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 장터는 굳이 물건을 사지 않아도 즐겁다. 장꾼들이 펼쳐놓은 물건들을 구경만 하는데도 하루 해가 짧은 곳이 모란장이다. 물건을 놓고 흥정하는 모습은 지나치던 구경꾼을 미소짓게 한다.
모란 장터는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그야말로 없는 게 없다. 먹거리와 즐길거리가 즐비하다. 우리 곁에서 사라진 풍경도 장터에 가면 다 볼 수 있다. '고약'을 파는 모습은 반갑기까지 하다.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성남 모란장터
장터 한켠에선 엿장수들의 노랫소리가 흥겹다. 요란스럽게 화장한 엿장수들의 입담에 어르신들의 입에 함박꽃이 핀다. 둥둥 울리는 북소리가 사람들을 모으고 노랫가락이 이어지면 엿은 어느 새 팔린다.
무명 가수의 옷차림은 언제봐도 멋스럽다. 그는 자신의 노래가 담긴 테이프를 판다.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홍보도 하고 돈벌이도 한다. 밤무대에 출연하는 가수처럼 반짝이 옷을 입고 있어 모란장터의 인기맨이다.
모란장은 매월 끝자리가 4일과 9일에 선다. 모란장의 역사는 45년 정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명맥만 유지하는 인근의 장터보다 사람이 많다. 날씨 좋은 날은 장날 하루만도 몇 만명이 다녀갈 정도이니 장터는 발디딜 틈조차 없다.
▲성남시 중원구 성남동 대원천을 복개한 공터 1만2천200㎡의 부지에 250여 개의 파라솔과 800여 개의 좌판이 들어서 장관을 연출한다. 지난 1980년 초반부터 명물 시장으로 불린 모란장의 규모가 가히 짐작이 간다.
제 각기 장터를 찾은 이유는 다르지만 구경하는 모습은 같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보면 금방 배가 허출해지고 먹고 나면 다른 게 또 먹고 싶어지는 곳이 모란장이다. 살 것도 많고 볼 것도 많은 장터에선 밀려오는 유혹을 견디는 게 가장 힘들다.
장터를 도는 사람들의 손엔 비닐봉지 몇 개씩은 기본으로 들려있다. 정이 넘치는 곳이라 작은 돈을 들이고도 비닐은 가득 채워진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덤까지 받으면 오랜 장터 순례에도 힘이 들지 않는다.
성남 모란장은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장터다. 물건을 사고 판다기보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정(情)들을 팔고 산다는 말이 어울리는 곳이다. 물건을 사지 않는다면 단돈 만원만 가지고 나가도 하루가 행복한 곳이 모란 장터이다.
모란은 성남시의 역사와 함께 한다. 70년대 서울에서 밀려난 철거민들이 성남으로 집단 이주를 하면서 모란장은 급속도로 커졌다. 당시 정부는 성남의 야산을 껍질만 벗겨내고 사람들을 살게 했다.
벽돌로 얼기설기 지은 집들은 발로 걷어차면 넘어질 정도로 부실했다. 그 마저 없는 사람들은 천막으로 비가림을 했다.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닌 시절이었다. 서울에서 대책없이 쫓겨난 이주민들은 분노했고 결국 정부를 향해 떨쳐 일어났다.
서울에서 밀려난 철거민들의 애환이 함께 하는 곳
이른바 '광주대단지 사건'이다. 10만명이 넘는 이주민들은 1971년 8월 10일 하루 도시를 점거했다. 공권력도 이들의 분노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도시빈민문제의 본질을 드러낸 이 사건은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만들어낸 최초의 민중 봉기로 평가받는다.
'모란'이란 지명을 만들어낸 사람은 김창숙(金昌淑)이다. 그는 육군 대령으로 예편한 군인 출신으로 고향이 평양인 사람이다. 전해지는 말로 그는 홀어머니를 두고 남하하여 군에 입대하였고 1958년 7월 육군대령으로 예편했다. 당시 그의 나이 32세였다.
군복을 벗은 그는 당시 광주군 돌마면 하대원리인 현재의 모란에서 황무지 개간사업을 시작했다. 함께한 이들은 돌아갈 곳 없는 가난한 제대군인들이었다. 김창숙이 개간 사업을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제대군인들이 모여 들었고 그 인원은 금세 50명이 넘었다고 한다. 군부가 집권하자 김창숙은 광주군수로 특채되었지만 갈 길이 아니라고 판단해 3개월 만에 그마저 그만둔다. 그는 다시 부하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고, 사업단의 명칭을 '재향군인 개척단'으로 정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지역이지만 마땅한 명칭이 없었다. 김창숙은 함께 하는 개척단원들과 숙의 끝에 자신의 고향에 있는 모란봉을 따 '모란'이란 지명을 정했다. 그러니까 모란이라는 지명은 행정상의 지명이 아닌 김창숙과 개척단이 만든 지명인 셈이다.
어엿한 마을이 형성되자 생활여건이 문제였다. 가족이 살아가기엔 생필품이 필요했지만 그것을 사기엔 가난했다. 결국 개간한 땅에서 나온 푸성귀들을 팔기로 했다. 김창숙은 모란에 5일장을 개설하여 생산한 농산품을 팔기 시작했다. 그것이 오늘날 전국 최대의 모란 5일장이 만들어진 계기다.
모란장이 있는 성남은 두 개의 서로 다른 공간이 존재하는 도시다. 하나는 서울에서 밀려난 철거민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시가지, 다른 하나는 신도시 분당이다. 분당과 성남 시청이 있는 구 시가지 사이에 자리잡은 모란 장터는 천당과 지옥의 중간지점에 있다.
분당 신도시에 살고 있는 이들은 성남 시민이길 거부한다. 그들은 행정구역상은 성남시 분당구가 맞지만 정신적 시계는 서울시 분당구라고 생각하며 산다. 분당구가 서울시 강남구나 송파구 옆에 있다고 하는 그들은 여간해선 사람 냄새 풀풀 나는 성남을 지나다니지 않는다.
아파트촌에 임대 아파트 하나 있으면 피해 다니듯, 분당 사람들은 성남 시가지를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사는 모습이 다르다는 이유다. 모란 장터에서 바라보이는 분당시는 신도시답게 번듯하다.
모란은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몸 보신 장터
반면 성남 시가지는 온갓 간판들로 어지럽다. 여관이 전국에서 가장 많기도 한 성남의 참 모습은 성남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끈덕진 삶이다. 사는 게 다들 고만고만하니 고운 분화장 하고 마실 가는 게 어색하다.
모란 장터에 가면 성남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 좋다. 장터를 돌다 다리가 아프면 어디서든 앉아서 막걸리 한 잔 하기도 좋다. 모란 장터는 품목별로 판매 구역이 나뉘어져 있어 가격을 비교 하면서 사는 재미도 있다.
장터에서 삶은 옥수수를 두 봉지를 산다. 6통에 4천원. 어느 집에서 농사를 지었는지 알곡이 실하다. 옥수수를 유별나게 좋아하는 탓에 장터에 가면 옥수수부터 찾는 편이다. 하루 종일 옥수수만 먹어도 '행복'하다.
포장을 친 음식점들이 늘어선 곳엔 한 끼 식사를 하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섰다. 얼큰한 칼국수 한 그릇에 소주 두어병을 비운다 해도 만원을 넘지 않는다. 모란에서 가장 흥미(?)있는 곳은 동물을 파는 구역이다.
비위가 약하거나 심장 약한 이들은 아예 눈길조차 돌리기 힘든 곳이다. 그곳에 있는 동물들은 죽음을 기다리는 것들 밖에 없다. 개를 비롯해 청둥오리, 토끼, 오리, 염소, 닭, 고양이 등등. 인간이 먹을 수 있는 동물은 다 있다.
개소주를 만드는 탕제원은 연심 김을 뿜어낸다. 지나가는데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하란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있다는 말도 덧붙인다. 아직 보약 먹을 나이가 안 되었다며 슬쩍 피한다.
모란장에서 사야하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정
육고기를 파는 곳엔 손님들이 많다. 손님 중에는 중년의 여성도 제법 보인다. 흥정에 나선 여성들은 금방 가죽을 벗긴 오리를 척척 잘도 만진다. 무엇에 쓰려느냐고 물으니 남편 몸 보신 시켜줄라고 한단다. 검게 그을린 개를 들어올리며 무게를 가늠하는 50대의 사내도 있다.
쇠 철망엔 죽음을 기다리는 동물들로 가득하다. 철망에 가두어진 개들도 모든 것을 체념한 듯 풀이 죽어있다. 사진을 찍으려 하는데 그것조차 말린다. 바라보는 마음 편치 않아 서둘러 그곳을 벗어난다.
어느 사람에겐 절실한 곳이기도 한 모란 장터의 동물 시장은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보신탕 한 그릇을 먹기 위해 일부러 장터를 찾는 이들도 많다.
입구 쪽으로 나오면 봄을 팔고 사는 손길이 바쁘다. 꽃 모종을 팔고 사는 아낙들의 입가엔 꽃 같은 미소가 담기고 덤으로 얹어주는 이끼가 더 푸르게 보인다. 방금 전에 보았던 동물들의 애처로움은 활짝 핀 꽃을 보며 씻어낸다.
사람에 떠밀려 가다보면 어느덧 만두국을 파는 포장마차이고, 한 그릇 비우고 사람 틈에 끼면 어느 순간 봄나물을 파는 아낙 앞이 모란 장터이다.
떠밀려 갔다 떠밀려 나와야 하는 모란 장터에서는 시간이란 게 무의미하다. 시간에 쫓긴 사람은 애초 발길을 들여놓지 않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 닷새 마다 차려지는 모란장에서 진정으로 사야하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사람들의 정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가는 게 좋다.
/ 자료 - 오마이뉴스 강기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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