급하게 하고 식량은 열흘에 한 번씩 제공되었다고 한다.
마을 입구의 작은 숲에 나박정이라는 정자와 한남군의 충혼비가 있다. 한남군이 한 번씩 들러 서책도 보고, 시간을 보냈다는 정자다. 마을 뒤편으로 한남군의 산책로였다는 대숲길도 있고 마을 안에는 한남군의 집터였다는 '가대지'도 묵은 땅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섬과 마을을 때때로 오갔던 것일까. 섬에 위리안치 후 마을로 옮겨졌을 가능성도 있겠다.
건너편 강변에 한오대(漢鰲臺)가 있다는데 찾지 못했다. 한남군이 노닐며 시름을 달랬다는 자라 모양의 바위다. 훗날 유생들이 한남군의 흔적을 기려 새우섬에 정자를 세우고 한오정이라 했는데 그 또한 자취가 없다. 한남군은 1459년에 세상을 떠났다. 29세였고, 정확한 사인은 알 수 없다.
기록에 따라 병으로 죽었다고도 하고 굶어 죽었다고도 하며 사약을 받고 죽었다고 하는 등 분분하다. 마을사람들은 봄가을 토지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한 그릇 밥을 올려 한남군의 혼을 위로했다고 한다. 그는 영조 때 신원되었으며 묘는 함양읍 교산리 상림 뒤에 있다.
◆ 동호마을
한남마을 동쪽에 동호마을이 있다. 신라시대 엄천사(嚴川寺)라는 절이 창건된 이후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었다는 마을이다. 낙성식 법회에 헌강왕이 거둥하였고 최치원이 사찰의 발원문을 지었다는 대단한 사찰로 엄천강 이름이 엄천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마을 앞 강변에 충적지가 넓은데 단 한 장면이 도드라져 멈추지 않을 수 없다. 커다란 느티나무와 청풍정(淸風亭)이라는 작은 정자 하나, 작은 비석 몇 기, 그리고 작은 차(茶)밭이 한데 모여 있는 장면. 이 모두들 앞에 큼직한 바윗돌이 서 있고 '점필재 김종직선생 관영차밭 조성터'라고 새겨져 있다.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갔으나 결국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가 부관참시를 당한 인물인 김종직. 그는 성종 때인 1470년부터 1475년까지 함양군수를 지내면서 이곳에 차밭을 만들었다. 당시 함양의 공물은 차(茶)였다.
그는 '차를 조정에 올려야 하는데 우리 군에서는 생산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해마다 백성들에게 차를 공물(貢物)로 바치라 한다. 백성들은 전라도에 가서 차를 사와서 공물로 바치는데, 쌀 한 말을 가져가면 차 한 홉을 살 수 있다. 내가 이 군에 부임한 초기에 그 폐단을 알았다'고 한다. 그리고 한동안 관의 돈으로 차를 구입해 공물로 바쳤다.
이후 그는 오래전 보았던 삼국사기에 '신라 흥덕왕 3년인 828년 대렴(大廉)이 당나라에서 차나무 종자를 들여와 지리산에 심었다'는 이야기를 기억해 낸다. 그리고는 노인들을 만날 때마다 차나무에 대해서 물어보곤 했다. 그러다 마침내 엄천사 북쪽 대밭에서 차나무 몇 그루를 찾아냈다.
그는 일대의 땅을 사들여 차밭을 조성했고 몇 년이 지나자 차나무는 제법 번성했다. 관영차밭 조성터 표지석 뒤편에 그의 기쁨을 노래한 시가 새겨져 있다.
'우리 백성 조금은 편케 되어 기쁘구나. …대숲 밖의 황폐한 밭 몇 이랑을 개간했으니/ 새 부리 같은 보랏빛 찻잎 언제쯤 볼만해질까/ 백성들의 마음 속 걱정을 덜어주려는 것일 뿐.' 우리 백성 조금은 편케 되어 기쁘구나, 기쁘구나, 자꾸만 되뇐다. 근래 재현한 차밭은 초라한 규모지만 층층이 빼곡하다. 마을 사람들은 찻잎을 수확할까. 차향이 궁금해진다.
/ 영남일보 2025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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